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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62화 (662/1,108)

662화 절벽에서 피어나는 물보라

“그녀는 조정 관원들을 감독할 필요가 있다고 했어. 좋은 생각이었지. 그때 태자였던 짐이 곧장 부황께 감찰원 건립을 주청했단다. 네 어미는 환관을 불쌍히 여기면서도 싫어했단다. 그래서 짐은 개국 이래 지켜져 왔던 규칙을 엄격히 지켰고, 환관이 정무에 간섭하는 걸 엄히 금했다. 아울러 궁정의 태상사를 시켜 환관의 수를 정하도록 했고, 황궁 내에 불필요한 환관 수가 늘어나지 않도록 했지.”

범한이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경국 황궁 내 내관의 숫자가 북제보다 훨씬 적은 건 누가 뭐래도 어질고 바른 정치를 하고 있는 거였다.

“그녀가 명군이라면 간언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더구나. 그도 좋은 생각이었지. 이에 짐은 도찰원 어사에게 풍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황제의 말소리는 점점 빨라졌고, 그는 점점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한데 범한은 참다못해 입안의 부드러운 살점을 꽉 깨물어야 했다. 황궁 안에서 곤장을 맞아 엉덩이에 삼겹살 무늬가 생긴 어사들의 모습이 생각나······ 웃음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개혁을 해서 폐단을 근본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단다. 좋은 생각이었어. 그래서 짐은 그녀의 말에 따라 연호와 제도를 바꾸고 신정을 시작했지······.”

드디어 참다못한 범한이 씁쓸하게 웃기 시작했다.

경력 원년은 이미 제3차 신정에 돌입한 때였다. 이에 군부로 바뀐 병부가 오늘날의 추밀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태학에서는 동문각이 분리되었다.

이는 훗날 교육원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예부터 지금까지 존재해 온 6부는 지금의 황제 폐하 때문에 몽땅 이름이 바뀔 뻔했었다.

경국 황제는 평생 휘황찬란한 공적을 쌓았다. 하지만 연이은 세 차례의 신정은 그의 일생에서 피하기 힘든 가장 황당한 일이었다.

이에 지금까지도 경도 백성들은 이들 관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정확히 아는 게 없었다. 그리고 매번 어딘가를 가야 했고, 왕왕 여러 번 이름을 등록해야 했다.

그러니 이렇게나 혼란스러운 신정을 펼치는 동안 만약 강력한 황권과 경국 관리의 강력한 집행력이 없었다면 경국 조정은 맨 처음 모습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조화롭지 않은 이름만 남아······ 경국은 일찌감치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황제가 범한의 표정을 보고 자조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너도 아닌 척은 말거라. 짐의 인생에서 몇 차례 안 되는 바보짓인 거 다 알고 있으니······. 다만 그때 네 어미는 이미 죽고 없었단다. 하여 짐은 대강만 알고 있던 터라 실수를 할 수밖에 없었지.”

범한은 심장이 살짝 떨려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황제 폐하께서 그녀의 말에 따라 행동하셨다니. 그렇다면 그러한 마음을 놓고 본다면 황제는 이 일과 관련해서는 그나마 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했다.

“네 어미가 죽기 전에 짐은 그녀의 말을 많이 들어주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는 없었지······.”

황제가 눈을 감은 채 자그마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그녀가 죽은 후 짐은 그녀가 짐에게 해주었던 말들을 모두 마음에 새겼다. 그녀 대신 실현해 주기 위해서 말이다. 일종의······ 그녀와의 약속이자 양심의 가책이라 할 수 있겠지.”

범한이 탄식을 했다.

“제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황제 폐하의 은혜에 무한히 탄복했을 것이옵니다.”

“아니다. 은혜가 아니란다.”

황제가 눈을 뜨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단순한 인정과 의리 때문에 한 일이다. 그러니 탄복까지 할 필요는 없단다. 짐은 하늘로 간 그녀의 혼을 기리는 제를 지내고 싶었을 뿐이지, 다른 건 바라지 않는단다.”

황제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녀가 신문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런데 아주 안타까운 어투로 말하더구나. 볼만한 뒷소문도 없고, 화려하게 장식된 신문도 없다면서······ 그래서 짐이 궁정 담당자에게 일러 신문을 만들라 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그림까지 그려 넣어가며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짐은 그때 정말 터무니없이 소란을 떤 거였어.”

