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5화 황당한 일
범한은 화원에서 강남 총독 관저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다. 그는 마치 철학가라도 되는 양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범한 뒤에는 호위 몇몇이 따르고 있었고, 길 양쪽에서는 감찰원의 여러 밀정이 어둠 속에서 범한을 보호하고 있었다.
“작은 범 대인.”
“작은 공작 어르신.”
“흠차 대인.”
“제사 대인.”
열정, 아첨, 두려움이 담긴 말들이 주변에서 울리기 시작해 범한이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이미 강남 총독 관저로 와 있었다. 강남에 있는 관원들이 두 줄로 서서 ‘애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따스했다. 그리고 모두들 범한의 도착 시간에 맞추어 갑자기 불량 건초를 먹은 준마라도 된 것처럼 큰 소리로 알랑방귀를 뀌어대고 있었다.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이러한 동작이 관리로서의 위엄을 손상시킨다는 걸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자조적으로 웃으며 앞서 머릿속을 맴돌던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전부 지워버렸다.
그렇다. 인생에는 확실히 목표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한데 범한은 이제 와서 어쩌면 인생을 너무 일찍 시작한 건 아닐까 의심을 시작했었다. 뉴턴은 노년에야 진정한 신자가 되었고, 아인슈타인은 인생의 후반기에 대통일장이론 때문에 이를 갈아야 했다. 하지만 그건 이 두 위인이 과거의 화려한 자신을 걷어내고 본래의 소박한 자신으로 되돌아간 거였다. 그러니 자신이 대체 뭐라고!
자신도 결국에는 보통 사람 아니던가. 그러니 그동안 허영, 권력, 금전, 명성이 주는 이득을 누려왔음을 범한은 인정해야 했다.
범한은 관리들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고 총독 관저 내 서재로 걸어 들어가며 생각했다.
‘나와 섭경미는 달라. 그러니 몸에 이상주의의 광배 같은 걸 달고 다닐 필요는 없어.’
이 세계에서, 아니, 모든 세계에서 이상주의자는 모두 고독하고 적막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쉽게 비명횡사했다. 범한은 고독하고 적막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권력을 쥔 신하 노릇이나 제대로 하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청의 서재에서 고개를 숙이고 설청과 한동안 대화를 나눈 후, 범한은 또 속으로 조소를 날리며 생각에 빠져버렸다.
‘권력을 쥔 신하란 게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가? 그건 황제 폐하께서 윤허를 해주셔야 가능한 거야. 하지만 황제가 혼미하고 무능하면 거대 권력을 쥔 한 명의 신하에게 속아 실권을 할 수는 있지. 하지만 경국 황제 같은 인물이 나에게 그런 기회를 주실까? 그리고 실제로는 삼십 년 넘게 산 내가 마냥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럽게만 굴 수 있을까?’
범한이 허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팔걸이의자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설청을 바라보며 속으로 두어 마디 욕을 내지른 후 입을 뗐다.
“장부 조사에는 호부를 동원하면 그만입니다. 황실 금고는 줄곧 감찰원 관리 하에 있었는데······ 왜 갑자기 도찰원 사람을 끌어와야 하는 것입니까? 몇 달 전, 그 어사들은 모두 하옥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도찰원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장부 조사를 하러 나올 수 있을까요? 설령 인원수가 충분하다 해도, 경서나 달달 외우는 것밖에 못하는 놈들입니다. 그런 놈들이 장부 숫자를 보면 어지러워서 기절이나 할 겁니다. 설 대인, 그러니 이번 일은 대인께서 상주문을 올리심이······. 강남은 멀쩡히 잘 굴러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야말로 후회하게 되실 것입니다.”
설청이 겉으로 웃어 보이며 속으로 욕을 했다.
‘호부는 네 아버지가 연 것이고, 감찰원은 네가 관리하고 있고, 황실 금고는 네가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아 있는데 조사는 무슨 조사란 말이냐? 경도 쪽에서는 그 일에 대해 일찌감치 의견을 내놓았고, 이번에 문하중서에서 새로 나온 의견도 네 녀석이 황실 금고 물건을 훔쳐다가 팔아치울까 걱정하여 그런 것 아니더냐!’
