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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48화 (648/1,108)

648화 자네가 나의 사람이 된다면

만약 범한이 정말 자신을 경국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면 미래 언젠가는 북제에 투항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범한이 투항한다면 북제는 황실 금고 기밀이나 감찰원의 내부 정보, 그리고 그의 신분까지 무수히 많은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경국의 황자이자 장묵한이 인정한 최고의 문학가가 경국을 배신하고 북제로 투항한다면······ 천하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까? 북제에게 얼마나 큰 이점과 위험을 불러오게 될까?

만약 범한이 정말 북제에 투항한다면 북제 황제는 굉장한 야심 품고 있는 만큼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도 그를 받아들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범한은 누가 봐도 진짜 경국 사람이었고, 경국 황제가 자신의 가장 뛰어난 아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들 리도 없었다.

사실 이 세상 사람들은 범한이 다른 세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범한은 동굴에서 그 말을 한 뒤로 이 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건 아니었다.

다만 어린 시절 성장 환경과 친한 주변인들 때문에 경국에 대한 마음이 더 깊기는 했다. 그에게 이 세상의 싸움은 집안 장남이 아우를 때리는 것과 같은 내부의 갈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유리한 데로 이리저리 태도를 바꿔도 부끄러움 같은 감정이 들지 않았고, 조국을 배신해서는 안 된다는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범한 만의 독특한 심리였다.

* * *

상경 황궁의 돌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자 태감과 궁녀들은 용포를 입은 젊은 남자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마음에 옆에서 조심히 부축했다.

그리고 뒤에는 먼지떨이와 맑은 물이 든 병을 든 태감들이 고개를 숙인 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젊은 북제 황제는 뭔가 언짢은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가장 싫어했던 게 바로 태감과 궁녀들이 자신을 편안히 놔두지 않고 둘러싸서 참견하는 거였다.

다만 궁정의 규범이 이러했기 때문에 그는 화가 나도 이 점을 바꿀 수가 없었다. 물론 전부 죽여 버리면 되겠지만······ 전부 죽여서 무엇하겠는가?

3층에 올라오니 푸른 나무가 가지를 검은색 처마 위에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황제가 속으로 생각했다.

‘매일 황궁 안을 다니는데도 나는 왜 지금까지 저런 풍경을 보지 못했던 거지? 매일 보이는 풍경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건가?’

그의 머릿속에 순간 해당이 이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경국 사내는 이 궁 안에서 해당 사고의 걸음걸이를 따라 했고······ 그 사내는 이 황궁의 모든 아름다움을 눈에 담으려는 듯 탐욕스럽게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고 했지······ 설마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성격 덕분에 그렇게 깔끔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인가?’

젊은 북제 황제가 고개를 숙이고 뒷짐을 진 채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몸을 돌려 오른쪽에 난 산길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잠시 뒤 산길 끝에 이르자 어렴풋하게 폭포 소리가 들렸다.

그의 곁에 있던 태감과 궁녀들이 화들짝 놀라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폐하께서 산 정상까지 올라가시려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돌아가자 말하지?’

전전긍긍하며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감과 궁녀들은 감히 앞을 막을 수가 없어 묵묵히 뒤를 따랐다.

산길을 몇 번 돌아 평탄한 벼랑 가에 이르자 작은 정자가 보였다.

황제가 정자를 가리키자 옆에 있던 태감과 궁녀들이 쏜살같이 달려가서는 걸상을 놓고 향을 피우고 먼지를 쓸었다.

정자로 들어간 황제는 정자 아래 개울물과 벼랑에 핀 봄꽃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난간을 치니 차가운 산바람 불어와 꽃과 나무가 나부끼고, 목 놓아 부르는 노랫소리에 뜬구름이 흩어지네.”

옆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첨하며 말했다.

“폐하······.”

북제 황제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당시 범한이 이 정자 안에서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생각했다.

“좋은 문장입니다.”

“짐에게 아첨하면서 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건······ 범한, 자네가 유일하군.”

북제 황제가 웃으며 난간에 서서 자신의 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봤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그가 갑자기 지시했다.

