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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44화 (644/1,108)

644화 구덩이 (2)

봄기운이 완연한 동이성은 해안가에 자리 잡고 있어 어디에서나 짜고 습한 바다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바다에서는 항상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래서 동이성 사람들은 봄기운에 마음이 설레거나 하지 않았다.

동이성 가운데에는 성주의 저택이 상당히 넓은 토지를 점유한 채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성주는 이곳에서 성을 통치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무를 처리했다.

동이성은 상업이 번영한 큰 성인만큼 정무도 대부분 상업과 관련된 일들이었고 치안과 관련된 문제들은 어쩌다 한번 생길 뿐이었다. 왜냐하면 9품 고수가 가장 많은 이곳에 쳐들어올 해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젊었을 때 왕계년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동이성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동이성의 존망을 결정하는 곳은 성 가운데에 있는 성주의 저택이 아니라 성 밖에 있는 오두막이었다.

오두막은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모양을 하고 있었고, 더욱 이상한 점은 입구가 길이 아니라 뒤에 큰 산 쪽으로 있는 점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곳에 들어오려 한다면 산 뒤로 돌아가서 산길을 따라 내려와야 했다.

소문에는 이것이 사고검이 방문객을 판단하는 단순한 방법이라 했다.

오목하게 들어간 가운데 부분은 큰 구덩이였는데, 그 안에는 과거 사고검에게 도전했거나 사고검에게 가르침을 청한 고수들이 남긴 검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대종사를 이기고 오두막에서 나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구덩이가 차츰 채워질 무렵 대종사에게 도전하는 유행도 사라졌다. 사고검에게 도전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할 멍청이들은 이미······ 구덩이 안에서 죽은 뒤라 사고검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이 바로 천하 무예가들이 숭배하는 성지인······ 검려였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이곳을 검의 무덤이란 뜻의 검총(劍冢)이라고도 불렀다.

아름다우면서 경지가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사고검은 자신이 거주하는 무예가들의 성지인 이곳을 검의 구덩이란 뜻의 검갱(劍坑)이라 불렀다.

“이건 구덩이야.”

오두막 안에서 상당히 젊은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경국 황제 놈과 미친 이운예는 나를 정말 백치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오두막 밖에서 명성이 자자한 일대 검술의 대가 운지란이 돌계단 위에서 무릎을 꿇고 그 목소리를 경청하고 있었다.

오두막 안 사람이 오만함에 가까운 우쭐거리는 목소리로 경국 황제와 장 공주를 비꼬며 말했다.

“유폐라고? 바보나 믿을 말이지. 지난 십여 년 동안 손을 맞춰온 두 사람이 인제 와서 사이가 틀어졌다는 건가? 사이가 틀어졌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경국 조정에서 말한 이유는 이유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이지 않은가?”

운지란은 딱딱한 바닥에 꿇고 있다 보니 무릎이 아팠다. 그의 스승은 자문자답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제자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었다. 그가 슬며시 일어나 아픈 무릎을 문지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스승은 평상시에는 ‘터무니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사람을 굴복시키는 인내심과 세심함을 가지고 있었고, 작은 사제와 같은 신묘한 계책을 부릴 줄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스승의 말은 터무니없었다. 설마 경국 경도에서 발생한 일이 단순히 경국 황제와 장 공주가 할 일이 없어 황실 체면이 손상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천하 사람들을 상대로 연극을 한다는 걸까?

운지란은 절대 이 점을 믿을 수 없었기에 몇 마디 말로 자신의 의견을 표시했다.

검려 안에 대종사는 자신의 판단에 문제가 있다는 걸 느꼈는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경국 사람, 특히 경국 황실은 천하에서 가장 비열하고 후안무치하고 더럽고 저질적이며 겉과 속이 달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경국 황실에 균열이 생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경국이 또 자신에게 어떤 누명을 씌우려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 화가 나고 우울해지자 밖에 운지란의 말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사고검의 수제자인 운지란은 장 공주의 요청을 받아 두 차례 경도로 내려갔지만 모두 실패하고 돌아와야 했다. 이후 그는 스승의 뜻을 대표해 동이성 성주와 협동하고 성지 및 주변 소국의 안녕을 유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정무 분야에서 그는 백치라 불리는 사고검보다 훨씬 유능했고, 이에 경국 경도에서 일이 발생하자 동이성이 기회가 생겼음을 민감하게 감지해 냈다.

만약 이 기회를 잡을 수만 있다면 동이성의 최대 위협을 없앨 수 있었고, 더는 담장에 기대선 나무처럼 경국 권력자들 사이를 맴돌며 희생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다.

더욱이 장 공주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로 판단에 확신이 생긴 그는 여러 차례 스승을 설득했다.

오두막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사고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함정일 수도 있지 않으냐?”

운지란은 겉으로는 알았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오두막에 있는 위대한 검객이자 백치 대종사가 경국의 검은 속내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리고 또 그가 모르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동이성이 경국 내부 갈등을 이용하고 싶어도 그런 기회는 외부에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경국 내부에서 만들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고검이나 고하는 경국 외부에 뿌리를 내린 거목이었기에 함부로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거나 아무렇게나 부는 바람에 춤을 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단 방향을 정하면 다시 돌이키고 싶어도 쉽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 지켜봐야 한다. 경국 사람은 언제든 수작을 부릴 놈들이니까.”