그런데 강남에서 1년 반 동안 지내는 동안 범한은 설청과 합이 꽤 잘 맞았고, 이미 두 사람은 굳이 서로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의견의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설청은 범한에게서 얼마나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대놓고 말을 못 해서, 잠시 생각을 해본 후 입을 뗐다.
“사람이 와서 조사를 해도 되지. 하나 자네와 도찰원은 서로 원한 관계에 있으니, 그들에게 조사를 맡기면 그들이 공적인 일로 사적인 앙갚음에 나설지 누가 알겠는가?”
이런 내용은 이러한 고관들끼리만 사적으로 나눌 수 있는 말이다.
“다시 저지하지는 못한답니까? 서무 그 영감님과 호 대학사는 그렇게나 할 일이 없답니까?”
서재에 외부 사람이 없으니 범한은 화가 난 걸 유감없이 표출해 버렸다. 명목상으로는 문하중서에서 내보낸 서한이지만, 실제로는 황제 아버지의 뜻이란 걸 범한은 알고 있었다.
황실 금고와 감찰원을 자신에게 모두 쥐도록 해놓고 결국에는 타당한 방법을 찾지 못하자 경도 감찰원에 하종위라는 패를 끼워 넣은 것이었다. 한데 오히려 진평평의 압박에 숨통이 트이지 않자, 이번에 강남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었다.
범한이 황제와 관련해 경계하는 건 초상 전장에 관한 자신의 해명을 그가 믿어주느냐 여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과 북제 사람과의 관계에 황제가 경계하기 시작했느냐 여부였다.
황제는 밀무역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니 장 공주도 10년 동안이나 한 것이었다. 그런 걸 범한은 이제 겨우 1년밖에 안 했을 뿐더러 오히려 국고로 많은 은전을 보낸 터였다. 그러니 황제 아버지가 그 일로 쩨쩨하게 굴 리는 만무했다.
범한의 살짝 못마땅한 낯빛에 설청이 소리 내어 하하, 하고 웃고는 범한을 위로했다.
“조정 사람에게 내보인 것도 아닌데, 무얼 걱정하는 것인가? 흠차의 수뇌인 삼사가 조사를 하러 출두해도 자네가 손만 한 번 들썩이면 어디 조사를 할 수 있는 줄 아는가? 잊지 말게. 자네도 흠차 대인일세.”
설청이 손을 뒤집다가 때마침 탁자에 있는 찻잔이 보이자 그것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설청의 안정적인 손놀림을 주시하고 있던 범한의 머릿속에 문득 번쩍 하는 게 있었다. 밀무역과 관련해 설청은 일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내부 사정은 전혀 몰라 이리 차분하게 있는 거였다. 만약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경국에 손해를 끼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설청이 안다면 어쩌면 이 노인네는 너무 놀라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릴지도 모른다.
범한이 등잔에 기름을 부어 불꽃을 키우려 할 때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설청이 찻잔을 내려놓은 후 매우 진지한 낯빛으로 표정을 바꾸는 걸 보게 되었다.
관료끼리 교류를 할 때, 특히나 설청 같은 지역 우두머리와 범한 같은 황자 신분이 함께 할 때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일은 모두 웃음 속에 녹여서 말한다. 서로 간에 막이 생겨 냉담하고 부정적인 기류가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상황에서 설청의 진지한 표정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범한은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려버렸다.
오랜 침묵을 마친 설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도의 일은 작은 범 대인 자네도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것이네. 한데 자네는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
‘견해라고? 견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번 일에 대해 이 어르신께서는 아무런 견해도 없다고!’
범한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대신 웃는 얼굴로 설청의 턱 아래에 난 수염이나 감상했다. 어찌 되었든 이 세상에서 대종사들과 황제 아버지를 빼면 그에게는 무서운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범한은 이런 보기 좋은 모습을 자연스레 내보일 수 있었다.
