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화 한밤에 산을 봉쇄한 장궁 (3)
범한이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하산을 하기 위해 황제 폐하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했었다. 한데 오히려 황제가 먼저 제안을 해오다니.
다만 이번에는 하산하는 길이 모두 막혀 버렸다. 5천에 이르는 장궁 궁수 외에도 동이성의 가공할만한 9등급 검수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산을 할 수 있을까?
황제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설마 짐이 너를 예까지 끌고 온 게 오씨를 가담하도록 압박하기 위해서라 생각한 것이냐?”
범한이 민망해하며 웃었다.
황제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마치 이 산 정상에 있는 달빛을 모두 가슴에 담으려는 것처럼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한참 후 황제가 냉정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짐이 성공했는지 여부를 떠나, 경도에서는 짐이 죽었다고 말할 터이니······. 그래서 너를 내려보내는 것이다. 짐은 너를 돌려보내야겠다.”
황제가 차분하게 범한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짐의 아들 넷 중에 개, 돼지만도 못한 물건 둘이 나왔다. 네가 짐을 대신해 경도로 돌아가 그들에게 교훈을 주기 바란다. 부디······ 짐을 실망시키지 말거라.”
범한은 마음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그때, 바닷바람보다 더 부드러운 황제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에 남아 짐과 목숨을 건 도박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돌아가거라. 만약 짐이 생각했던 것처럼 끝나지 않는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그 의자에 누구를 앉게 할지, 네가 알아서 결정하려무나.”
범한이 깜짝 놀란 건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황제가 자신을 산 아래로 내려보내려는 건 아들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 이는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둘째, 황제의 말에 과거와 같은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셋째, 황제의 마지막 말에서······.
그 의자에 누구를 앉게 할지, 네가 알아서 결정하려무나? 이게 유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문제는 자신이 아무리 명이 질기다 해도, 장 공주가 기정사실인 양 선언을 하기 전에 천 리나 떨어진 경도로 서둘러 돌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한데 그러한 생각을 현실화할 수 있는 실력이 범한 자신에게 있었던가?
이건 강남 명씨 가문, 최씨 가문, 경도의 조정 관료, 흠천감의 불쌍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황궁과 천하의 판도에 관한 문제였다.
범한의 입가에 한줄기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아무리 경국에서 큰 권력을 쥔 신하라 할지라도 손에는 일개 병졸조차 쥐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을 가지고 황제 폐하를 대신해 경도를 안정시킨단 말인가? 대체 무엇을 믿고 그 의자의 주인을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짐은 지지 않을 것이니라.”
황제의 입가에 옅게 웃음이 피어났다. 그 웃음에는 온통 차가운 살기만 담겨 있었다.
“설령 진다 하더라도 섭류운과 사고검이 짐과 함께 갈 터인데, 무엇이 두렵겠느냐? 그러니 너도 걱정하지 말거라. 진 원장이 경도에 있고, 황태후마마께서도 황궁에 계신다. 모두 큰 풍랑을 일으키지 않을 사람들이다. 그러니 너는 짐의 뜻을 받들어 짐의 옥새를 들고 가거라. 만약 막는 자가 있다면······ 모두 죽이거라!”
범한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섭씨와 진씨 두 가문도 반역을 했으니 자신이 대종사라 한들 기껏해야 유격전밖에 치를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 어찌 그들을 전부 죽일 수 있을까?
황제의 마음속에 있던 불확신을 엿본 범한은 암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만약 정말로 대동산에서 붕어하신다면 천하가 어떻게 변할까?
태자나 둘째가 계승한다면 경국에서 자신을 받아줄 곳은 없을 것이다. 설마 정말로 그 보물단지를 품은 채 제2의 길을 가야 한단 말인가?