범한은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궁정에서 발행하는 신문은 경국에서 최고의 무용지물로 꼽히는 물건이었다. 한데 대학사이자 대서예가인 반령 선생의 친필로 제목을 쓰고 각로, 각주, 각현으로 보내 관아와 권세가 귀족에게 그것을 보관하도록 했다. 이것을 시장에 내놓으면 신문 한 장에 적지 않은 은전을 받고 팔 수 있었다.

범한은 담주에서 지낼 때 집 안에 있던 신문을 가지고 은전을 벌어들인 적이 있었다. 이에 신문이란 것에 대해 범한은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때의 범한은 이 ‘신문’에 나온 뒷이야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신문 가장자리에 그려진 화려한 무늬에나 궁금증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 궁금증에 관한 답이 뜻밖이었다.

‘어머니께서 이상한 소문과 뒷말이 담긴 신문을 읽고 싶어서, 유명인사와 관련한 이야기가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다니!’

범한은 이상한 낯빛으로 황제를 바라보고 있다가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오려 해 억지로 막았다. 그는 황제 폐하께 ‘화려하게 장식된 신문’이란 게 신문 위에 그려 넣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원래는 유명인의 사생활을 뜻한다고 말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는 범한의 안색 변화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점점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네 어머니는 진평평의 이야기를 제일 궁금해 하더구나. 그래서 경력 4년 때 짐이 그 노구(老狗)가 고향에 가족을 만나러 갔을 때를 틈타 궁정에 그 내용을 신문에 실으라고 했단다. 만약 네 어미가 보았다면 분명 즐거워했을 텐데.”

범한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도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경력 4년 봄, 담주에서 경도로 올 때였다. 그때 경도에서 벌어진 최대 사건 두 가지 중 하나가 재상 임약보의 숨겨둔 딸이 드러고 그녀가 범씨 가문과 정혼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사건은 궁정에서 감찰원의 위엄에도 굴하지 않고 감찰원 원장 진평평의 어린 시절 풋풋한 일화를 글로 써서 폭로한 것이었다.

바다 위에 있던 해가 점점 더 높이 올라 앞쪽에서 뒤쪽으로 자리를 옮겨 갔다. 그러자 황제와 범한의 그림자도 일렁이는 해면 위로 올라갔고, 맞장구를 쳐준 바닷물 때문에 그림자는 살짝 홀쭉하게 야위었다. 그런 후 두 사람의 모호한 그림자는 점차 차분함을 되찾아 가기라도 하는 듯 갈수록 명확해졌다.

범한이 웃음을 머금은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결국은 평범한 사람이셨군. 내가 경묘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것처럼 담주를 잊지 못하고 계셔. 아마 평생을 통틀어 황제 폐하께서는 담주 부두에나 와야 이리 많은 걸 이야기해주실 거야.’

이번 대화가 군신간의 대화가 아니어서 그런지 범한은 황제에게 제법 호감이 생기고 더 깊이 있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동시에 더 많은 번뇌를 갖게 되었다.

범한이 탄식을 하고는 눈빛을 바다 위로 던졌다. 마음속에 있는 번뇌는 결국 언젠가는 찾아올 일이었다. 범한은 눈앞의 번뇌가 두려웠다.

“무얼 걱정하는 게냐?”

기분이 비교적 홀가분해진 황제가 편하게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한참을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교주 수군 제독이······ 진씨 가문의 자제이옵니다.”

황제는 정식으로 순시를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의장을 갖추고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제아무리 경국 황제가 소박하다고는 해도 방위 역량에 있어 조정은 많은 힘을 써야 했다.

그래서 육로(陸路)의 주군 외에 금군도 있었다. 그리고 그밖에 한 무리의 고수들과 홍 태감이라는 늙은 괴물까지 합세했으니 그야말로 강철 보루였다.

그리고 수로에서는 교주 수군의 전투선 몇 척이 명령을 받고 도착해 해안을 통해 닥칠 수도 있는 위험에 대비하고 있었다. 범한은 조금 전 말을 할 때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바다 위에 떠있는 황제 폐하를 호위하기 위해 온 선박을 주시했었다.

