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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63화 (663/1,108)

663화 높은 산 위의 흰 구름

황제 폐하의 순시는 정말로 무시 못 할 큰일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바다 위를 떠돌며 감찰원 정보망과 연락을 끊어버렸다고 해도······ 경도에서 감찰원 업무를 보고 있는 언빙운에게는 분명 알려줄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계년조의 일부 내부 노선은 연락이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언빙운은 사전에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은 걸까?

범한이 왕계년을 불러 몇 가지를 물었다. 한데 감찰원에서 평소 들을 수 있는 대답만 돌아와 참다못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른 말 않고 자조적으로 웃기만 했다. 자신이 병적으로 너무 의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황제의 마차는 육로를 이용했다. 그래서 며칠을 가야 옥석을 반으로 뚝 잘라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세워 놓은 것 같은 대동산을 볼 수 있었다. 그런 대동산은 바닷가에서 만고불변의 바닷바람과 동쪽 일출을 홀로 외롭게 맞고 있었다.

황제가 탄 마차 옆에서 말을 몰고 가고 있던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이마에 손을 얹어 해를 가렸다. 그리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거대하게 솟은 대동산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내질렀다. 바다를 끼고 오면서 본 것까지 합하면 이번이 세 번째였다. 한데 볼 때마다 천지간의 조화가 너무나도 기묘해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가슴이 탁 트이는 장관이지 않은가! 한데 너무나도 감탄을 한 나머지 범한은 살짝 아쉽고 또 화가 났다. 담주에서 16년이나 살았는데,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런 인간계 성지(聖地)가 있을 줄이야. 범한은 이런 곳의 존재를 진즉에 알았다면 오죽 아저씨와 함께 자주 놀러왔을 거라 생각했다.

조정은 대동산의 옥석 채굴을 막아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곳 사당에 찾아가 신에게 기도드리는 백성들까지 엄격히 막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 옛날에는 범한이 자주 놀라왔다 해도 막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한데 지금 그가 여전히 그때와 같은 아이였다면 오늘은 대동산에 들어가려 해도 쉬이 들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산 아래에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수천 명의 사람이 열을 이루고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대동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모두 막혀 있었다.

사흘 전에 도착한 성지 때문에 대동산 사당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수도사들은 이미 산 입구로 나와 공손히 황제의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 향을 사르려는 백성들은 주군이 일찌감치 산 아래로 내려 보낸 상태였다.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산에는 수천에 이르는 사람이 와 있었다. 한데 사방을 짓누르는 삼엄한 분위기 때문에 모두들 조용하고 차분하게 있었다. 이는 모두 그 한 사람, 즉 천하의 제일인자를 위해서였다.

요 태감이 나무로 된 바닥을 밟았다. 그러자 거대한 마차 안에서 주변을 압도하는 밝은 황색으로 차려입은 황제가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와 마차 앞쪽에 놓인 대에 올라섰다.

그러자 누가 지휘를 한 것도 아닌데 산 아래 있던 수천의 사람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목청껏 만세를 외쳤다.

황제는 차분한 표정으로 모두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란 의미로 손을 흔들고는 요 태감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완전히 내려왔다. 요 태감의 손을 놓은 황제는 바로 뒷짐을 지고 개보수를 마친 반짝이는 백옥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이든 홍 태감이 황제의 뒤를 따랐다.

범한도 몇 걸음 떨어진 뒤쪽에서 따라가며 차분하게 주변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산으로 들어가는 문에 다다르자 도포를 입은 몇몇 제사(祭祀)들이 황제를 향해 공손히 예를 차려 재차 인사를 했다. 그런 후 무척이나 아첨하듯 몸을 굽히고는 황제에게 산에 올라 하늘의 뜻을 들으시라며 청했다.

이 광경을 통해 경국의 수도자가 북제의 그들보다 지위가 떨어진다는 걸 확인한 범한은 속으로 웃기 시작했다.

황제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우선 대동산 입구에 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을 바라보며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맨 처음 명은 한 달 전에 보냈었고, 그때 짐이 말한 도착일은 3일 전이었지. 그런데 사당 쪽에서 매우 빨리 움직인 것 같구나. 하나 백성들의 삶에 너무 폐를 끼쳐서는 안 되겠지.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 문을 이리도 화려하게 꾸미다니. 동산로에 은전이 없을까 우려스럽구나.”

