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670화 (670/1,108)

670화 한밤에 산을 봉쇄한 장궁 (2)

과거 군을 이끌고 남으로 북으로 정벌전쟁을 벌인 황제는 불세출의 혁혁한 전공을 세운 대륙 제일 명장이었다. 한데 근 20년 동안 직접 정벌을 나가지 않은 탓에 만인(蠻人)의 저항에 맞선 북제의 상삼호가 경국 제왕이 세운 영광을 잠식해버린 상태였다.

그러니 오늘 저녁에 대동산 산 아래가 포위되었을 때 황제가 직접 나서서 금군을 지휘했다면 저와 같이 처참히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데······ 달이 뜨고 산이 어둠에 휩싸인 상태에서 산 위에서 아래까지 지휘를 한다는 건 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나게 해치워버릴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명령을 전달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니, 황제의 직접적인 지휘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황제의 낯빛이 살짝 냉랭하고 말투도 살갑지 못했다.

물론 아주 살짝 안 좋은 투로 말한 거라 황제 곁에 있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 황제 폐하가 벌컥 화를 내지도, 주변 사람들의 머리를 잘라버리지도 않는다는 건 그만큼 그가 충분히 냉정한 상태란 뜻이었다.

범한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후 양손의 검지와 약지를 가볍게 맞대고 의식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다. 그러자 온 몸의 패도의 정기가 순식간에 움직이기 시작해 남들과 다른 두 개의 길을 따라 빠르게 순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범한은 자신의 모든 신체적 감각과 의식의 감각을 가장 맑은 경지로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범한의 몸에 큰 기운이 가득 차자 산꼭대기에서 갑자기 뜬금없이 바람이 불고 작은 돌들이 부르르 떨었다.

황제 곁을 지키고 있던 호위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민감한 시기이다 보니 모두들 속속 방어에 나섰다. 한데 늙은 홍 태감 하나만은 여전히 자는 듯 마는 듯한 모습으로 황제 곁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범한이 공손히 아뢰었다.

“황제 폐하, 조금 이상하옵니다. 상대 쪽에서 병사를 물린 것 같사옵니다.”

범한의 말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한참 후 천천히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그가 병사를 얼마를 끌고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산 전체를 봉쇄해 단 한 사람도 내보내려 하지 않고 있구나. 연소을······ 욕심이 과한 놈이었군!”

반란군이 자신들의 기세가 한창일 때 갑자기 퇴각해 금군에게 잠시 숨통을 트여주다니. 범한을 포함한 산 정상에 있는 관원들은 지금 이 상황이 좀 아리송했다. 하나 황제만은 반란군의 의도를 명확히 꿰뚫고 있었다.

반란군이 금군에게 진열을 가다듬을 기회를 준 건, 양측의 교전이 최종적으로 난국이 되는 걸 꺼렸기 때문이다. 몇몇이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 하자 산 아래 반란군이······ 대동산을 빠져나가 주변 고을에 지원군 요청을 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대비에 들어간 것이다.

“불가능하옵니다.”

범한이 말했다. 감찰원의 업무 수행 방법에 따르면 금군에 섞여 있던 6처 검수가 교전 시작과 함께 기회를 엿봐 포위망을 뚫고 나갔어야 한다. 그러니 지금 즈음이면 검수가 이미 겹겹이 둘러쳐진 포위망을 뚫고 나가 동산로 관아로 가 주군 및 가까운 군대에게 긴급 지원 요청을 했을 것이다.

감찰원 6처 검수의 암행 실력이면 산 아래에 1만에 이르는 기마병이 온다 해도, 그들 중 몇몇은 살해당하거나 잡히지 않고 반드시 빠져나올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그림자처럼 보이는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이 만단 등천제에서 휘리릭 날아올랐다. 그자의 경공술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자세가 너무 기이했다. 마치 무릎 관절에는 용수철이라도 달고 있는 것 같았다.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몸이 가볍게 튀어 오르는 게······ 절대 강자의 자세만큼 깔끔하고 오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단히 빠르고 안정적이었다.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이 아직 산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였다. 밤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눈꽃이, 그러니까 눈처럼 새하얀 칼 꽃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황제 주변에 있던 호위들이 놀라 장도를 꺼내 들고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을 벤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달빛마저 압도해 버렸다.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은 공격은커녕, 달랑 영패(令牌) 하나만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영패는 달빛을 맞아 밝게 빛났는데, 그것은 바로 감찰원의 요패였다.