한데 황제는 차분하니 동요가 없었다. 그리고 범한의 경고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는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이 언젠가는 너를 위해 산골짜기 습격 사건을 해결해 주겠다. 하나 진 노장군은 나라의 숫돌과 같은 사람이니 절대 의심하지 말거라. 네가 흑기까지 불러들였으니 100리 안에서 급습이 일어나리란 걱정은 말고. 어찌하여 하루 종일 상갓집 개처럼 불안해하는 게냐.”

그 순간 범한에게 황제 폐하의 아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신분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군을 이끄는 명장’이었다. 이에 범한은 웃으며 명을 받아들이고는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 * *

다음날, 날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하자 일행은 담주항을 떠났다. 이는 황제의 마차 행렬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기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 행차에서는 격식을 갖춘 의장이 꾸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뒤 3리에 걸쳐 대열 안쪽으로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그들은 중앙에 있는 귀해 보이는 대형 마차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야말로 놀랍도록 어마어마한 위세였다.

담주성의 백성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떠나가는 황제 폐하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바닥에 조아렸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황제 폐하를 볼 기회일 수도 있었다. 이에 모두들 경국의 백성으로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범한도 말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대열 뒤쪽에서 따라가면서 저 멀리 길 위를 지나가고 있는 앞쪽의 대열을 우울한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곧 대동산 사당에서 황제를 모시고 천제를 올려야 하는 그의 마음은 불안과 망연함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이었다.

어젯밤 그는 임소안과 사적으로 만났었다. 그리고 그때 황제 폐하께서 대동산에서 천제를 올리기로 결정하신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유로운 공기, 과거의 만남, 담주의 바닷바람이 그리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애당초 경도 경묘에서 천제를 지내면 처리하기 힘든 곤란한 일이 많이 발생할 것 같아서였다.

대체 그 곤란한 일이란 게 뭘까? 그건 바로 경도 경묘에 천제를 이끌만한 자격을 지닌 이가 없다는 거였다.

정말로 황당한 이유였다. 경국은 줄곧 칼과 병사 같은 무력을 신봉해 왔다. 귀신이니 신이니 하는 거에 대해서는 경외하는 태도를 견지해 왔다.

특히나 현 황제 폐하에게 받은 영향 때문에 신묘와 관련한 고행자들의 영향력은 날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이에 북제 고하를 위시한 정통 천일도 일파는 더더욱 경국의 사당 체계에 진입할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요 몇 년 동안 얼마 남지 않은 덕망 높은 고위 제사들에게 계속해서 문제가 생겼다. 우선 대제사는 남쪽에서 도를 전하고 경도로 돌아온 후 한 달이 안 되어 사망했다. 늙고 몸이 쇠약해진 탓에 풍질(風疾)이란 병에 걸려서였다.

그리고 2 제사인 삼석대사도 경도 외곽의 숲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범한은 경묘 대제사가 죽은 게 황제 폐하께서 암암리에 손을 쓰셨기 때문이란 걸 은연중에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래야만 천제를 지낼 때 대동산에 있는 경묘에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동산 경묘는 인간 세상에서 신묘와 가장 닮은 곳, 가장 신묘한 곳으로 불리며 천하에서 가장 성대하게 향을 피우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고작 그런 황당한 이유 때문이라고?’

범한은 말에 올라탄 채 이맛살을 찌푸리고 행렬을 뒤따르고 있었다. 황제가 탄 마차에 대한 호위는 일사분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굳이 범한이 나서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특히나 금군 사이에 들어가 있는 장도로 무장한 백 명 이상의 호위 때문에라도 범한은 마음을 더 놓을 수 있었다.

‘호위 일곱이 해당타타와 맞먹었으니, 호위가 백 명이면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범한은 마음을 놓아야 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범한은 음모와 계략에 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사정은 개인만 알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이 이리저리 재는 데에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경도와 북제에서 백전백승일 수 있었던 건 언빙운이 돕고, 진평평이 돌봐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일 힘센 뒷배로 황제 폐하가 계신 덕분이었다. 산이 와서 떡하니 가로막아도 그걸 치워줄 수 있는 이가 뒷배로 있는데 범한에게 거칠 게 무엇이 있었을까!

하지만 만약 음모의 당사자가 겨누고 있는 게 자신의 뒷배라면?

범한은 자신에게는 그런 엄청난 상황에 맞설만한 충분한 지혜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범한은 자신을 명확히 알고 있기에 유난히 좀 예민해져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부터 계속 마음속을 떠도는 질문이 생각나 더욱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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