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667화 (667/1,108)

667화 대동산을 비추는 달 (1)

산꼭대기에 있는 황제가 추측하고 있는 것처럼 장 공주 이운예는 일단 살아 있는 이상은 어떻게든 경도에서 숨은 힘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에 그녀는 외부적으로는 황실 별궁에 유폐되어 감찰원의 감시를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정말 의외였던 건, 그녀가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수개월 전에 경도에서 도망간 신양의 모사 원굉도가 지금은 별궁에서 장 공주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황제 폐하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사실 장님도 알 수 있지······. 다만 본궁 입장에서는 그분이 대체 뭘 믿고 그러시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이운예의 용모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여전히 아름답고 다정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섬세한 사람이라면 그녀에게 살짝 마음의 변화가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다정함 이면의 내면 깊은 곳에 새겨진 냉담함 같은 것 말이다.

조용한 황실 별궁 안, 창밖에서는 시위 하나가 순시를 돌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황실의 중점 감시 대상인 장 공주가 지금 측근과 비밀리에 무언가를 획책하는 중인데 말이다.

“그분은 의심이 너무 많으셔서 우리가 뭔가를 설계할 필요가 없어. 그분 자신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설계하실 거거든.”

이운예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말을 이어 갔다.

“더군다나 자신이 잘난 줄 아시지. 상대의 계책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여기실 정도로······. 그런데 그딴 게 다 뭐람! 계획 따위가 어디 있다고 그러시는지 원. 애당초 그분 혼자서 거기에서 놀고 계셨던 거였는데 말이야.”

그녀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말을 이어 갔다.

“단지······ 오라버니께서 적적하실까 봐, 그래서 같이 놀아드리는 것뿐이라고. 대동산에 자객이라······. 황당하게도 이미 기정사실화된 일처럼 되어버렸잖아. 그분도 내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아셔. 내가 죽이러 대들기만 기다리고 계시지. 내가 죽여줄 때만 기다리고 계시니까 내가 아예 그분을 죽여 드리면 정말 재밌을 거야.”

원굉도는 장 공주의 말을 들으며 그녀 입가에 지어진 웃음을 보고 있었다. 장 공주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미소를 보였지만 그는 웃을 수 없었다. 오히려 살짝 오싹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대동산에 덫이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장 공주는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었다. 설마 장 공주는 대종사 섭류운이 온 천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황의가 죽은 후, 원굉도는 이운예의 최측근 모사가 되어 있었다. 장 공주는 최근 2년 동안 황제 폐하와 범한에게 계속 밀리는 중이었고, 그 상황에서 벗어날 묘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원굉도는 그녀가 계략을 세우는 데 자신을 대단히 필요로 하는 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장 공주의 마지막 계획에서 세부 사항이 무엇인지 원굉도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진 원장과 황제 폐하께 관련 내용을 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위장이든 아니면 더 신뢰를 얻기 위해서든, 이런 중요한 때에 그는 모사로서 필요한 건의는 해야 했다. 이에 그가 장 공주의 눈을 바라보며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재미란 건 어떤 때는 황당함과 어리석음의 결합인 건데······. 저는 어느 쪽이 더 황당하고 어느 쪽이 더 어리석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처음부터 움직인 건 황제 폐하이시니 공주마마께서는 응당 다른 길을 고르셔야 할 겁니다. 그리하지 않으시면 뭘 하시든 늘 상대보다 한 걸음 늦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장 공주 이운예가 눈을 감고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길이라고? 내게 잠시 움직이지 말라고 권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장 공주가 갑자기 눈을 뜨고 웃었다.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사악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진무구함 그 자체였다.

“움직이지 않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대동산에서 치르는 천제가 순조롭게 끝난다면······ 모후께도 언젠가는 떠나시는 날이 올 터인데. 설마 자네는 내가 이 별궁에 영원히 갇혀 있기를 바라는 건가?”

그러자 원굉도는 잠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다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신을 쉽게 별궁으로 들어오도록 했으니, 장 공주에게는 이 별궁에서 쉽게 나갈 방법이 분명 여러 가지가 있을 터.

그리고 원굉도도 알다시피 장 공주는 장래 경국의 국면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러모로 살펴봐도 황제 폐하께서 경도를 비우시는 이번을 놓친다면 장 공주에게는 재기하고 싶어도 다시는 기회가 없을 수 있었다.

“범한 말입니다.”

원굉도가 장 공주 설득에 나섰다. 아직 감찰원에서 개선된 지시를 받기 전이라 그는 어떻게든 장 공주의 행동을 최대한 늦추려 했다.

“그가 마마께 온 기회입니다.”

“범한?”

장 공주가 흥미가 돋았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설령 황제 폐하께서 나중에 범한의 권력을 축소하신다 해도 그게 본궁에게 기회일 리는 없어.”

“권력 축소만큼 간단한 선에서 그칠 일이 아니지요.”

원굉도가 소리를 죽여 말을 이어 갔다.

“범한과 북제의 관계가 너무 밀접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일단 조정 내부의 모순을 평정하신 후에는 칼끝을 분명 북제로 겨누실 겁니다. 그리고 그때 범한이 어찌 나올지 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그때가 마마께 찾아온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건가?”