정자에 있던 태감과 궁녀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속으로 ‘산속은 아직 추운데 폐하께서 감기라도 걸리면 황태후를 어떻게 보려고 그러실까?’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도 지금의 북제는 이미 폐하의 세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북제 황제 폐하는 나이는 어리지만, 마음속에는 굳은 의지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심중이 죽은 뒤 폐하는 상삼호를 남쪽으로 보내 경국을 감시하게 하고, 조정에 여러 차례 변화를 불러오며 대신들이 다시는 자신을 아이로 보지 못하게 했다.

태감과 궁녀들이 물러나자 정자 안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난간에 서서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던 북제 황제는 당시 범한의 제안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그의 말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순간 다른 일이 떠오른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범한,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백성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하고 백성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움을 쫓아야 한다고 그랬지? 거기서 말하는 백성은······ 경국의 백성인가? 아니면······ 천하의 백성을 말하는 것인가?”

상황의 진상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한 듯 북제 황제의 얼굴에 미간 주름이 점점 펴지고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기괴한 미소가 걸렸다.

“만약 짐의 사람이 되겠다고 한다면 친왕이 봉해주는 건 어떨까? 지금 소공야보다 훨씬 좋은 자리가 아닌가.”

산 정자에서 북제 황제가 갑자기 얼굴에 미소를 거두고는 평상시 혼자 있을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황궁에서 자란 젊은 황제는 과거 부황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난관에 부딪혔었다. 고하 국사의 강력한 지지와 황태후의 보호 덕분에 그는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그 일로 인해 제왕의 삶은 결코 순탄할 수 없었다.

그렇다. 순탄하지 못한 이유는 많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의 마음속에, 황태후의 마음속에, 고하 국사의 마음속에 있는 영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비밀이었다.

이 비밀을 위해서 북제 황제는 아주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자신의 성격을 억지로 바꿔야 했고 마음을 털어놓고 가깝게 사귈 친구를 만들 수 없었으며, 자신의 누이들과 너무 가깝게 지낼 수 없었고,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고, 목욕하거나 할 때는 엄격하게 봉쇄를 해야 했다. 더구나 후궁에 있는 측비들은 원망에 사무쳐 있었다······.

경국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조정 대신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그와 황태후는 오랜 시간 모자 관계가 안 좋은 것처럼 연기를 해야 했고, 그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는 이런 일은 감당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감당해 냈다. 전씨 가문의 후손인 그는 조상들의 웅장한 포부와 의지를 물려받아 자신의 역할을 해내야 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의 역할을 제법 잘 해냈고, 어느 사람도 젊은 황제가 결점을 들추어내지 못했다. 그는 상삼호가 비 내리는 밤에 심중을 살해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뿐만 아니라 은연중에 그렇게 되도록 부추겼으며, 심씨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고 금의위가 황실의 통제를 받도록 만들었다.

또 상삼호를 연금해 기세를 꺾은 뒤 남쪽으로 보내 경국 군대의 기세를 누르도록 했다. 그는 안에서는 기강을 새로 잡으면서 밖으로는 범한과 협력했다.

그가 한 건 한 건 차분히 진행한 계획 덕분에······ 지난 2년 동안 북제 조정은 질서정연하게 바뀌었고, 더욱이 강남 일은 젊은 황제의 생각이 깊고 주도면밀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줬다.

강남 황실 금고의 담당자가 범한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몰래 이익을 취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그는 범한을 통해 북제가 이처럼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그가 손으로 난간을 가볍게 치면서 산골짜기에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무얼 위해 그리 한 걸까? 무얼 위해 짐에게 이처럼 많은 이익을 안겨준 것일까?”

그의 입가에 차가운 자조가 섞인 미소가 걸렸다.

“경국 황제의 사생아는······ 아비와 얼마나 다르려나?”

북제 황제가 제대로 된 황제가 되기 위해 살아 있는 본보기로 삼을 수 있었던 대상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경국 황제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경국 황제가 웅장한 포부와 야심을 가지고 있으며 인내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늙을 테지, 게다가 지금도 젊은 건 아니지 않은가······.”

