674화 성난 파도로 뛰어들다 (2)
범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고 오른손이 흠칫했다. 이에 몸 절반이 벽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고 다시 암석 절벽에 찰싹 붙었다. 한데 이번에는 몸이 바다 쪽을 향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에 범한은 생각할 여지도 없이, 순전히 본능에 따라 절벽 아래로 3척 정도 미끄러진 후 곧바로 오른손으로 다시 절벽을 쳤다. 그러자 몸이 정말 괴상하게 휘어 아래쪽을 향해 비틀어졌다.
그런데 이 순간 바다 위 병선에서 검은색 화살 십여 발이 범한을 향해 냉혹하고 무정하게 발사되었다. 그리고 범한의 몸을 스친 후 그의 옷을 꿰뚫고는 무섭게 절벽으로 파고들었다.
턱! 턱! 턱! 턱!
범한은 절벽에서 위험해 보였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날쌔게 피했다. 화살은 신출귀몰했다. 그렇지만 순전히 환생 후 20년 동안 쉼 없이 연마한, 그리고 어려서부터 오죽이 잡아 준 기초 덕분에 범한은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피할 수 있었다.
이번은 화살이 연달아 발사되어 범한에게 대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아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범한이 다음에 발을 디딜 곳이 어딘지 정확히 계산된 것으로 보아 그를 절벽에서 떨어뜨릴 작정을 하고 발사된 화살들이었다.
그런데 정말 희한하게도 범한은 이 검은 화살들이 발사되기 바로 직전에, 그러니까 그 찰나의 순간에 미리 예측을 했다. 그리고 체내의 정기는 두 개의 순환로를 따라 강렬하게 운행하며 소모된 정기를 즉시 보충해 줌으로써 범한의 손바닥 중 어떻게든 하나는 절벽에 붙어 있도록 유지했다.
그래서 매번 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을 때 손바닥 하나는 항상 절벽에 붙어 있어 범한이 몸을 비틀어지고 튕기면서 아래로 내려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범한은 암석 절벽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범한은 검은색의 꼭두각시 인형처럼 보였다. 대동산 절벽의 신비한 힘이 그의 사지를 끌어당겨 절벽에서 뻣뻣하고 익살맞게 춤을 추게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곧바로 범한의 움직임을 따라 날아온 검은 화살들이 사납게 범한의 몸을 스친 후 암석에 박혔다. 이에 암석 절벽에는 거칠게 선이 그어졌다. 선 맨 앞쪽은 언제든 저 꼭두각시를 절벽에 못 박아 버릴 듯, 심장을 꿰뚫어 죽여 버릴 듯 살기등등한 기세로 범한을 쫓고 있었다.
* * *
수군의 병선은 대동산 산 아래에 깔린 암초 때문에 섣불리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화살을 쏘아 암석 절벽에 박아 넣을 수 있는 고수는 천하를 통틀어 딱 한 사람뿐이었다. 오로지 그 한 사람만 이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절벽에 몸을 숨긴 범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경국의 정북 대도독 연소을이다.
얼마나 지났을지 모를 무렵, 바다 쪽에서는 더 이상 검은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 절벽에 있던 범한의 형체도 사라졌다. 바다 위와 절벽 아래쪽으로 모두 평온이 찾아와 바닷물이 절벽을 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범한이 드디어 연달아 발사되는 화살을 피해 암초 위로 떨어지는 데 성공을 한 것이었다.
척!
마지막 발의 검은색 화살도 명중시키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사납게 절벽으로 파고들었다. 박히지 않고 밖에 1촌 정도 남아 있던 화살 끝은 웅웅,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화살대에는 검은 천이 몇 가닥 걸려 있었다.
* * *
암초 위의 파도 소리는 하늘마저 뒤흔들 것만 같았다. 범한은 미끄러운 암초 위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계속해서 기침을 해댔다. 수군 병선과 멀리 떨어져 있고 파도 소리마저 크게 울려 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계속되는 범한의 기침 소리가 묻힐 수 있었고, 어둠 속에 있는 그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다.