하나 아직 가장 위험한 국면까지 온 건 아니었다. 산 정상에는 아직 늙은 홍 태감과 오죽 아저씨, 그리고 호위 백여 명이 있었다. 그러니 어떤 강적을 만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강제로 대동산에 오르려면 길이 하나밖에 없었다. 산 아래에 있는 장궁으로 무장한 궁수 5천 명의 임무는 분명 대동산과 천하 사이의 연결을 끊어 놓는 거였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적어도 3일 이상 유지해야 했다. 이는 경도 사변을 위해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고, 또한 본격적으로 군주 시해가 시작되면 이들 반란군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해서였다.
왜냐하면 황제는 바보같이 하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 섭류운이 산에 오르겠지.’
이건 확실히 도박이었다. 만약 천하 삼국의 대세가 여전히 과거와 같다면 경국의 군주가 섭류운을 제거하기 위한 덫을 놓은 일은 분명 북제와 동이성 입장에서는 기뻐할 일이었다. 그러니 고하와 사고검은 모두 자신의 신분 따위 생각하지 않고 이곳으로 와 가담할 것이다.
범한은 이마에 흐르던 식은땀이 식자 온몸이 썰렁했다.
오주에 있을 때 장인어른인 임약보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신신당부한 적 있었다. 충분히 유혹적이고 멋진 목표가 생기면 어쩌면 대종사들도 자연스레 합류할 거라고.
범한은 갈수록 입가가 썼다.
‘일이 정말로 그런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대동산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설마 황제 폐하도 처음부터 이런 국면은 예상하지 못하셨던 걸까?’
조심스레 황제의 얼굴을 힐끗 보니, 낯빛이 살짝 음침해져 있었다.
‘밤인데도 눈동자에서 불꽃이 반짝이는 건······.’
범한에게는 더 이상 이런 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대신 머릿속으로 매우 빠르게 현 국면 분석에 나섰다. 대동산에 친 덫은 아직 승부가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치 국면에 빠지면 경도 쪽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자신은 어떻게든 황제 폐하께서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경도에 계신 황태후마마께 전해야 했다.
설령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신다 하더라도 범한은 경도로 돌아가 반드시 황태후마마께 황제께서 살아 계시다는 믿음을 드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인 판단을 하는 황태후께서 황제 폐하의 붕어 소식을 듣는 즉시 분명 진씨 가문에게 태자를 보호하도록 하고 그를 등극시켜 조정의 안정을 꽤할 것이다.
황제 폐하는 그분의 아들이었다. 그러니 누구든 황제 폐하를 해치려 든다면 황태후께서는 분명 윤허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사망이 기정사실로 된다면 황족의 최고 연장자인 황태후께서도 전체 황족의 존속과 천하 존망을 위한 고려를 하셔야만 할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안위를 생각해서든, 아니면 경도 국면을 위해서든, 범한은 황제 폐하의 계획이 매우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신은 황제 폐하의 친필 서한과 옥새를 들고 경도로 돌아가 반드시 국면을 안정시키고 후종사(後宗師) 시대에 대응해야 했다.
그렇다. 후종사 시대란 대동산에서의 일로 누가 이기고 지든 분명 한두 명의 대종사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거란 의미였다.
* * *
범한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염려 놓으시지요. 경도에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옵니다.”
황제가 범한을 강렬하게 잠시 바라보았다.
“이번 길은 매우 험난할 것이야.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범한은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은 아까 황제가 말한 ‘짐의 아들 넷’ 발언 때문에 대단히 냉소적이고 자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한데 방금 전 마지막 말 덕분에 마음이 많이 누그러들었다.
허리띠를 단단히 매고 몸에 지닌 장비 확인을 모두 마쳤다. 범한은 신하에서 신속하게 9등급 무공을 지닌 야행자로의 변신을 마쳤다. 그리고 온몸에 있는 기운을 모두 거두어드리고 대동산 봉우리의 경치와 한 몸이 되었다.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건 은빛의 달빛뿐이었다. 달빛은 현 상황과 맞지 않게 그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범한이 품을 더듬어 황제의 옥새와 황태후에게 전할 황제의 친필 서한을 확인했다. 그다지 무거운 물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범한에게는 몹시 무겁게 느껴졌다.