몇몇 제사들의 얼굴에서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때 대동산 사당의 제사 주관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해명했다.

“황제 폐하,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 문만 그럴 뿐이옵니다. 꼭대기에 있는 사당은 여전히 20여 년 전과 비교해 전혀 변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러자 황제가 살며시 웃음을 내지었다.

“그럼, 그래야지.”

그러자 급히 황제의 마차를 호위하러 온 동산로 총독 대인 하영지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내가 아첨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군. 황제 폐하께서 이어서 말씀하실 때 다행히 음성이 부드러웠어.’

황제가 총독 대인을 쓱 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짐이 서한에서 그대는 오지 말라 언급하지 않았던가?”

하영지 총독은 7로 총독 중 하나였다. 설청보다 지위가 약간 낮기는 했지만 그래도 1품 대신이었다. 그런데도 황제 앞에서 대인다운 풍모는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씁쓸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황제 폐하께서 어렵사리 경도 밖으로 나오셨고, 동산로까지 오셨으니 신과 이 지역 관원들에게는 영광된 일이옵니다. 그러니 어찌 마중 나와 모시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7로의 총독들은 모두 황제가 가장 믿는 최측근 신하들이었다. 이에 황제가 웃으며 꾸짖었다.

“그대의 부임지인 낙주(濼州)로 썩 꺼지게나. 총독은 관할지의 관군을 이끄는 자리니 맡은 일이나 잘 하고 말일세. 언제 짐 곁에 시중드는 이가 모자란 적이 있었다고 이러는지 원······.”

황제가 뒤쪽에 있는 범한을 쓱 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범 제사가 따라오고 있으니, 그대는 그만 돌아가게.”

허영지는 감히 황제의 명에 반대할 수 없었다. 그는 황제 폐하께서 온화한 표정으로 말씀하시기는 했어도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허영지는 다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 황제께 작별 인사를 올렸다. 그런 후 고개를 끄덕여 범한에게 인사를 한 후 서둘러 사람들을 데리고 총독관저 겸 관아가 있는 낙주로 돌아갔다.

그동안 범한은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 *

대동산은 매우 높이 솟아 있었다. 범한이 알고 있는 단위로 따져본다면 적어도 2천 킬로미터는 되었다. 더군다나 주변이 바다와 평원으로만 이루어져 있어 산은 하늘을 뚫고 들어갈 기세로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러니 이런 곳을 올라야 한다면 누구든 오싹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한데 다행히 대동산에서 바다와 면한 쪽은 매끈한 옥석 같은 절벽인 반면 육지를 향하고 있는 쪽은 억만년에 걸쳐 쌓인 흙이 생명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돌계단 양쪽으로는 푸른 풀이 무성히 나 있었고,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나뭇가지에 돋아 난 푸르른 작은 부채들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여름날의 햇볕을 막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산바람에 맞추어 가볍게 춤을 추며, 무수히 많은 작은 부채가 되어 나무 아래를 거니는 행인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그러니 이리 푸르고 아름다운 경관이 있기에 그 많은 백성이 산꼭대기까지 향을 사르러 갈 용기가 났을 것이고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돌계단을 끝까지 올랐을 것이다.

수천에 이르는 금군이 대동산 아래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황제를 따라 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리는 이는 늙은 홍 태감, 범한, 예부상서 등을 포함한 일부 대신, 그리고 수발을 드는 수명의 태감과 내관이었다.

물론 백 여 명의 호위도 황제 주변으로 흩어져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한데 그들은 돌계단이 아니라 훨씬 힘든 산속 오솔길을 이용해 산을 올라야 했다.

만단(萬段)의 돌계단은 사람의 의지력과 체력을 시험하기에 충분했다. 이에 백성들은 이 길게 이어진 돌계단을 등천제(登天梯: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끝까지 올라가야 진심이 증명 되어 대동산 사당에서 모시고 있는 신이 병을 고쳐준다고 여겼다.

하지만 오늘 산에 오르는 이들은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온 일반 백성이 아니었다. 일단 바위 사이를 오가는 호위들은 그런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태감과 내관들에게도 아직 돌계단을 오를 여력이 충분한 것 같았다. 하지만 예부 상서와 임소안 같은 문신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에 황제 폐하 앞에서 체면 깎이는 건 생각도 않고 허리를 손으로 짚고 가쁘게 숨을 헐떡였다.

