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4화 황당한 말 (2)
홍죽의 얼굴에 참회의 빛이 어리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 되자 동궁에 있던 아랫것들은 모두 입막음을 위해 황제 폐하께 살해당했다. 그런데도 홍죽 하나만 살아남았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모든 진상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홍죽은 황제 폐하께는 비밀을 발고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에게는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니 홍죽의 얼굴에 드리워진 참회의 빛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가 동궁에 있는 동안, 황후와 태자는 그에게 잘 해준 편이었다. 특히 황후는 그를 유난히 따스하게 대해주었다.
그동안 홍죽은 황제 폐하의 엄명을 받아 황후의 시중을 들으며 그녀를 감시하는 중이었다. 그렇다 보니 실망한 국모가 어떻게 절망에 빠져가는지, 날마다 술로 자신을 달래는지 지켜봐야만 했다. 이에 홍죽도 참기 힘들 정도로 속이 말이 아니었다.
태자가 차분하게 홍죽을 바라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슬프게 웃으며 자문자답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네가 범한에게 밉보여서 부황께 이곳으로 쫓겨 온 줄 알았다지. 그런데 처음부터······ 네가 어서방에서 나온 이란 걸 본궁이 잊고 있었다니······ 너와 담박공 사이의 원한은 진짜이긴 한 것이냐?”
“진짜이옵니다.”
홍죽이 머리를 숙이고 말을 이어갔다.
“다만 소인도 경국의 백성인지라 황제 폐하의 명령이 우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태자가 버럭 화를 내며 닥치는 대로 아무 물건이나 집어 들고 던지며 욕을 했다.
“네놈 따위가 어찌하여 백성 운운하는 것이냐!”
태자가 던진 물건은 그가 아까 황후에게 부채질을 해 줄 때 사용한 부채였다. 그러니 가볍게 휘리릭 날아간 부채는 홍죽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지도 못했을뿐더러 옆으로 새서 태감 관복의 아랫자락 쪽에 그냥 ‘톡’ 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모후께서 놀라 깰 걸 염려한 태자가 힘겹게 호흡을 가다듬고 원망과 미움이 담긴 눈빛으로 홍죽을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너를 정말로 좋아하시나 보구나······. 그리 큰일을 알고 있는데도 네 놈의 개 같은 목숨은 살려두셨으니 말이다.”
홍죽이 고개를 두 번 조아리고 의혹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마마, 대체 무슨 일이시옵니까?”
태자가 정신을 차리고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갑자기 입을 뗐다.
“지금의 동궁은 이미 예전과 다른 곳이 되었다. 그런데도 너는 이곳에 남아 무얼 하는 것이냐? 네가 떠나고 싶다면 내가 부황께 말씀을 드려보겠다.”
홍죽이 살짝 머뭇거리다가 잠시 후 이를 악 물고 답했다.
“쇤네는······ 동궁에 남고 싶사옵니다.”
“동궁에 남아 감시를 하겠다는 말이냐?”
태자가 소리를 죽인 채 계속 비꼬았다.
“궁궐 안에 온통 감시자인데, 너 하나 더 늘었다고 내가 신경이나 쓸 것 같으냐?”
일이 이즈음 되자 태자는 황제 폐하가 자신을 폐위하려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무엇하러 자신의 궁 안에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진심인 척 연기를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쇤네, 황후마마의 시중을 들고 싶습니다.”
태자가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얼굴에 연민의 빛을 띠고 홍죽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아도 죽었겠지?”
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홍죽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한참 후 살짝 슬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 몇 달 동안 궁 내 동정이 어떠했느냐?”
태자가 홍죽을 차분하게 바라보며 어찌 말해도 정확한 답을 말할 수 없는 질문을 툭 던졌다.
홍죽이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몇 차례 함광전으로 행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오실 때면 항상 기분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태자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는 살짝 마음이 놓여서였다. 이에 칭찬하는 듯한 표정으로 홍죽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구나.”