요 태감이 손을 휘익 휘두르자 호위들이 칼을 거둬들였다. 한데 호위들은 몸을 숨길 생각은 않고 회색 옷 입은 사람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리고 한 곳을 향해 십여 자루의 장도를 겨누고 상대를 강하게 압박했다.

범한은 그자가 지금 십여 자루의 장도 사이에 있기는 해도 어떻게든 도망갈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질문할 게 있는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회색 옷을 입은 사람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회색 옷을 입은 자는 감찰원의 양 날개 중 하나이자 범한의 절대 심복인 왕계년이었다. 그는 오늘 이 험준한 산에 큰 변고가 일자, 산 아래에서 감찰원 관원들을 이끌고 방어진을 쳤었다.

한데 그런 이가 지금은 어찌 형용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잔뜩 놀란 모습으로 범한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호위들의 장도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황제와 범한 앞에 다가와 있던 그가 바로 무릎을 꿇고 나지막하게 아뢰었다.

“반란군의 수는 5천입니다. 전원 궁수이고······.”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왕계년이 전해준 소식 덕분에 모두 차분해질 수 있었다. 우선 이 소식을 통해 황제의 판단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급습해 온 반란군은 역시나 연소을의 친위대였다. 연소을 같은 신궁(神弓)만이 자기 친위대에 있는 병사들을 모두 명궁으로 키워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밤에 명궁수 5천명이 습격을 해왔는데, 연소을 대병영의 친위대는 모두 장궁을 사용하는 궁수로 알려져 있으니······. 산 아래에서 금군과 감찰원이 저항하는 데 애를 먹는 건 당연했다.

황제가 앞쪽에 꿇어앉아 있는 왕계년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세는 어떠한가?”

왕계년이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바로 아뢰었다.

“습격을 받았을 때 신은 곧장 산을 타기 시작했사옵니다. 하여 현재 전세가 어떤지는 모르옵니다.”

그러자 황제가 싸늘하게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자신의 불만을 계속해서 표출하지는 않았다. 습격이 시작된 건 불과 얼마 전이었다.

반면 산 위에서 아래까지는 거리가 대단히 멀었다. 령전 경보를 쏘아 올린 걸 제외하면 왕계년은 산꼭대기까지 정보를 전달하러 온 첫 번째 관원이었다.

한데 그의 창백한 낯빛을 보니, 극단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산꼭대기까지 전속력으로 오느라 거의 대부분의 정신력과 내공을 소모한 걸 알 수 있었다.

“장궁을 사용하는 궁수 500명이라······.”

황지가 갑자기 싸늘하게 웃기 시작하며 말을 이어 갔다.

“금군 2천명을 섬멸하려 하다니. 소을에게는 그런 야망과 실력이 없지. 지금 산 아래에서 군을 지휘하고 있는 고수가 누구인지 궁금하군.”

반란군이 산을 봉쇄만 한 채 공격하지 않는 건 정세 상 조금 희한한 일이었다. 이에 범한이 왕계년을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돌파했나요?”

감찰원 관원은 규정대로 행동했다. 그러니 상사가 질문을 하면 부하는 그 질문이 왜 들어왔는지 자연스레 알 수밖에 없었다.

왕계년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6처 17명이 전원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

“확인했어요?”

“확인했습······.”

왕계년이 고개를 숙이고 아뢰었다.

“산허리에 있을 때 봤습니다. 서남 방향과 서북 방향 양쪽으로 안전한 길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고수가 잠복해 있었습니다.”

범한의 동공이 수축했다. 가슴이 아프고 노기와 슬픔이 짙어졌지만 이를 강하게 억눌렀다.

