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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47화 (647/1,108)

647화 산속 범씨 집안 아가씨와 편지 (2)

범약약이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

“왕 대인이 보낸 사람이 편지를 가져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저께서 가져오셨군요.”

해당타타가 양손을 옷 속에 넣은 채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왔다.

“왕계년은 돌아오지 않았어. 범한에게 못 들은 건가? 지금 상경성에는 등자월이 있는데. 너도 만나 봤을 거 아냐?”

범약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항상 침착한 너를 울리다니. 편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 궁금한데.”

범약약이 손가락으로 편지를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사저, 놀리지 마세요. 그냥 오라버니가······ 평상시에 하는 말들이 적혀 있었어요.”

해당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

범약약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저께서는 왜 상경성으로 가지 않고 산으로 돌아오신 거예요?”

해당타타가 단순히 범한의 편지를 범약약에게 전하기 위해 산으로 돌아온 건 아닐 터였다. 그녀가 범약약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스승님께서는 이사형의 편지를 받으시고는 네가 이제 산에서 내려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 나보고 너를 상경성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신 걸 보면.”

“상경성에 간다고요?”

범약약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 배우지 못한 것들이 많은데요.”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랑 같이 가자.”

해당이 타이르듯 말했다.

“이곳 산중 생활이 좋으면 다시 돌아와도 돼.”

“사저도 산중 생활을 좋아하시잖아요?”

범약약이 웃으며 말했다.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은 전혀 건들지 않고 그대로 두었으니까 우리 함께 지내요.”

이 말을 들은 해당타타가 한참 말이 없다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돌아오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걸.”

범약약은 해당 사저가 은밀하게 오라버니와 함께 무슨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범한이 두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덕분에 그녀는 해당과 줄곧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비교적 편하게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매번 멀리 경국에 있는 형수 임완아가 신경이 쓰여서······ 범약약은 일부러 해당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녀가 해당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런데 상경성에서······ 저를 보고 싶어 한다는 사람이 누구죠?”

“폐하.”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던 해당타타가 속으로 폐하의 마음도 범한만큼 추측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 * *

천일도 문파가 자리한 푸른 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상경성 안에는 검은색과 청색이 어우러진 황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천하 북방의 주인인 북제 황제 폐하가 낮은 평상에 앉아 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젊은 황제가 한숨을 쉬며 미녀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리리, 짐은 도무지 생각이 안 나서 그러는데······ 작년 여름날에 우리가 뭘 했는지 알아?”

“작년 여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사리리가 머리를 들면서 약간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범한이 해당타타에게 보낸 편지를 읽은 뒤 젊은 북제 황제와 그의 곁에 있는 두 명의 여자들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작년 여름에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편지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적나라하게 쓰인 그 말은 경고 같기도 했고, 위협 같기도 해서 북제 쪽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로 범한이 이렇게 화가 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당연히 이 모든 원인이 범한이 햇수 계산을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걸 몰랐다. 그는 본래 북쪽 여자들에게 작은 사당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걸 경고할 생각이었다.

젊은 북제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작년에 짐이 왕계년의 손을 통해 좋은 검을 하나 보내 주었는데, 설마 이 일을 알아챈 것일까? 짐에게 고마워하지 않는 건 그렇다 치지만 어째서 편지를 보내 작은 사고를 위협하는 거지?”

“대위 천자의 검 말입니까?”

사리리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아름다움을 사방에 발산했다.

“자식을 낳기 위한 검이지요.”

사리리의 장난기 어린 농담에도 북제 황제는 여전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사리리는 자신이 너무 버릇이 없었다는 걸 깨닫고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옆에 앉았다.

젊은 북제 황제가 천천히 일어나 앉더니 양손으로 관자놀이 뒤에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정돈하며 말했다.

“이건 둘째 치고 범사철이 오늘 저녁 연회를 연다고 하던데 짐이 위화를 대신 보내도 괜찮겠지?”

“폐하는 참 슬기로우십니다.”

사리리가 잠시 고민하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범씨 집안 둘째 아들이 상경성에 묶여 있으니 범한도 남쪽에서 얌전히 행동할 겁니다. 설사 그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아우와 누이를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약약 사고도 오늘 당연히 와야 하는데 말이야.”

젊은 북제 황제가 소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자네의 말은 맞지 않아. 우리가 범씨 집안 자녀들의 상경성에 잡아두고 범한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 범한이 자기 누이와 아우를 이곳에 보내 놓고 우리에게 보모 역할을 하게 하는 거네.”

황제가 콧방귀를 뀌면서 계속 말했다.