범한은 얼굴이 창백했다. 인간으로서는 오르내리기 불가능한 가파른 절벽을 기어 내려오고, 또 그 와중에 연이은 연소을의 신들린 화살 공격을 피하느라 너무 많은 정기와 정신력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맨 마지막에 절벽에서 보여준 꼭두각시 춤은 화살을 가뿐하게 피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 그가 이미 높은 경지에 들어섰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는 매 순간마다 신경을 바짝 긴장시켰기에 가능했다.
불가능한 장소에서 피하기 위해서 체내 정기를 대단히 빨리, 그리고 매우 자주 전환시켜야 했다. 한데 이런 건 설령 체내에 강하고 넓은 경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살짝 부담이 될 수 있었는데······.
범한은 정기를 역류시키다가 횡경막 아래 경맥을 다쳤다. 그래서 연신 기침을 해댄 것이었고, 가슴팍 부근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한편 오른쪽 어깨에는 처참하게 상처가 나 있었지만, 범한은 이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감아 돌며 스치는 바람에 근육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심지어는 감찰원에서 비밀리에 제작한 검은색 관복도 찢어져 파편이 상처 속으로 말려 들어가 대단히 통증이 대단한 상태였다. 하지만 급소를 다친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이라 연소을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범한은 절벽에 붙어 있던 터라 더 열세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불공평한 상황 하에서 급습이 들어오고 도망을 치다 보니, 범한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국에는 마지막 화살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험악한 여건에서 연소을의 연속 화살 공격까지 받으며 자신의 생명을 지켜낸 이가 대체 몇이나 될까?
범한은 몸을 바짝 엎드려 바닷물에 옷을 적셨다. 그리고 이 검은 옷에 물이 스며들게 해 바닷물에 잠겨 있는 암초와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
범한은 연소을의 화살에 독이 발라져 있을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연소을이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라 독 따위에는 눈길도 안 준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범한은 막약을 대비해서 이미 품을 더듬어 환약 하나를 꺼내 복용한 뒤였다. 범한은 독을 쓰는 데 있어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몇 안 된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해안선 쪽은 여전히 긴장감이 넘쳤지만 배는 해안으로 다가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배 위에 있는 매의 눈 한 쌍은 절벽 아래의 모든 움직임을 예의주시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범한이 육지로 올라서기 전에 어떻게든 죽이려 할 것이었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그다지 밝지 않았고, 파도는 갈수록 높아져 범한을 보호해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전한 길을 찾는 데 애를 먹게 했다. 그런데 이때 만약 암초에서 그가 경공으로 몸을 띄운다면 이는 연소을에게 재차 자신을 살해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범한은 자신을 조준한 화살 때문에 무력감이 드는 게 싫었다. 특히나 연소을의 화살이 자신을 겨누는 건 너무나도 싫었다.
* * *
범한은 순간 심장에서 경보가 반짝 울린 것 같아 끄응, 하고 소리를 냈다. 범한이 옆에 있는 암초를 오른손으로 한 대 내리쳐 패도의 정기를 거칠게 분출시켰다. 그러자 암초 한구석이 강렬한 힘에 산산조각이 났다.
한편 범한의 몸도 강력한 반동 때문에 비스듬히 호를 그리며 최대한 빠른 속도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보라가 일었지만 이내 점점 더 커지는 파도에 먹혀버렸다. 절벽아래 새하얀 물보라는 감히 자신의 위력을 무시하고 암초로 가득한 바다로 뛰어든 사람을 향해 더 없이 분노하는 것만 같았다.
이로써 범한은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게 되었다. 비록 바닷속 깊숙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매의 눈의 추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니 범한은 바다를 건너가야만 했다. 최대한의 속도로, 가장 절묘한 자세로 잠시 자신을 보호해주었던 암초를 떠나야 했다. 바다가 분노했다 한들 두려워하기 보다는 모든 걸 잊고 바다에 몸을 맡겨야 했다.
범한은 차라리 성난 바다에 맞서고, 바닷속에서 연소을의 화살에 맞아 죽기를 각오했다. 그러므로 암초에 머물며 가슴을 졸이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선 한 가닥이 바다 위를 훑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가닥의 새하얀 선이었다.