그러자 홍죽이 고개를 숙이고 화답했다.
“소인에게는 과분하옵니다.”
태자가 긴 의자 가장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부황께서는 분명 이번 일의 진상을 황태후마마께는 말씀드리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비록 종횡무진 거침없는 분이시라지만, 그래도 부황은 여전히 일말의 심적 굴레로 곤욕을 치르시는 중인 거였다.
이를테면 종잇장 같은 체면이나, 효(孝) 같은 것 말이다.
경국은 효로 천하를 다스리는 걸 중시했다. 이에 황제는 스스로 효의 굴레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이승건이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자기에게 아직 시간이 있어서였다. 부황께서 자신을 태자에서 폐위하려면 일단 시간을 들여 여론 조성부터 해야 했다. 감찰원 8처가 그와 같은 소문을 만드는 일을 하기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 * *
“수아가 죽었으니, 홍죽의 기분이 어떨지 모르겠네요.”
범한이 자그마한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가 평범한 내관이었다면 어쩌면 너무 많은 걸 고려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홍죽이 평범한 태감이 아니란 걸 저는 알 수 있었어요. 그는 공부도 했고, 철도 들었고, 은원을 중시하고 정과 의리를 중시했거든요······. 어찌 되었든 수아가 죽은 건 제 잘못이자, 그의 잘못이네요. 우리 두 사람이 황궁 내 수백에 이르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거였어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독한 분인지를 두고 우리가 뭔가를 빠뜨렸나 봐요. 그렇겠지요, 뭐. 홍죽이 저를 미워하고 있지 않다면 분명 자기 자신을 탓하고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뭔가 번거로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범한이 다시 한 차례 ‘그렇겠지요, 뭐!’라고 말했다. 그런 후 대단히 슬픈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그 수백 명의 죽음은 어찌되었든 저 때문에 그런 거니······. 그래요. 저는 무정한 사람이에요. 그래도 오죽 아저씨 같은 괴물은 아니랍니다.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요. 예전에 해당타타에게도 몇십 명, 몇백 명을 죽여도 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말했었어요. 그런데 또 황제 폐하처럼 될 수는 없다고도 말했어요. 만약 몇만 명이 제 눈앞에서 죽어 나간다면 저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거든요. 황제께서 태자를 폐위하려 하시는 건 제가 암암리에 영향을 미쳐서인데요······ 물론 제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어도 그 일은 결국에는 터질 수밖에 없는 거였어요.”
범한이 고개를 내젓고는 계속 말했다.
“한데 이제 와서 저는 태자를 이렇게나 빨리 폐위해서는 안 된다고 황제 폐하를 말리고 있답니다. 왜일까? 정말 무료하고 황당하지 않으세요? 제가 대체 뭘 무서워하고 있는 걸까요? 뜨거운 불로 음식을 다 만들고 나면 남는 건, 식은 그릇과 찬밥뿐이라던데······.”
범한이 자조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만약 태자, 둘째, 장 공주가 끝장이 나면 저는 찬밥이 될 뿐이에요. 황제 폐하께서 아무리 저를 예뻐해 주시고, 또 저를 데리고 거대한 천하를 구축하길 바라셔도 말이지요······. 하나 아시다시피 저는 평화주의자에요. 응, 그래요. 아주 거짓된 평화주의자지요. 저는 싸우는 걸 싫어해요. 그러니 2년간 벌인 그 많은 일들은 현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서겠지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 지연을 시켜야 했어요. 적어도 제가 제대로 된 준비를 마치기 전에 황제께서 전쟁 준비라는 궤도로 들어서지 못하시도록 말이지요. 그때가 되면 첫째 황자는 군으로 갈 테고, 저는 군을 감시하고 북제와 동이를 죽여야 할 거예요. 그러면 칼 아래에 사람들이 죽어 나갈 텐데······. 전쟁 때문에 피로 물든 나날은 생각만 해도 슬퍼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런 건 다 잠재된 주요 모순이지요.”