오두막에서 다시 울린 목소리가 운지란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다만 그는 제자에게 자신이 경도에 있는 어떤 사람이 어떤 경로를 통해 보낸 중요한 정보를 받아 지금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스승님.”

대답하고 성주부와 상의하러 가려던 운지란이 갑자기 무슨 일이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경국 장 공주가 세력을 잃었으니 범한은 안전해진 셈이 아닙니까? 작은 사제의 신분이 발각되지 않도록 다시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이성 사고검의 마지막 제자인 푸른 깃발을 든 왕 십삼랑은 줄곧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운지란을 포함한 내부 사람들은 스승에게 엄청나게 아끼는 어린 제자가 있다는 걸 알았을 뿐 안으로 들어가 얼굴을 볼 기회는 없었다.

그래서 명씨 집안을 위해 초상전장에 침입했을 때 운지란은 비로소 처음으로 그와 마주치게 되었고, 스승이 작은 사제를 범한에게 보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운지란은 스승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고, 더구나 속으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쨌든 경국 조정 내부에 있는 범씨 성을 가진 그 청년은 동이성의 가장 큰 적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동이성이 추진한 일 중 많은 일이 그 청년 때문에 무산되었고, 또 많은 동이성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다.

운지란 자신도 감찰원에 의해 암살당할 뻔했고, 동이성 고수 자객들은 강남에서 반년 동안 감찰원 6처 검수들과 유격전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범한에 대한 스승의 태도가 변한 걸 운지란은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전혀 용납하지 못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

오두막 안에서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범한을 돕는 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야. 범한은 굳이 우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어. 그런데도 내가 그를 도와주려는 건 범한이 우리의 도움을 받아 주는 게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운예는 이미 끝났다. 최소한 황실 금고 일에서만큼은 완전히 끝났다고 볼 수 있지. 우리는 범한이 필요하다. 이미 명씨 집안의 주인이 바뀌었는데도 지난 몇 개월 동안 동이성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게 뭘 뜻하는 줄 아느냐? 그건 범한이 우리의 도움을 받아들여 줬다는 의미이다.”

고개를 숙인 운지란이 조심스럽게 반박했다.

“하지만 저희 노선 중 최소 3할을 범한이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만약 갑자기 마음을 바꾼다면 대응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가 뭣 하러 마음을 바꾼단 말이냐?”

오두막 안에 있는 사고검의 분석이 다시 예리해지기 시작했다.

“이전에 양측 사이에 작은 싸움이나 마찰이 있기는 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큰 갈등이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충돌들은 모두 이운예 때문에 생긴 게 아니냐. 이운예가 세력을 잃고 유폐되어 나와 범한 사이에 충돌할 이유가 사라졌는데 그가 무엇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을 바꾼단 말이냐?”

운지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스승이 ‘나와 범한 사이에’라고 말한 것은 최소한 겉으로는 범한이라는 청년이 자신과 마주 앉아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는 걸 인정한 셈이었다.

“이전에 이운예와 거래를 했듯이 이제는 범한과 거래를 하면 되는 거다.”

오두막 안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경국 조정과 민간에서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내가 경국 황제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 두 가지를······ 분명히 기억해 두어라. 경국은 범한이 아니고, 그는 경국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손해 볼 이유가 없다.”

운지란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스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범한이 있었다면 분명 오두막 안에 있는 사람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백치 대종사의 영리함에 감탄했을 것이었다······.

“일이 발생하기 전에 내가 그 애를 범한에게 보낸 것은 태도를 보여준 것이었다.”

오두막 안에서 잠시 끊겼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태도는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애가 하기에 달려 있지만······.”

운지란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스승님께서는 단지 동이성의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 베일에 감춰진 작은 사제를 범한에게 보냈다는 말인가?’

“물론 내가 그 애를 경국에 보낸 다른 이유도 있지.”

운지란 자신이 어떤 비밀을 듣게 될 거란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후 귀에 들어오는 말에 한참 넋 잃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확실히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아무 일 없는 게 이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과거 북제 황실에 반란이 일어났음에도 북제 황태후와 황제가 용상을 지키고 뿔뿔이 흩어진 북제를 수습해 지금의 모습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고하가 그들의 편에 섰기 때문이지요.”

“두 강대국 사이에 낀 동이성과 제후국들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비굴하게 은전을 갖다 바쳐 목숨을 지켜 달라 호소해야 했지. 동이성과 제후국이 지금까지 목숨 줄을 연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아느냐? 거대한 야심을 가진 경국이 자신들의 강력한 무력을 이용해 동이성을 삼키지 않는 이유를 아느냐?”

운지란이 고민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동이성에 스승님이 계시고, 스승님의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 대종사란 어떤 뜻도 없는 이름이지만 사람들을 겁주기에는 좋지.”

오두막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순간 처량하게 들렸다.

“너는······ 고하가 죽고 내가 죽은 뒤 천하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 있느냐?”

운지란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천하 사람들 모두가 그런 상황을 상상해 본 적 있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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