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1화 침묵할수록 행복한 (2)
범약약이 탄식을 했다.
“해당타타 사저는 암암리에 오라버니의 일을 도와주고 계셔.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잖니.”
“그냥 이익을 교환하는 것뿐이잖아요. 북제 사람 중에, 이미 죽은 장묵한을 제외하면 외부 사물에 얽매이지 않을 성인이 몇이나 될까요?”
범사철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누님이 고하 문하생이 되고, 제가 손꼽히는 큰 사장이라고 해도, 형님이 북제 사람들에게 아무 쓸모가 없게 되면 그 즉시 우리는 저들 발에 밟혀 죽을 겁니다. 때가 오면 해당타타가 우리를 위해 나서주기를 바랄 수 없을걸요.”
그러자 범약약이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내 견해는 너와는 완전히 달라.”
범사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한참 후 자그마한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무슨 일이든······ 순서란 게 있지 않아요?”
범약약이 한동안 생각에 빠져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동생의 견해에 동의했다.
존경스럽고 정겹지만 침묵과 상처를 받는 데 익숙한 새언니를 그녀는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불쌍히 여기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문득 황당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순서라고 하면······ 오라버니 곁에 가장 먼저 있게 된 사람은 나 아니야? 단지 운명의 장난 때문에 그렇게······.’
범약약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지니지 말아야 할 감정들을 서둘러 억누르고 동생과 함께 형수 임완아의 운명에 대해서나 걱정했다.
“오라버니께서는 그렇게 박정한 사람은 분명 아니셔. 단지 지금 형수는 오라버니와 장 공주 사이에 껴 있는 처지라 어찌 처신해야 할지 모르셔서 그런 거야.”
“그러면 더는 생각 않으면 되죠, 뭐.”
범사철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지금 관건인 건 형님이 계신 남쪽 상황이에요.”
“내 눈에는 오늘 저녁에 손님을 초대해 연회를 열었다고 네가 분수에 맞지 않게 너무 자만하는 것으로 보이는구나.”
“장 공주가 무너지면 제가 자연스레 그 기회를 이용해 돈을 더 벌게 되니까 그렇죠.”
범사철이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요즘 조정에서 형님 일파만 유난히 커져서 항상 뭔가 문제가 있어 보여요.”
“생각이 좀 너무 앞서나간 거 아니니? 혼자만 큰 건 오히려 귀찮은 일이야. 바람받이만 되는 거잖아.”
범약약이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집안일이든, 나랏일이든 우리처럼 이국 타향에 와 있는 사람이 걱정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범사철은 당황했다.
‘과거의 누님이었다면 범한 형님의 안위를 두고 초조한 모습을 보였을 텐데. 어쩌다가 이렇게 담담하게 변하신 거지?’
범사철은 감히 누나에게 지적은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무의식적으로 질문이 나갔다.
“누구의 시일까요?”
“오라버니.”
“이제는 시를 안 지으시잖아요!”
“외부인 앞에서만 안 하시는 것뿐이야.”
“음······ 우리는 정말로 상관 않는 거죠?”
“우리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니?”
범약약의 낯빛이 차분해졌다. 그런데 차분함 속에는 오라버니를 향한 믿음이 있었다.
“오라버니는 정말 힘겹게 우리를 북제로 보내셨어. 우리가 그 일에 참여하지 않기를 바라셔서 그래. 그러니 우리가 정말로 오라버니를 위하고 싶다면 이곳에서 잘 지내면서 오라버니 속 썩게 할 일이나 안 하면 되는 거야.”
“어떻게 해야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주인장 노릇하는 게 행복하니?”
“그런대로 괜찮아요. 가끔은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말이지요.”
“나는 내일 의관(醫館)에 가. 그리고 지금 이런 생활이 너무 행복해······. 오라버니께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우리는 이미 찾았으니 제대로 해나가야겠지. 그래야 우리 삶이 더 안전해지고 행복해지니까.”