범한이 말을 마친 후 앞에 놓여 있던 종이를 거둬들였다. 그런 후 그것을 다시 상자 안으로 집어넣으며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호기심에 화가 난 상태였다. 그리고 매번 참지 못하고 어머니의 서한을 꺼내 읽어보고는 그때마다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있었다.
지금 범한은 항주 화원(華園)에 와 있었다. 문 앞에는 그 커다란 상자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있는 눈처럼 하얀 은전은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반짝이고 있었다.
범 상서처럼 그 역시 종이를 앞에 두고 말하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아버지께서는 초상화를 보고 말하는 거였다. 하지만 범한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아직 서한을 마주 보고 말하는 정도였다.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이 너무 많았다. 한데 그 말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들이 지금은 단 한 사람도 곁에 없어 범한은 무척이나 괴로웠다.
과거에 한동안은 왕계년을 최고의 청중으로 여기고 이야기를 털어놨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 때문에 왕씨에게 심장마비가 올 것 같자 범한은 그를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행동을 그만두었다.
오죽, 약약, 완아, 해당타타 중 그 누구도 곁에 있지 않았다. 그러니 제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대체 누구에게 들어 달라 할 수 있을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대역무도한 말들이었다. 그러니 대체 어디에서 지지를 구해야 한단 말인지!
범한에게 점점 그러한 적막감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가 고독 속에서 간직해 두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자신의 두 번째 생명과 관련해 전에는 절대 하지 않았던 의심이란 걸 하게 되었다.
사실 누구나 특정 시기가 되면 자신의 일생을 돌이켜보고,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보고, 미래에 대해 전망해 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어제, 오늘, 내일이다.
한데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작업은 종종 삶에 싫증이 났다거나, 자신이 정해 놓았던 목표를 달성했을 때 하게 된다.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떠올려 본다면 자연스레 한 노인이 강가에서 낚시를 하다가 인생이란 게 발아래에서 흐르는 물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며 한탄하는 경우가 생각날 것이다.
범한은 고하가 아니었다. 그리고 낚시를 하는 취미도 없었다. 그는 아직 젊었지만 그래도 환생이란 걸 한 터라, 자세히 따져보면 이미 서른을 훌쩍 넘긴 곧 지천명을 바라보는 중년의 남성에 가까웠다.
그러니 지금 아무리 아름다운 겉껍질을 두르고 있어도, 물론 이러한 단어 선택이 약간 억지스러운 감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논외로 하고, 그래서 아무튼 그는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 것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품에 안고 예전에 인류를 위한 멋진 일을 하지 못했다는 식의 한탄 같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혼돈 속에서 청명함을 찾고, 다시금 자신의 확고부동하고 명확한 목표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범한은 살짝 혼미함 속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태어난 후 범한은 줄곧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다. 그리고 절벽에서 오죽 아저씨에게 세 가지 대표적인 것을 기본 줄기로 한 세 가지 큰 바람에 대해서도 말했었다. 지금 그 세 가지 큰 바람은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 곁에 있는 여인의 수는 그다지 늘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는 건 빼고 말이다.
세 가지 큰 바람의 골간은 당연히 살아나가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위해 범한은 계속 노력했고, 강경하게 행동했으며, 냉정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세 가지 큰 바람에 숨은 기능, 또는 따라오는 속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범 상서가 말한 인생의 이상(理想), 즉 권력을 쥔 신하, 권신이 되는 것이었다.
현재 경국에서, 그리고 천하에서 범한은 제대로 된 권력을 쥔 신하가 되어 있었다. 이에 어느 지역을 가든, 모두들 그를 공경하고 두려워했다. 그런데 정신적으로 지천명을 앞둔 사람이라 그런지 범한은 결국 하룻밤 사이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게 ‘정말로 내가 원하던 삶일까?’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