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4화 사당 안에 있는 자 (1)
범한은 좀 얼떨떨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한참 후 대답했다.
“네. 있다고 생각하옵니다.”
“세상에 신묘가 있다고 정말로 믿는다는 것이냐?”
황제가 차분하게 범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곧바로 대답했다.
“네. 믿사옵니다.”
범한은 황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경국이란 땅에서 환생한 몸이었다. 그러니 기적이란 것에 대해 확고히 믿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세계의 범한은 전생의 범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가장 순수한 관념론자였다.
“짐을 따라오너라.”
범한은 지금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신비한 느낌을 잔뜩 풍기고 있는 황제를 따라 산꼭대기 숲 사이에 있는 사당으로 서둘러 향했다. 대동산은 천하에서도 유명한 산이었다.
애당초 이 산은 옥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나중에는 신묘함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이곳에서 신에게 제를 올린 적 있는 사람은 병이 크게 호전되었으며, 그래서 돈 없는 백성 중 셀 수도 없이 많은 이가 이곳에서 병을 고쳤다.
이에 천하 고행자들은 이곳을 성지로 받들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범한의 경우 이런 이야기는 사당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꾸며낸 거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바보 같은 사람들이 심리적인 안정을 얻은 걸 가지고 정말로 치료되었다고 믿은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황제 폐하의 낯빛은 너무나도 진중했다.
그렇다면 설마 경묘가 정말로 하늘의 뜻을 받들 수 있는 건가? 그리고 전설로만 내려오는 허무맹랑한 신묘와 연락을 할 수 있는 걸까?
범한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수많은 의혹을 안고 황제를 따라 그윽한 돌길을 돌아 뒤쪽에 자리 잡은 오래된 사당 앞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산바람이 살살 불고 있었다.
이에 처마 아래에 달린 풍경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마음을 정화해주는 맑은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산 아래에서 들었던 제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산 정상의 사당에는 분명 오랫동안 수리를 한 흔적이 없었다. 그저 이 작고 낡은 사당이 천년 산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티며 폐허로 변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자그마한 사당의 건축 양식과 거무스름하고 소슬한 색상에 범한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경도에서 맨 처음 경묘를 봤을 때처럼 절로 경외감이 들었다.
그때 황제 폐하께서는 경묘 안에 자신은 경묘 밖에 있었는데. 오늘은 황제 폐하를 따라 이런 인간 세계를 벗어난 곳에 와 있다니. 범한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는 이 길을, 어쩌면 대동산 자체를 매우 잘 알고 계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작은 사당 밖에 선 채로 황제가 차분하게 말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내가 말을 꺼냈다고 해서 귀찮다 여기지도 말거라······. 사실 이유는 간단하거든. 옛날에 네 어미와 담주에서 만난 후, 대동산의 경치를 꼭 한번은 보고 싶었지. 그래서 한동안 여기에서 묵었단다.”
황제 폐하가 자신의 마음을 어찌 알아차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방금 전 그 말을 듣는 순간 범한의 마음가짐이 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주변의 오래된 건축물을 다시 돌아보는 황제의 눈빛에는 친근감과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한데 곧이어 나온 황제의 발언에 범한의 홀가분하고 즐거웠던 기분은 이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만승(萬乘)의 존귀한 몸이신 황제 폐하께서 오시면 안 되는 곳이라니.”
황제가 소리 내어 싸늘하게 웃고는 어제 범한이 담주에서 간언한 걸 반복했다.
“요 이틀 동안 네가 무슨 걱정했는지 짐도 알고 있다. 그러면 좀 물어봐야겠다. 네가 지금 경도에 있고, 또 네가 그 여인이라면 어찌했겠느냐?”