범약약이 이어 정의를 내렸다.
“오라버니께서 마음을 놓으실수록 우리가 가족에게 공헌하는 거야.”
* * *
강남로에서 강북로로 갈 때 편한 길은 세 개였다. 하지만 어느 길을 선택하든 결국에는 도도하고 거침없이 흐르는 큰 강을 건너야 했다. 한데 현 세상에는 범한이 전생에 흔히 보았던 콘크리트 교량이 없는 탓에 양쪽 물가에서 배가 자주 오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황실 금고의 3대 작업장은 민북에, 전운사 관아는 소주에, 작은 범 대인은 항주에 있다 보니, 황실 금고는 관리가 느슨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관리나 상인들에게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감찰원과 황실 금고 관아가 함께 손을 잡은 후로는 강남에 퍼져 있는 화물 창고와 전문 통로는 엄격하게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북으로 가는 길은 먼저 서쪽으로 간 후 일부러 빙 둘러서 가게 되어 있었다. 일단 사주에서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고, 다시 강북로에 있는 황산을 넘고, 창주로에 있는 초원 지대를 건너 다시 북해로 갔다.
이런 식으로 계속 돌고 돌아 북쪽 영토 안으로 들어가면 구매자의 수요만큼 경국으로는 풍성한 은전이 되돌아 왔다.
북쪽으로 보내는 화물 대부분은 하명기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하서비는 범한의 도움으로 몇 개의 큰 품목을 낙찰을 받았다. 그리고 암암리에 강남 일대의 작은 행상들과 파벌을 하나로 합치며 점점 세를 이루어 갔다.
하서비가 사주에서 강을 건너는 방법을 택한 이유는, 관원들에게는 사주에 강남 수병이 주둔해 있기 때문으로 보여서였다. 하지만 범한만은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곳이 강남 수채의 가장 큰 세력권이기 때문이었다. 황실 금고 화물을 조정에서 파견한 관원에게 감독하게 할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안에 들어 있는 일부 물건은 무턱대고 조정 관원들에게만 지키도록 할 수 없었다.
하서비는 사주성 밖 찻집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화물을 싣고 큰 강을 천천히 오가는 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쪽의 둘째 도련님이 갑자기 물건 양을 늘리기는 했지만 그가 소화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황실 금고의 문이 범한의 측근들에게 활짝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리 짧은 시간 안에 조정의 의심을 피해 모든 화물을 그곳까지 운반하려면 대단히 섬세한 안배가 필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정 관례에 따라 감찰원이 황실 금고 운영의 감찰 책임자인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는 과거에 조정 대신들이 걱정했던 게 드디어 현실화된 것이었다. 범한이 자신을 감찰하다 보니 결국에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하서비가 찻잔을 내려놓고 입술에 남은 씁쓸한 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그는 속으로는 씁쓸한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과거 1년 반이라는 시간을 돌이켜 보니, 자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일단 흠차 대인의 대퇴부로 승격된 후 10년 여 동안 독사처럼 그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던 원한은 하룻밤 사이에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명씨 가문도 다시 자신의 수중으로 들어왔고, 남들 앞에 떳떳이 나서지 못했던 강남 수채 대두목에서 감찰원 관원으로 신분이 바뀌었으며, 또 강남의 부유한 상인이 되어 이름까지 드날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일이란 건 참 기묘한 거였다.
한데 그도 알다시피 지금의 명씨 가문은 예전의 명씨 가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직접 손을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작은 범 대인의 명령이 떨어지면 자신은 온전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강 위를 오가는 선박 위 화물 상자를 만족감에 찬 눈빛으로 보고 있던 하서비가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북제와 동이로 보내는 황실 금고의 밀무역품은 누가 봐도 현재 제일 돈이 되는 물건이야. 한데 왜 작은 범 대인은 신분이 그 정도나 되는데 왜 이렇게 탐욕을 부리시는 거지? 전에 작은 범 대인께서 장 공주가 은전을 탐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었지. 조정에서 권세를 누리기 위해서라고. 그러기 위해 황자들에게 기반을 닦아주고 군측 인사들의 마음을 사야 해서라고.