“범한이 어떤 인물인가? 자기 누이와 아우를 이곳에 보냈다는 건 우리가 그 둘을 인질로 삼을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이전에 황궁에서 봤을 때는 온화한 사람으로만 보여서 음흉한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사리리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제 말은 두 사람을 인질로 삼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범약약과 범사철이 북제에서 잘 지내면 범한도 만족할 것 아닙니까. 그럼 나중에라도······ 투항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북제 황제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경국에서 승승장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운예까지 세력을 잃어 자신을 건들 사람도 사라졌는데 그가 손에 있는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짐에게 오겠는가······. 그의 이러한 계획들을 보면 그는 경국 황제만큼 의심이 많고 민감한 사람이네. 그래서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자기 가족들이 화를 피할 곳으로 북제를 이용할 생각인 거야.”

그가 탄식하며 계속 말했다.

“경국 강남에 황실 금고가 있는 이상 짐은 그의 도움이 필요하네. 그래서 그가 짐을 이용한다는 걸 알면서도 응해줄 수밖에 없었던 거지.”

지난 1년여 동안 북제 황제와 범한은 하명기와 범사철이 운영하는 최씨 집안의 노선을 통해 밀수를 진행했고, 덕분에 양측 모두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또 일은 경국 황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아주 은밀하게 진행되어 설사 조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가장 윗선이 누구인지 밝혀낼 수는 없을 거였다.

이처럼······ 양측은 이미 하나로 묶여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기에 범한은 안심하고 자신의 아우와 누이를 북제로 보내 머물게 했다.

그러니 그의 말을 틀리지 않았다. 현재 북제의 젊은 황제는 범한이 찾은 좋은 보모였다.

게다가 범한은 지금 이미 작은 사원에서 있었던 일을 알아차렸으니 젊은 북제 황제를 이용하는 건 더 염치없는 일이었다.

“범한은 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려는 걸까요?”

사리라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경국이 자신이 오래 머물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짐이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도 그거야.”

젊은 북제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범한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경국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사람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설마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경국 황제를 배신할 생각을 품고 있는 걸까?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있던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와 함께 상경했던 때를 아직도 기억하지?”

사리리가 멍한 표정으로 범한과 함께 북쪽으로 올라오던 때를 떠올리고는 아무 말 없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젊은 북제 황제가 큰 소리로 웃었다. 약간은 질투심이 섞인 웃음소리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사리리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리리, 짐은······ 네가 짐과 함께 있으면서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사리리가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젊은 북제 황제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가 속으로 사리리가 갈수록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손을 거두었다.

“네가 이전에 북으로 돌아오는 길에 범한이 해독을 해줬다고 말했잖아······. 그러니 범한이 너와 짐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가 이익을 위해 짐과 협력을 하기로 한 건 나중의 일이야. 그러니 그는 협력하기 이전부터 짐이 죽는 걸 원치 않았던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어······ 게다가 지금은 빠져나갈 구멍까지 북제에 만들어 두었지.”

그가 잔뜩 인상을 구기며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범한은······ 자신이 경국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사리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근심이 깃든 폐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범한이 상경성에 있었을 때 이미 자신의 체내에 있는 독이 폐하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황비가 되어서 젊은 북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게다가 몇몇 사람들과는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깊은 황궁 안에서는······ 경국 감찰원의 위협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범한의 통제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쪽에 있는 청년의 온화한 미소를 떠올릴 때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그를 위해 많은 것들을 숨기고 싶었다.

넓은 안목을 지닌 황제 폐하가 훗날 이 사실을 안다면 무척이나 화를 낼 텐데도 말이다.

“경국은 우리의 가장 큰 적이야.”

젊은 북제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짐은 경국 백성들이 마음이 야수처럼 잔혹하다는 걸 알고 있네. 그리고 범한이 과거 섭가 일로 인해서 경국 황제에게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가 경국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그런데, 그는 왜 짐에게······ 아니 이 나라에 이득을 안겨 주려는 걸까? 설마 북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경국의 위협이 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이 말을 들은 사리리는 장난칠 생각을 거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경국 황족의 후예이지만 지금의 경국 황족들에게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제로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달랐다. 그는 경국 황제의 사생아였고, 경국 황제는 그를 감시하고 통제하려 하면서도 3년 만에 경국 최고 권신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몰래 북제와 거래하는 것일까?

‘나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지······.’

사리리가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생각했다. 범한은 자신이나 해당이나 북제 황제 폐하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었다. 그가 여색을 밝히는 사람인 건 맞았지만 여자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바꿀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자신이······ 정말 경국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러는 게······.”

사리리가 말꼬리를 늘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자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북제 황제가 눈을 반짝이다가 순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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