대동산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분명 얼마 후 경도로 전해질 텐데, 그때 경도로 들어갈 소식이 황제 폐하께서 자객에 당한 내용이란 걸 범한은 알고 있어서였다.
지금 장 공주가 원하는 건 완벽한 시간차였다. 이에 그녀는 경도에서 아무런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황제 폐하의 죽음만 확인하면 황태후는 발 뒤에서 비통하게 걸어 나와 세 황자 중에 한 명을 골라 황위를 계승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천제는 끝나지 않았고 하늘의 뜻도 내려오지 않았다. 비록 태자가 곧 폐위될 것이란 사실을 천하가 알고 있다고는 해도 태자는 여전히 태자였다. 그러니 조정의 안정이든, 어떤 이유로든 황태후는 태자를 후계자로 선택할 것이다.
이는 음모가 아니었다. 단지 세력을 빌리는 것이었다. 여건이 성숙되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기세였다.
황제가 경도에 무수히 많은 후임을 남겨 두었다 하더라도, 진평평과 금군이 단 한 사람에게만 충성한다 하더라도, 황제 폐하의 붕어 소식이 천하로 퍼진 후라면 누가 황태후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겠는가? 혹시라도······ 그들이 2차 반역을 꽤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범한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부담에 몸이 짓눌리는 것 같았는데 몸이 많이 가벼워진 것만 같았다. 범한도 알다시피, 지금 그는 경국의 용좌를 등에 지고 있었다.
“그들은 너의 친형제란다.”
황제는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범한 곁에 서서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죽일 수 없다면 죽이지 말거라. 특히 승택이는 말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한다면 모두 죽여버리거라.”
범한은 심장이 떨려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입가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그가 저 멀리 떠 있는 작은 배를 바라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류운 아저씨가 왜 이리 늦게 올꼬? 설마 대종사씩이나 되는데도 짐과 대면하려 하니 여전히 겁이 나서 그런가? 대종사인데도 아직 거들어줄 이가 필요한 건가?”
황제의 말에 범한은 잠시 웃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하늘 위의 밝은 달을 잠시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낮에 짐이 왜 대동산을 천제를 지낼 곳으로 택했는지 말해주었었지.”
황제가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첫째는 당연히 오씨를 산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범한은 황제를 보고 있었다.
황제가 범한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둘째는······ 대동산은 바닷가에 홀로 우뚝 솟은 산이라 죽기 제일 좋은 곳이라 선택했단다. 예운이가 연소을에게 산을 포위하도록 하고, 다시 류운 아저씨에게 부탁해 산으로 올라가 짐을 공격하라고 하면 짐에게는 아예 도망갈 곳이 없으니까.”
대동산은 바닷가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리고 육지로 가는 산 아래의 길은 막다른 길로 되어 있었다. 또한 바다와 접한 면은 옥석처럼 반들반들한 바위 절벽이었다.
대종사라 해도 경공으로 절벽을 타고 위로 올라올 수는 없었다. 이런 곳에서 자객의 공격을 받으면 황제도 날아서 도망갈 수는 없었다.
“짐이 대동산이란 사지를 택한 건 운예를 착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황제가 사고검이 왔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와 원래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범한의 진심을 꿰뚫어 보려는 듯 범한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운예는 대동산에서 나오는 모든 소식을 봉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그 아이가 경도에서 이리 저리 방법을 쓰고 있지만, 잊고 있는 게 있고······. 짐이 이 사지를 선택한 건 당연히 짐 주변에 이 사지에서······ 날아서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란다.”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절묘한 능력을 역시나 황제 폐하께 들켜버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자기 일과 관련해 황제 폐하는 모르는 게 몇 개 없어 보였다.
천하에서 대충 본인만 그 특이한 방법을 쓰고 있고, 거울처럼 매끄러운 대동산을 기어 내려갈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자신을 대동산까지 끌고 온 건, 지금 보니 이곳에 매복을 시켜 놓은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