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0화 침묵할수록 행복한 (1)
연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했다.
범사철이 거짓으로 웃음을 지으며 장안후에게 옥 사자상 한 쌍을 받았다.
다만 주인인 범사철이 습관처럼 포월루 대청 밖을 주시하고 있는 건 이상했다. 오늘 포월루는 그가 세를 낸 터라 다른 손님은 없는데 말이다.
이에 옆에 있는 위화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누가 또 오는 거지?’, ‘왜 나는 사전에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거지?’라고 생각했다.
범사철을 표정을 보아하니 이제 곧 도착할 손님은 신분은 낮지 않아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범사철이 저렇게나 대놓고 기다리면서 긴장할 리 없었다. 그런데 곧 올 손님의 신분이 낮지 않다면 왜 그 손님을 기다리지 않고 벌써 연회를 시작한 걸까?
위화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입가에 자조와 씁쓸함이 옅게 뒤섞인 웃음을 지었다. 범씨 가문 형제가 상식적인 도리에 입각해 판단할 리 없다는 건 그도 아는 사실이었다.
위화는 심중의 뒤를 이어 현재 북제의 금의위 진무사 지휘사를 맡고 있었다. 이에 북제 대부분의 특무기관은 모두 그가 통제하고 있었다.
북제의 젊은 황제가 그를 두텁게 신임하고 있는 편이라 그는 큰 권력을 쥐고 있는 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일단 남쪽에서 온 범씨 형제를 대할 때면 은근슬쩍 긴장했다.
범한은 감찰원을 관장하고 있으니, 어찌 말해도 위화와는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위화도 알다시피 그는 범한보다 이 일을 한 경력이 짧았고, 북제 금의위는 경국의 감찰원처럼 큰 권력을 쥐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위화는 두 사람이 정말로 국경을 마주보고 싸우게 된다면 자신은 상대방을 막을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위화는 옆에서 손님 접대를 하고 있는 통통한 소년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2년 전 범사철에 대해서는 확실히 잘못 판단한 부분이 있었다.
그저 범한이 저가 쥐고 있는 권력을 이용해 동생을 북제로 도주시킨 거라고만 생각으니까. 2년여 동안 범사철이 막후로 숨어들어 옛 최씨 가문이 쥐고 있던 선을 확실히 거머쥐고, 암암리에 사업을 발전시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고작 소년 따위에게서 볼 수 있는 장사 감각과 능력이 아니었다.
위화가 이마를 탁, 하고 쳤다. 그런 후 미소 지은 얼굴로 범사철과 한 잔 나누며 재밌는 이야기 짧게 나누었다. 범사철이 손님을 초대한 목적은 명확했다. 일단 남쪽의 밀수품을 북쪽으로 가져오면 누군가는 인수인계를 해야 했다.
경국 사람이 대놓고 북제에서 물건을 팔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위씨 가문에서, 특히 장영후가 그 일을 맡아서 했다. 한데 갈수록 담력이 커지고 있는 범사철이 보기에 장영후 일가가 물건을 파는 속도는 조금 느리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장안후를 엮은 것이었다.
위화는 이와 같은 계획에 전혀 반감을 갖지 않았다. 그건 장안후가 친 작은아버지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위씨 가문은 황제 폐하의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이 장사를 통해 대부분 이윤은 계속해서 황제 폐하의 금고와 국고로 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더군다나 범사철이 아무리 들볶는다 하더라도 그는 북제 영토 안에 있었다. 그러니 위화는 범사철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고, 일단 일이 틀어지면 금의위가 나서서 그의 상행(商行: 상사의 의미)을 깨끗이 정리해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이 최종 단계로 넘어가기 전까지 위화는 그러한 일들을 감행할 수 없을 뿐더러 황제에게 감히 주청을 올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북제에는 범한이 경도 황실 금고에서 빼낸 물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화는 범한이 음험하고 악랄한 수단을 동원하지는 않을지,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포월루의 문발이 살짝 움직이더니 낭자 둘이 손을 잡고 들어왔다. 그 순간 위화는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이 움찔해 하마터면 술을 쏟을 뻔했다.
둘 다 잘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런 점이 위화가 범한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낭자들은 바로 해당타타와 범약약이었다.