설청이 기침을 두어 번 했다. 범한의 모습을 보니 자신의 질문이 너무 수준이 낮았던 것이었다. 한편 상대방의 무례한 행동은 오히려 자기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다. 이에 설청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직접적으로 말해버렸다.
“제대로 말해 줌세. 황제 폐하께서는······ 태자를 폐위하려 하신다네.”
범한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설청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한참 후 정신이 돌아온 범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설청의 눈을 주시하고는 한참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속으로는 확실히 놀란 상태였다. 하지만 태자의 폐위 때문도, 설청과 자신이 나눈 이야기 때문도 아니었다. 설청이 범한에게 대놓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태자의 폐위는 설청의 추측이 아니라는 거였다. 황궁에 계신 황제께서 이미 자신의 충신에게 소문을 흘렸다는 의미이고, 아울러 그 이야기가 차츰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설마 벌써부터 여론 조성에 나선 건가?’
설청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 위를 두드리며 미소 지은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작은 범 대인은 왜 그리 놀라는가? 설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던 건 아니겠지?”
설청이 갑자기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미간에 잠깐 안타까움을 드러내고는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자네가 알아도 상관은 없겠지. 내 이미 상주문을 올려 황제 폐하께 그 생각을 버리시라 간언했다네. 하나 아무 소용이 없었지.”
“지금 제게 상주문을 올리라 권하시는 것입니까?”
범한이 설청을 바라보며 물었다.
설청이 미소를 지으며 답해주었다.
“자네와 태자마마의 관계가 어찌 되는가? 모두 잘 알고 있지 않나. 이 노인네는 그리 아둔하지 않으이.”
한참 동안 머뭇거린 후 설청이 자그마하게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네. 그러니 우리 같은 신하 입장에서는 따를 수밖에 없기도 하고······.”
설청은 여기까지만 말을 하고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속으로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태자는 최근 2년 동안 점점 성장하는 중이었고, 매우 착실해 보였다. 그리고 각 방면에서도 적지 않은 발전을 이뤘고 말이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는 왜 갑자기 태자를 폐하려 하시는 건지. 설청은 황족 내부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거라고 은근히 추측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황족 내 사생아인 범한과 마주하고 있었으니, 그는 자신이 품은 의심을 차마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본 후 물었다.
“이 일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습니까?”
“강남 일대에서는 분명 자네와 나, 두 사람만 알고 있을 걸세.”
설청이 말을 이어 갔다.
“하나 7로 총독들 모두 이미 황제 폐하의 밀지를 받았을 거라 믿고 있네. 그러니 모두 알게 되는 때가 언제인지 봐야겠지.”
범한은 속으로 싸늘하게 웃었다. 황제가 정말이지 너무나도 독했고, 심지어는 독해서 바보 같아 보일 정도였다.
태자는 1년 동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저 먼 남조국에 다녀오는 동안에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조정 대신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황제 폐하 입장에서는 태자를 폐위할 구실을 찾고 있다고는 해도 무척이나 힘들 터였다. 그래서 허를 찌르듯이 지방에서 중앙을 포위하는 전술을 쓴 것이겠지.
하지만 7로 총독들의 입김이 아무리 세다 한들 그들도 신하였다. 그러니 어찌 감히 앞장서서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황제 폐하께서 밀지로 명을 내렸다지만, 7로 총독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이 황위 싸움에 합세해 봤자 무슨 영화가 따라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청이 범한의 생각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필시 본 총독이 황제 폐하께 태자 폐위를 간언하는 맨 처음 관원이 될 걸세.”
범한은 어안이 벙벙해 설청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설청이 충신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충성심이 이 정도로 깊은 줄은 범한으로서는 처음 안 것이었다.
“어떤 이유를 대실 겁니까?”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상대방에게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그러자 설청이 범한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그게 내가 오늘 대인을 이곳으로 청한 이유라네······ 황제 폐하의 뜻은 매우 명확했다네. 8처를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