범한은 어려서부터 산을 타고 절벽을 오르내렸던 터였다. 그러니 만단의 돌계단을 오르는 정도는 식은 죽 먹기여서 숨을 전혀 헐떡이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에게는 주변 사람들을 살펴볼 여유가 있었다. 그러다 황제 옆에 있는 태감들이 무거운 걸 들고도 몸놀림이 가뿐한 걸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늙은 홍 태감은 원래 괴물이었고, 요 태감이 무공을 익혔다는 걸 범한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찻잔을 들고 물을 따르는 내관들까지도 모두 고수란 얘기였다. 이에 범한은 황제 주변에는 과연 와호장룡(은둔 고수)이 많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무렵, 일행은 드디어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몇몇 제사와 문신들은 힘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황제는 그런 저들을 비웃듯이 잠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꾸짖는 게 귀찮아 뒷짐을 지고 혼자 대동산 정상의 절벽가로 걸어가 그 앞에 깔린 구름과 사선 방향 위쪽에서 떠오르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하고 즐거워 보였다. 드디어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어쩌면 이제 곧 목표 달성을 앞둔 사람처럼 보였다.

범한이 황제 뒤로 따라와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황제의 가슴은 살짝 들썩이고,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땀에 젖어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옥체 강건하시기는 하나, 그래도 옛날에 말을 타고 정복 전쟁을 벌였던 때만큼 젊은 건 아니셨다.

‘그런데도 천자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참고 계시다니.’

짧은 휴식을 마친 수행원들은 바로 의식 준비와 까다로운 잠자리 및 음식 준비에 나섰다. 한편 황제와 범한은 절벽가에 서 있었다. 이들은 단 한마디도 않고 넋을 잃은 사람처럼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부자의 모습은 대동산 아래로 펼쳐진 기묘한 경관에 매료된 것처럼 보였다.

그들 눈앞에 있는 건 바다였다. 그것도 끝없이 펼쳐진 바다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는 바다는 담주 부두에서 본 넓은 바다와는 달랐다.

담주에서 본 바다는 친근하지만 가까이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잔잔한 듯하다가도 파도가 일었고, 발아래에서 파도치는 소리를 들려주고는 이내 흰 포말을 내며 바지를 적셨다.

한데 대동산 아래로 펼쳐진 바다는 멀기도 하거니와 냉담했다. 절벽가에 서서 보는 것이다 보니, 파도가 포효하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옥처럼 매끄러운 절벽으로 시선을 돌리자 바다 위에 만들어진 새하얀 띠가 계속해서 밀려오며 바위 절벽을 때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동산 암석 절벽은 젖게 만들려는 노력은 영원히 헛수고가 될 것만 같았다.

절벽 앞에는 새하얀 종이 같은 얇은 구름이 켜켜이 깔려 있었고 절벽 사이사이를 천천히 오가고 있었다. 바다 위에는 붉은 해가 일찌감치 떠 있었지만, 대동산보다 낮은 곳에 있는 듯했다.

산 위에 서서 태양을 바라보니 유난히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았다. 햇빛이 새하얀 구름을 뚫고 곡선을 그리며 펼쳐졌다. 그러자 새하얀 구름이 점점 옅어지며 하늘에서 거의 사라져갔다.

‘구름이 흩어지고, 바닷물이 들고 나는 것을 보러 왔던가?’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코를 문질렀다. 그리고 자조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는 거지? 왜 황제 폐하 곁에 서 있는 거냐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범한에게 몸을 비틀거리는 황제가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란 범한이 전광석화처럼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갈대처럼 생긴 손가락을 살짝 굽히고 힘을 주어 순식간에 대벽관 잔재주 기술을 시전해 황제의 손을 잡아챈 후 뒤쪽으로 한 걸음 정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발아래는 깎아지를 듯한 높은 절벽이었다.

‘이런 곳에서 떨어지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범한은 순간 가슴이 오싹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실례를 저질렀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곧장 죄송하다고 했다. 그리고 늙은 홍 태감이 잠시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봤다는 걸 알게 되었다.

황제가 손으로 가볍게 이마를 문질렀다. 당연히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조적으로 반응하기는 했다.

“짐이 늙기는 늙었나 보군. 오래 보고 있었다고 현기증이 오다니.”

말을 마친 황제가 갑자기 손을 놓고는 미소 지은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세상에 정말로 신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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