북제 황제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돌려 멀리 남쪽을 바라봤다. 그가 최근에 경국 경도 황궁에서 소란이 있었다는 소식을 떠올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과거 대위를 분열시키고 북제가 겨우 명맥만 연명하도록 만든 용맹한 군주도 세월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지. 그리고 늙으면 사람은 모두 고리타분해지는 법이야. 짐이 당신을 몰아내는 그 날까지 계속 음흉하고 고리타분하게 변해갔으면 좋겠군.”

이 말은 역사의 세세한 부분에 대한 탄식이자 자신감을 돋우기 위한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인정하듯이 경국 황제는 민감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기는 했다. 하지만 역사는 항상 승리자를 중심으로 기록되었고, 지난 30년의 역사는 경국 황제가 천하의 유일한 승리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젊은 북제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달싹이며 자신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짐이 당당하게 천하 무대에서 당신을 무찌르는 날까지 살아 있기를 바라네.”

북제 황제가 범한을 이해하지 못하듯 범한 역시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제왕의 신분에 있는 이상 그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색깔이든 먼저 황위와 천하를 고려해야 했다.

만약 범한과 계속해서 상부상조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북제 황제는 예를 들면 해당이나 범약약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모든 대가를 치러서라도 범한의 요구를 만족시켜주고 싶었다.

그리고 만일 범한이 북제를 위협하는 날이 온다면 북제 황제는 모든 힘을 동원해 범한을 제거해 버릴 것이었다.

감정과 무관하고 국적과도 무관하며 남녀 관계와도 무관했다.

이 세계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남자, 여자, 그리고 황제.

* * *

정자 아래 계곡에 흐르는 물은 궁전 옆 산자락을 따라 아래로 흘러가 산 아래 연못에 모였다. 이 연못 서쪽에는 흰색 돌에 작은 틈이 있어 그곳을 통해 맑은 물을 콸콸 쏟아졌지만, 연못에는 어떠한 물결도 일지 않았다.

지금 연못 뒤에 있는 숲속에서는 태감과 궁녀가 고개를 숙이고 숨을 죽인 채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황제 폐하가 지금 산허리에 있는 정자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는 건 몰랐지만 북제에서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 가장 존귀한 두 사람이 연못 옆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는 건 알았다.

베옷을 입고 삿갓을 쓴 채 맨발을 한 고행자 차림의 고하 국사는 지금 연못 옆 바위 위에 정좌하고 앉아 낚싯대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의 입지를 안정적으로 다져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력을 쏟고, 권력에 눈이 멀어 조정을 어지럽히는 여인이라는 오명까지 감수해야 했던 북제 황태후가 그 옆에 있었다. 고하 대사 옆에 있는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과거 천하가 혼란에 휩싸였을 때 전씨 집안은 자신들이 가진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이후 계속되는 전란 속에서 황실은 경국 황제의 피도 눈물도 없는 공세 속에서 용맹한 장수들을 잃어야 했고, 전씨 황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황궁에는 결국 그녀와 어린 황제만 남게 되었다.

그때 경국 진평평이 밀정을 활용해 북제 조정을 동요시켰고 왕공 귀족들이 흔들리면서 황궁 안은 한치도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용상을 지키도록 했다.

물론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지금 그녀의 옆에 있는 고하 국사의 강경한 태도 덕분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사건은 황태후가 겉보기처럼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설명해 주기도 했다.

고하 국사가 자신의 눈처럼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았다.

황태후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지난 1여 년 동안 상경성에서 일어난 변화를 떠올렸다. 과거 황궁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녀는 장영후에게 몰래 궁에서 빠져나가게 해서 심중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고, 심중과 금의위는 엄청난 공을 세웠었다. 하지만 이후 성장한 황제는 심중이 계속 제멋대로 구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황태후는 심중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황제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일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쇠심줄 같은 전씨 집안사람들의 고집을 다른 사람이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예를 들면 그녀의 자식이나 지금 그녀의 곁에 있는 이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계속해서 노력했다. 왜냐하면 어젯밤에 북제 황제가 그녀와 함께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면서 이 일이 생각했던 것처럼 좋아 보이지 않으니 자신을 대신해 고하 국사를 설득해 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고하 국사를 만나러 연못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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