위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았다. 그는 몸을 돌려 책망하듯이 범사철에게 한마디 하고는 존귀한 신분인 천일도의 정통 제자 두 사람을 상석에 앉혔다.
연회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북제 사람들도 모두 알다시피 황태후는 해당타타를 위화에게 시집보내려 하고 있었다. 한데 해당타타는 오히려 범한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애매한 관계에 있었다.
위화가 씁쓸하게 웃으며 해당타타에게 말을 건넸다.
“범씨 가문 둘째 도령이 초청한 것이라지만 이리 오면 내 체면을 어찌 되는 겁니까.”
해당타타가 잠시 웃고는 범사철이 건네준 옥 사자상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만지며 대꾸했다.
“허풍 치는 걸 좋아하시는군요.”
그러자 위화는 소리 내어 웃기만 하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위화는 해당타타가 자신이 건드릴 수 없는 여인이란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태후의 생각을 알게 되자마자 곧바로 입궁해 완곡하게 거절 의사까지 밝힌 터였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황태후는 사랑하는 자기 혈육에게는 항상 막무가내였기 때문이다.
막무가내인 건 황태후뿐만이 아니었다. 범한도 그러했다. 하지만 위화는 그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담력이 크지 않았다. 해당타타와의 혼인은 범한에게 밉보이는 일이 아니던가.
또 9등급의 절세 고수를 아내로 맞이하면 아내가 남편 말을 무시하겠지? 그리고 또 아무리 해당타타가 선량한 성품과 지혜를 지녔다지만, 그래도 생긴 게 너무나도 평범해서······.
작년에 위화의 누이가 랑도와 함께 경국 강남으로 가는 길에 오주를 지나다가 범한과 다툰 적이 있었다.
이 일로 위화는 범한이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야 마는 쩨쩨한 성품의 소유자란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좋은 말을 잔뜩 담은 서한을 써서 보내 범한의 화를 누그러뜨려 놓기도 했었다.
요 몇 년간의 일을 이리저리 떠올려보던 위화가 참다못해 한숨을 연달아 내쉬었다.
‘범한아, 범한아, 네 놈은 어찌 내 체면은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것이냐? 뭘 하든 나를 그렇게 찍어 눌러야겠느냐! 내내 같은 일 하는 입장에서 왜 이렇게 나를 달달 볶는 것이냐. 그리고 나는 금의위 지휘사씩이나 되는데 왜 감찰원 제사처럼 뜻대로 되는 게 없는 거야!’
* * *
해당타타와 범약약이 포월루로 들어오자 연회석상 분위기가 훨씬 차분하게 변했다. 위씨 가문에서 잘나가는 어른들은 손윗사람처럼 행동하며 두 낭자와 각자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이번 담판장에 나온 건 황제 폐하를 대신해 많은 걸 챙겨 가려던 거였는데, 저 두 낭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특히 해당타타 낭자는 대체 팔이 어느 쪽으로 굽고 있는 거야?’
이에 그들은 범사철을 향한 공격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범사철은 미소 지은 차분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장래의 이윤 배분과 인수인계에 관한 세칙을 명확히 말했다.
그가 오늘 해당타타와 누이를 이 자리에 초대한 건 자신을 위한 패를 하나 더 늘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적어도 북제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는 있어서였다.
오늘 연회는 명목상으로는 범사철과 위씨 가문의 담판 석상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범한과 북제 황제가 결탁하는 자리였다.
모든 참석자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위씨 가문 내 주도자인 장영후 부자는 관련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술이 세 번 돌고, 의사 결정을 마치자 양측의 거의 모든 이가 기분 좋게 연회석상을 떠났다.
다만 위화의 얼굴에서만큼은 그다지 기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득을 배분하는 협의에서 이번에도 범사철에게 주도권을 빼앗겨서였다.
밤이 점점 깊어 오자 해당타타는 곱고 윤이 나는 옥 사자상을 들고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범사철을 두어 차례 바라보고는 곧장 자리를 떴다.
그렇게 포월루에 남매만이 남게 되었다.
* * *
“저는 해당타타가 싫어요.”
포월루 상경 분점 내 어느 방에서 범사철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꺼냈다.
“어째 갈수록 노숙해지는 느낌이구나.”