범한은 전혀 가식 없이 연달아 “황공하옵니다라.”라고 말한 후 곧장 깊은 사색에 들어갔다. 이는 이미 수없이 많이 생각했던 문제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론은 경국에서 만약 내란이 발생해서 경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지금 별궁에 유폐된 장 공주에게는 방법이 딱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일의 초점은 자리 뺏기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니 어제 황제가 말했던 것처럼 바로 황제를 죽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우선 저라면 감찰원 감시에서 벗어나 제 세력과 연락을 취할 것입니다.”
범한이 살짝 고민하는 듯이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반드시 몇 달 전에 시작해야 하는데, 저는 장 공주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황제가 싸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궁전 하나를 불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것도 비 내리는 새벽에 말이다.”
범한은 고개를 가로로 내젓기만 할 뿐 감히 감정을 너무 많이 드러내 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연락책을 통해 수개월 전에 황궁에서 일어난 변고의 내막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동궁의 발화는 태자가 자신을 구하고 황태후를 놀라게 하려고 저지른 짓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 범한은 형제인 태자의 행동력에 감탄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황제 폐하의 말을 들어보니 그 일에서 수상쩍었던 점이 생각났다.
“짐이 그리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도 누이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더구나.”
황제가 말을 이어 갔다.
“오히려 지나치게 동궁 쪽을 신경 쓰면서 태자에게 도움을 주려 했어. 짐의 누이는 항상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했단다. 그러니 누이가 감찰원 감시를 피해 자기 사람들과 연락을 취한다고 해도 짐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할 게 없구나.”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건, 황제가 누이와 아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그게 아니지!’
황제가 일방적으로 누이와 아들이 배반하도록 몰아세운 건지, 아니면 아직 배신을 당하지 않은 건지를 말한 후, 미세한 성격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 후 어려서부터 떨어져 자란 범한을, 경도로 온 후 유난히 순수한 충성심을 보이며 은근히 효도하고 있는 사생아를 누구보다 가장 신임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임은 범한에게 압박감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범한은 텁텁해진 목을 문지르고 잠시 황제를 바라본 후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만약 수개월 전에 장 공주가 자기 사람에게 연락을 취했다면 오로지 하나의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신의 생각은······ 황제 폐하께서 경도에서 멀리 떠나오셨으니, 지금이 바로 그 최적의 시기이옵니다.”
“누이가 어찌할지만 말하거라. 시도 때도 없이 짐에게 그 점을 일깨워 줄 필요는 없다.”
“알겠사옵니다······. 하여 신의 생각으로는 장 공주마마는 20년 동안 키워온 힘을 모두 쏟아부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동산이나 경도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급습을 하겠지요. 그리고 승패를 떠나 황제 폐하와 관련한 소식을 모두 차단하고 천하에 황제 폐하께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고 멋대로 발표한 후 태자나 2 황자를 보위에 올릴 것입니다.”
“승패를 떠나서라는 헛소리도 하지 말거라. 이왕 하는 거니, 당연히 짐을 죽이려는 것 아니겠느냐.”
범한의 분석은 매우 조잡하면서도 직관적이었다. 하지만 장 공주 이운예가 정말로 쉬이 움직일 수 있다면 그녀는 분명 그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른바 음모란 건 결국에는 생사의 문제, 승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사와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고, 경도에 있는 그녀가 황자들 및 섭씨와 진씨 두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황제 암살 혐의를 범한에게 뒤집어씌운다면······ 그 왕좌에는 누가 앉을 수 있을까? 그것도 진평평이 고작 그 알량한 흑기 500을 이끌고 반격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말이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이곳까지 오셨다면 분명 무슨 계획이 있으신 거로군요.”
황제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천천히 작은 소리로 물었다.
“운예에게 무슨 힘이 있겠느냐? 군산회? 짐이 작년에 진 원장과 네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 염병할 무슨 회 따위를 깔끔하게 해치워버렸어야 했어.”
“군산회는 느슨한 조직일 뿐입니다.”
범한이 장인어른의 추론을 다시 한 차례 반복해서 아뢰었다.