6처는 원래 암흑 속에서 움직이는 이들이다. 그런데 연소을의 친위대에게 자객에게서나 볼 수 있는 습성이 있었을까? 더군다나 밤에 범한의 부하를 전멸시켰다는 건, 그 자객들의 무공 등급이 6처 검수보다 훨씬 높음을 증명하는 대목이었다.

범한이 왕계년을 잠시 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왕계년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로 내젓지도 않았다. 그저 바닥을 짚고 있던 오른손을 살짝 움직일 뿐이었다.

범한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 십삼랑이 아직 안전하다니, 마음이 살짝 놓였다. 범한이 몸을 돌려 황제를 바라보며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차분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 동이성 사람도 와 있사옵니다.”

범한의 말을 듣고도 황제는 무언가 기다리는 사람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요 태감이 돌계단이 있는 쪽에서 돌아와 황제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황제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범한은 이제야 첫 번째 경보 화살이 발사되었을 때 요 태감이 호위 몇 명을 시켜 포위망을 뚫고 소식을 전하게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온 건 포위망 돌파에 실패했다는 보고뿐이었다.

감찰원 6처 검수와 용맹한 호위가 어둠을 틈타 두 차례 돌파를 시도했지만, 결국에는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동이성이 장 공주에게 대체 얼마나 많은 고수를 빌려준 걸까? 설마 천하에서 9등급 고수를 제일 많이 배출해낸 검려에서 오늘 그들을 몽땅 대동산 산 아래로 집합시켰단 말인가?’

‘그렇다면 사고검도 왔을까?’

산꼭대기에서 다시 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저 먼 바다 위의 작은 배는 여전히 먼 듯 가까운 듯한 거리에 있었고, 산 아래에서 들려오는 살육의 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달빛이 숲을 비추어 주고 있었지만, 숲속으로 스며든 암흑까지 몰아내 주지는 못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살의(殺意)가 산 정상에 있는 이들을 노리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가 느닷없이 아까 범한이 공력을 끌어올렸던 때가 생각나 냉담하게 물었다.

“네 무공 실력이 갈수록 좋아지는구나. 그런데 작년에 다쳤던 게 다시 도진 적 있느냐?”

범한은 왜 이 시점에 황제 폐하께서 전혀 관련도 없는 질문을 불쑥 질문을 던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잘 되었구나.”

황제가 차분하게 달빛 아래에 펼쳐져 있는 대지를 주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짐이 그 일을 너에게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구나.”

황제가 노기를 억누른 채 음침하게 소리쳤다.

“꺼지거라!”

그러자 산 정상에 있던 황제와 범한, 늙은 홍 태감, 그리고 어둠 속에 숨어 있는 호위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황제의 명에 따라 사당과 숙소로 꺼져버렸다. 그리고 황제 폐하와 제사 대인이라는 이······ 불쌍한 부자를 위해 자리를 비워주었다.

“짐이 이번에 천제를 올리는 건 원래는 도박이었다. 그러니 제를 올리는 대상도 하늘이고, 도박하는 대상······도 하늘이니라.”

황제의 미간에 살짝 심각한 기색이 스쳤다.

“짐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단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해야 했다. 목숨을 걸고 하늘과 도박을 하는 중이니······ 짐은 이기고 지는 걸 모두 계산해 두었단다. 이긴다면 우리 경국은 더 이상 걱정할 게 없게 되느니라. 3년 이내에 검으로 천하로 겨누고 다시는 그 누구도 감히 짐의 발걸음을 늦추도록 하는 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황제는 패했을 경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냉랭하게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 갔다.

“어쩌면 짐이 계산 하나를 잘못 했을 수도. 오늘 밤 류운 아저씨를 산으로 오도록 유인해도 그 두 사람은 개입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필경 그와 같은 행동은 우리 위대한 경국의 주춧돌을 스스로 쳐버리는 행동이니, 과거라면 그들은 수수방관했겠지.”

범한은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산 아래 반란군 사이에 분명 동이성의 9등급 고수들이 섞여 있을 거라고 감히 확신했다. 하지만 사고검이 직접 왔는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 백치가 왔다한들 또 어쩌겠니? 하나······.”

황제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짐은 뒷일을 생각해 봐야겠구나. 그러니 네가 하산을 하거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