범약약이 평소처럼 남동생의 머리를 손으로 토닥여 쳐주었다. 그리고 미소 지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사저께서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는 거니? 너를 당나귀 취급한 일을 아직 잊지 못해서 그러는 거야?”
범사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건 형님의 뜻이었고요. 절 고생 시키려고 그랬다는 거, 저도 다 알고 있어요.”
범약약이 살짝 놀란 얼굴로 남동생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한 채 대꾸를 했다.
“정말로 갈수록 노숙해지는구나. 정말 아이 같은 구석이 안 보여.”
그러자 범사철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믿을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렇죠······. 맞다. 노숙하다고 말하셨는데······.”
범사철이 갑자기 기분이 고조되어 물었다.
“그렇다면 제가 갈수록 형님을 닮아간다는 뜻인가요?”
범사철이 흥분하며 던진 질문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큰형인 범한은 자기 삶의 우상이었다. 그러니 형님과 비슷해진다는 건 그에게는 우쭐할만한 일이었다.
범약약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버님을 닮아간다고 해야 옳겠지. 아버님께서 그때 호되게 체벌을 하셨는데 효험을 좀 본 것 같구나.”
범약약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조금 전에 해당타타 사저가 싫다고 했는데, 대체 왜 그런 거야?”
범사철은 누나의 두 눈을 차분하게 바라보기만 할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범약약도 차분하게 동생을 주시했다.
“누나, 분명 잘 알고 계실 거예요.”
범사철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우리에게는 이미 형수님이 계세요.”
범약약이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을 했다.
“그렇지.”
범사철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자그마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요 1년 동안 형수께서 제게 서한을 여러 차례 보내셨는데, 형님은 모르고 계시더라고요.”
범약약이 살짝 놀라워하며 물었다.
“형수께서 서한에 뭐라고 하셨는데?”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집안이 어떻고, 아버지께서는 어찌하고 계시고, 어머니께서 어떠시다는 건 아니었어요.”
범사철이 탄식을 하며 말을 이어 갔다.
“시동생이 이국 타향에 와 있으니, 형수께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셨던 거겠지요. 사실대로 말할게요. 요 1년 동안 머리가 막힐 때마다 형님께 서한을 써서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그때마다 형수님께서 제게 조언을 해주셨어요.”
범약약은 놀란 마음을 천천히 진정시켜나갔다. 그리고 자신도 처음 알게 된 일이라 일단 천천히 숨은 의미부터 음미해 보았다. 그런데 여러 의미가 있자 암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형수께서는······ 너무 불쌍한 분이셔. 너도 알다시피 황제 폐하께서 장 공주님을 별장에 감금시켜 놓으셨어. 오라버니도 지금은 강남에 계시고.”
“형님은 저를 북쪽으로 차버리실 줄이나 알았지.”
범사철이 불만에 찬 상태에서 말을 이어 갔다.
“저를 단련시킬 생각인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 나이가 어떤지는 전혀 고려해주지 않았다고요! 이리 큰 판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방치할 줄만 알았지, 형수님처럼 세심한 면이 없다고요.”
그러자 범약약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동생을 꾸짖었다.
“오라버니께서도 남쪽에서 쉽지 않으실 거야. 오라버니께서 단단히 버티지 못하시면 네가 북쪽에서 안전하게 있을 수 있을 것 같니? 그리고 언제 너를 방치했다고 그런 소리를 해? 경여당의 대행수들이 암암리에 너를 돕고 있고, 북제에 있는 감찰원 밀정망도 너를 위해 나서주고 있잖아. 너를 인재로 길러내기 위해 오라버니께서 얼마나 많이 심혈을 기울이시는데······. 단련이란 말을 꺼냈으니 그 점에 대해 말해볼게. 너는 오라버니께서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어. 오라버니는 혼자 담주에서 자라셨어. 그러니 오늘의 위치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어. 그리고 오라버니께서는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니까 너를 그렇게 대하신 거야. 우리는 동생들이니까, 그러니까 그런 방법을 쓰신 거라고.”
한바탕 이어진 훈계에 범사철은 몇 년 전 경도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의 그는 세상 무서울 게 없었지만 그래도 누나의 손에 들린 쇠로 만든 자는 무서웠다. 이에 범사철은 바로 마음이 약해져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다가 다시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저는 해당타타가 싫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