파도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새하얀 선은 하늘과 땅의 힘을 뛰어넘기라도 했는지 물보라에 저지당하기는커녕 오히려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대동산 절벽 아래에 선을 그려 넣었다. 마치 천신이 신기한 붓을 쥐고 먹물처럼 변한 분노한 바닷물에 선 하나를 그어 놓은 것만 같았다.
이 새하얀 선은 단순히 물보라가 깨지면서 생긴 물결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2척 정도 떨어진 곳에서 고검 한 자루가 바닷물을 스치며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범한이 몸을 돌려 암초에서 떠나는 순간, 새하얀 선도 암초에 부딪혔다. 그래서 그 고검과 범한의 몸이 전광석화처럼 만났다가 분리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고검과 범한이 마주쳤는지는 알지 못했다.
암초에 큰 혼란이 일었다. 검이 도착하기도 전에 검의 기운이 먼저 몸체를 뚫고 나와 범한이 딛고 있던 검은 암초를 가볍게 쪼개 놓았다.
검 앞에서 암초는 무슨 검은 두부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런 후 검은 파도와 공기를 가르고 대동산의 매끄러운 절벽에 꽂혔다. 고검의 몸체가 단단한 절벽에 완전히 꽂혀 버렸다. 그런 후 칼자루만 남아 검은 절벽 위에서 작은 점이 되었다.
그런데 잠시 후, 검 자루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점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로써 고검은 대동산과 한 몸이 되어 절대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바닷물이 거대한 바윗덩이처럼 무겁게 덮쳐왔다. 그러자 먹물 같은 바닷물이 입이며 코며 귀로 들어가 그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몸은 기절한 물고기처럼 어두운 바닷물 위를 계속 부유하느라 언제든 어두운 해류에 휩쓸려 암초에 부딪힐 것만 같았다.
범한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는 평온 그 자체였다. 범한이 양 볼을 점점 불룩하게 부풀려 체내의 기체 압력을 외부의 해수 압력과 가까스로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
그런 후 오른손으로 바닷물에 선이 하나 일정도로 힘차게 휘저은 후 재빨리 바닷물 안에 잠겨 있는 암초 한 자락을 움켜쥐었다. 이후 범한은 자신의 몸을 수면에서 4~5장 내려간 바닷물 속에 고정시켰다.
앞서 느닷없이 날아온 고검은 범한의 몸을 뚫지는 못했다. 하지만 검의 기운만큼은 범한의 심맥을 파고들어 그에게 내상을 입혔다. 이번 내상은 앞서 연소을이 날린 화살로 얻은 것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러자 범한 체내의 패도 정기가 급속도로 운행하기 시작하며 대자연의 위력에 저항했다. 천일도의 정기도 체내의 운행 통로를 따라 따스한 기운을 순환시키며 섭류운의 경천동지할 공격 때문에 얻은 상처를 서서히 치유했다.
그런데 바닷속 깊이 들어가 있으니 빠른 치유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동안 다친 부분이 심해지지 않도록 억눌러 둘 수는 있었다.
다만 체내에서 완전히 다른 성질의 정기가 빠르게 운행하다 보니 근육에는 큰 무리가 되었다. 이에 한쪽 힘이 체내에서 팽창해버려 콧구멍에서 두 줄기의 핏물이 서서히 흘러나왔다.
피는 검은 바닷물과 섞여 곧바로 붉은 안개처럼 흩어지며 범한의 얼굴을 감쌌다. 화살로 인해 생긴 어깨의 상처에서도 빠르게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범한은 어느새 붉은 칠을 한 가죽 주머니에 구멍을 두 개 뚫어 놓은 것 같은 끔찍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범한은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두 눈은 동그랗게 부릅뜨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암초를 쥔 채 두꺼비 같은 얼굴로 수면 쪽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꺼비가 지금 피를 흘리고 있어 언제 목숨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거였다.
그래서 범한은 변해버린 자신의 몰골에 웃음이 나지도, 웃을 기분도 아니었다. 오히려 앞서 위험했던 순간이 떠올라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