장 공주가 자조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마마께서는 반드시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러자 그녀가 살짝 나태하고 산만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원굉도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탁자 위의 찻잔을 가리켰다. 원굉도가 일어나 그녀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장

공주가 서서히 눈꺼풀을 내리며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원굉도의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원굉도가 황제의 성격이 어떤지 몰라 저리 말했을 거라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장 공주 이운예만 황제 오라버니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만 지금 이 상황이 황제 폐하가 자신에게 준 기회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이 기회를 잡지 않는다면 후일 따위는 거론할 여지가 없었다.

황제는 자신을 죽일 기회가 충분히 많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는 자연히 자신을 이용해 누군가를 유인해 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군산회에 속한 줄곧 조정과 재야에 숨어 있던 사람들, 그리고 모 늙은 괴물 등등을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겨도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지면 황제 폐하는 목표를 이룬 것이니, 그나마 잘된 일이긴 한데······. 여기까지 생각한 장 공주의 입가에 다시 자조적인 웃음이 드리워졌다.

“굉도 형, 살인할 때 맨 마지막에는 무엇과 다투는지 말해볼까?”

장 공주가 미소 지은 얼굴로 그를 자라보며 말했다.

원굉도가 잠시 생각을 해본 후 답했다.

“시간, 기회, 대세입니다.”

“맞았어. 하나 틀린 것이기도 하지.”

장 공주가 서서히 고개를 들며 말을 이어 갔다.

“사실 맨 마지막에 겨루는 건 제일 거칠고, 제일 재미없고, 제일 직접적인 그것들이야. 누구 칼이 더 빠르고, 누가 손을 더 많이 휘둘렀는지를 봐야 하는 거지.”

“용좌 쟁탈전은 사실 강호 파벌들의 영역 쟁탈전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는데······. 황제 폐하께서는 우쭐거리시면서도 의심이 많으시고, 천하를 모두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지. 하지만 잊고 계신 게 하나 있어. 세상의 칼이 몽땅 그분 손에만 있는 건 아니거든. 그러니 전에 내가 한 말을 잊지 말게나. 그 의심 많은 성격 때문에 그분은 의심할 여지 없이 패하실 걸세.”

장 공주는 냉정하게 마지막 말을 내뱉음으로써 이 모든 일에 대한 기조를 정했다.

원굉도가 웃었다. 하지만 속내는 더 이상 장 공주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터라 초조했다. 그런 그가 그럴싸하게 꾸미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태자마마와 2 황자마마 쪽으로는 이미 연락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소식이 오면 바로 착수할 수 있습니다. 문관들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가슴 아픈 내용은 저들 문관들의 심적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데는 제일 효과적일뿐더러······ 더군다나 어떻게 말해도, 저들이 거절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대 말이 참으로 일리가 있군.”

장 공주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감찰원은 시종일관 음지에 있기 때문에 유력한 도구인 거야. 하나 그렇기에 어떤 경우에는 외려 결정적인 힘이 못 되지. 그러니 조정 관료들과 황궁에서의 지지가 있는데 진평평이 무슨 쓸모를 발휘할 수 있겠나?”

그녀가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말을 이어 갔다.

“곧 출산할 첩을 완아가 돌보고 있다던데······ 그 일로 계획을 짜보게.”

* * *

대동산 꼭대기에 있는 사당 문밖에서 범한은 부들방석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자는 키가 그다지 크지 않았고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다. 영원히 평온한 모습으로 있을 것만 같은 맹인은 입을 열기는 했지만, 무언가 말을 하지는 않았다.

황제가 소리 내어 잠시 웃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삼촌과 조카 사이 같은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피해준 것이었다.

범한이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주변에 훔쳐 듣는 이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기뻐 어쩔 줄 모르겠는 표정을 맘껏 드러냈다. 범한이 맹인을 와락 끌어안고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오죽은 여전히 냉랭했다. 한데 그의 냉랭함은 작은 언 공자의 것과는 달랐다. 그의 냉랭함음 자기 보호를 위해서 감정을 숨기고 있다기보다는 외부 요인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내면에 있는 절대적인 고요함을 발현시킨 모습이었다.

한데 범한이 그를 꽉 끌어안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맹인은 범한은 볼 수 없는 머리 뒤쪽에서 입을 살며시 벌리고 평소 볼 수 없었던 따스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데 안타깝게도 범한은 그의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만약 범한이 그의 웃음을 보았다면 분명 변태 같은 행동을 했을 텐데 말이다.

범한의 포옹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죽은 다른 사람과 몸을 맞대고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범한도 그랬다. 다만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기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일단 덥석 부둥켜안고 본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부들방석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조용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범한의 얼굴에 온화함과 기쁨의 기색이 짙어져 갔다. 맹인 아저씨의 상처가 거의 다 나은 걸 확인해서였다. 하지만 막상 무언가 말을 하려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오죽과 헤어진 1년 반 동안 범한은 강남으로 내려와 명씨 가문과 싸웠고, 산골짜기에서 급습을 받았고, 경도에서 며칠 밤에 걸쳐 사람을 죽였고, 이밖에도 셀 수도 없이 많고 험난한 격랑을 맞으며 지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오죽 아저씨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닐 수 있었다. 아저씨에게 그런 일들은 별 것 아닌 일이었다. 명씨 가문이 뭐 하는 놈들인지에 대해 오죽 아저씨는 관심도 안 가질 것이다. 그리고 산골짜기에서 급습을 당했을 때 맞닥뜨린 연이은 위기의 순간에 대해 말한다면 오죽은 범한의 능력이 너무 떨어진다고만 여길 것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기회를 보고 있다가 범한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 곧 아빠가 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