그리고 무언가 이해가 되지 않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범 대인은 황자라고 해도 범씨 가문 사람으로 올라 있어서 황위를 이어 받을 가능성이 없어. 그런데 왜 그리 많은 은전이 필요하신 거지? 더욱이 황제 폐하께서는 예전에 장 공주가 몰래 자신의 금고를 텅텅 비다시피 만든 걸 싫어하셨다고 했어. 그런데도 그분께서 설마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 작은 범 대인을 용서해 주실 수 있을까?’
* * *
장 공주 이운예가 세를 잃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충격파가 천하 귀인들의 마음속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서 파생된 다른 충격파까지 일지는 않았다. 물론 이는 표면적으로만 평온해 보이는 것이었을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한편 사람들은 경국 조정의 권력자인 범한이 어떻게 황제의 총애를 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손에 쥔 권력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범한을 향해 집단 경계심과 집단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말하든지 간에 천하 사람들이 생각하는 범한은 여전히 문인이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범한이 보여준 행동을 통해 사람들은 그가 일반적인 경국 권문귀족들의 자제와는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본 범한은 끓는 피를 가진 것도, 호전적이지도 않았다.
북제와 동이 입장에서는 범한이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북제 젊은 황제의 경우는 범한을 곁으로 데려와 친왕으로 봉하고 싶은 정도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범한이 경국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북제 황제는 범한의 권력이 더 커지기를, 범한에 대한 경국 황제의 총애가 더 깊어지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범한이 경국 황제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지까지 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는 망상이자 이상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세상에 일개 타국의 신하에게 평화를 의탁하는 어리석은 국왕은 어디 있으랴. 그리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평화는 결국에는 실력을 통해, 즉 나라의 실력을 통해, 다시 말해 결국에는 군사력에 의해 구현되는 것 아니던가!
봄이 시작되자 연금에서 풀려난 북제의 웅장(雄將) 상삼호가 연경 북쪽과 창주 동쪽으로 드넓게 펼쳐져 있는 광야로 남하했다. 그는 이곳 군 내부에서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절대적인 권위를 수립했다. 그리고 연일 군사 훈련을 실시해 경국 군대를 향해 위력을 과시함으로써 그들의 야심을 강력히 억제했다.
상삼호와 정면으로 맞선 경국의 대장군은 정북 대도독 연소을이었다. 놀라운 실력자 두 사람이 맞붙었으니 전쟁의 불꽃과 피비린내가 점점 피어오르지 않을 리 없었다. 전선에서는 전투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은 마찰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일부러 만들어낸 긴장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갔다.
그러니 하서비가 자신의 행상 하명기를 이끌고 황실 금고 물건을 북쪽으로 가져갈 때 창주 남쪽에서 북해 쪽으로 돌아가야 했던 건, 사실은 창주 쪽이 긴장 국면에 돌입해서였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이번 달 안에 모두 바뀌어 버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삼호가 갑자기 병사를 거두고 50여여 리 뒤로 군을 이동시켰다. 그런 후에는 방어도, 돌진도 하지 않는 맥이 푹 빠진 태세를 취했다. 연경과 창주 일대에 포진해 있는 연소을의 십만 정예병이 눈을 부릅뜨고 물어뜯어 버릴 준비만 하고 있는데도 그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긴장감이 감돌던 시간은 갑자기 여가 활동 시간으로 변하고, 두 나라의 군인이 서로 늘어서서 으스대는 건 갑자기 야유회 활동처럼 되어 버렸다. 이렇게 갑작스런 변화가 일자 경국 군 측은 절로 분노가 일었다.
그렇다면 북제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