“관건은 장 공주가 어떤 힘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지 입니다.”
“대동산은 바닷가 외딴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에 경국 안에 있기는 하나 대군을 동원해 공격할 수는 없지.”
황제가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등천제를 올라와 감히 짐을 찌를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우선 산부터 잘 타고 봐야 할 게다.”
범한이 황제의 뜻을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대동산은 대군을 동원해 공격하기 힘들도록 지리적으로 매우 묘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담주와 이어져 있는데, 그곳은 높은 산과 절벽이어서 군대가 공격해 올 마지막 가능성까지 막아주고 있었다.
이왕 이런 지리적인 이점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면 일국의 제왕이자 천하제일 강국의 군주를 암살하려면 자객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평범한 실력자를 동원해 봤자 아무런 의의가 없었다.
맨 바깥쪽을 수비하고 있는 금군도 뚫고 들어오지 못할 텐데, 어찌 산봉우리 꼭대기에 있는 호위라는 가공할 만한 고수 백여 명에게 대적할 수 있을까.
그리고 분명 나쁜 의도를 가지고 오는 사람일 테니, 장 공주가 정말로 황제의 마차로 자객을 보낼 생각이라면 자객의 수준은 충분히 알 만했다.
“군산회에서 섭류운을 떠받들고 있습니다.”
범한이 잠시 침묵한 후 말을 이어 갔다.
“장 공주마마께는 고수가 별로 없지요. 하오나 신이 산골짜기에서 습격을 당하고 보니 조정의 일부 사람들이 갈수록 방자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사옵니다. 하온데 방자한 사람이 어떤 일을 저지른다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옵니다.”
이는 당연히 경국 내부에 있는 군측 원로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집단적으로 황제와 대척점에 선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그러자 황제는 범한의 말을 받아주지 않고 다음과 같이 차분하게만 말할 뿐이었다.
“짐이 이번이 직접 대동산까지 왕림한다고 했을 때 너 말고도 두 대학사가 극렬히 반대했었다. 하나 짐은 와야만 했다······. 왜냐하면 첫째로, 황궁 안에서만 너무 오래 지냈더니 이제는 좀 나와서 돌아다니고 싶었단다. 옛날에 거닐었던 곳에도 좀 가보고 말이다. 둘째로, 승건이가 짐의 마음을 아프게 해 그 아이를 태자 자리에서 폐위할 생각이었다. 하나 다른 이가 일언반구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광명정대하게 폐위하고 싶구나.”
범한은 자기 옆에 계신 황제 폐하가 어쩌면 유사 이래로 가장 근면하면서도 또 제일 괴상한 황제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황제로 등극한 후, 특히 큰 전쟁을 마친 후로는 경도 밖으로 전혀 나가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성세(盛世)의 군왕이라면 관례처럼 실시하는 전국 유람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황궁 밖으로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범한도 태평 별궁 밖에서 딱 한 번 봤을 뿐이니까 말이다.
황제가 갑자기 머뭇거리다가 미소를 지었다.
“세 번째 이유는 간단하단다. 짐은 운예에게 일부러라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 군산회라는 게······ 정말로 짐을 제왕의 자리에서 제거하려 하는지 보기 위해서 말이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신이 말해드린 그대로인데, 어찌하여 모험을 감행하시는 것이옵니까? 무엇하러 이곳에 오셨느냔 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천하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니 지시만 내리신다면 군산회의 잔존 세력들은 즉각 붕괴되고 와해될 것이며, 다시는 거론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것이냐? 하나 섭류운은?”
황제가 매우 옅게 웃으며 미간을 점점 편하게 폈다.
범한은 할 말을 잃었다. 이제야 황제 폐하께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게 되어서였다.
‘애당초 스스로를 미끼로 쓰고 계셨다니. 그렇다면 음모를 꾸미는 쪽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군산회가 받들어 모시는 섭류운이란 뜻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