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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43화 (643/1,108)

643화 구덩이 (1)

해가 질 무렵 황금색 노을로 물든 서호의 풍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노을빛 속에서 한 사람이 범한이 있는 호숫가 산언덕 위로 걸어왔다. 손에 푸른 깃발을 든 청년을 바라보던 범한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듣자 하니 최근에 항주성에서 점을 쳐주면서 귀족 아가씨들의 호감을 많이 얻었다고 하더군?”

푸른 깃발을 든 청년은 동이성 사고검의 마지막 제자이자, 범한을 돕기 위해 연신독을 죽인 9품 고수였다. 범한은 이 사람의 존재와 그가 자신을 도와준 사실이 약간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백치 사고검의 생각이 이해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황당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일 자신이 안면몰수하고 배신한다면 사고검은 장 공주와 연소을에게 뭐라고 설명할 생각일까?

왕 십삼랑의 잘생긴 얼굴에 황금색 노을이 비추었다.

“지금 강남 사람들은 저를 대인이 개인적으로 데리고 있는 고수라 생각합니다.”

청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관리들까지도 제 눈치를 보더군요. 더구나 점쳐주는 일은 어디를 가나 돈벌이는 되니까요.”

호수에서 가벼운 산들바람이 불어 산언덕 아래 나무들을 타고 위로 올라왔다. 왕 십삼랑이 든 푸른 깃발이 바람에 흐느적거리면서 ‘철상’ 두 글자가 드러났다.

초상전장이 명씨 집안 지분을 차지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과거 명원에 있던 사람들은 초상전장 대행수 뒤에 서 있던 청년이 작은 범 대인이 전장을 감시하려 심어둔 고수일거라 추측했다.

그러자 강남 일대의 돈이 흠차대인의 심복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자네에게 양갓집 규수를 희롱하는 버릇이 없어 다행이네.”

범한이 웃으며 그의 옆에 섰다. 그를 바라보는 범한의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호숫가 푸른 언덕과 반짝이는 호수 표면, 그리고 황금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던 범한은 자신도 모르게 오래전 담주 절벽에서 가장 친근한 남자와 함께 바다 풍경을 바라보던 때가 떠올랐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남자가 갑자기 어딘가로 떠났듯이 왕 십삼랑도 그러지 않으란 법이 있을까?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왜 계속 왕 십삼랑과 장님 아저씨를 연결해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죽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더욱이 강남의 상황이 안정되니 그가 갈수록 더 생각났다. 그는 오죽이 상처를 잘 치료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심지어 진평평도 오죽이 어디 숨어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지 몰랐다.

‘도대체 얼마나 다쳤길래 1년 넘도록 나타나지 않는 거지?’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왕 십삼랑이 그 모습을 보고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범 대인, 고민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네.”

범한이 망설이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자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네.”

“무슨 일입니까?”

“경국 황태자가 지금 남조로 가고 있는데, 전염병이 창궐하고 길도 위험해서 황태자의 안위가 걱정되네.”

범한이 침착하게 말했다.

왕 십삼랑이 미간을 찌푸리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금군에 감찰원, 경국 호위까지 경호하고 있어 죽었다가 깨어나도 황태자에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 내 뜻을 오해했군.”

왕 십삼랑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나를 대신해서 해독 환약을 가져다주라는 거네.”

호수 표면에 반짝이는 황금빛이 갈수록 짙어지자 범한이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나를 대신해서 황태자가 안전하게끔 보호해 달라는 거네.”

왕 십삼랑의 미간 주름이 더욱더 깊어졌다. 범한이 갑자기 왜 이런 임무를 내리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그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왜 이런 임무를 주시는 겁니까? 경국 경도 상황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장 공주가 유폐되었고 황태자도 세력을 잃었으니 지금 경국 황제 통치 아래에서 대인께 대적할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범한은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기에 그냥 설명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경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왕 십삼랑이 어린아이처럼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 일이 그쪽과 관련 있는 겁니까?”

그가 무의식적으로 ‘그쪽’이라고 말했지만 범한은 ‘흥’ 소리만 낼뿐 화내지 않았다.

“강남에 있는 내가 무슨 수로 경도에까지 손을 뻗을 수 있겠나.”

왕 십삼랑이 잠시 생각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황태자가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은 경국 폐하가 무언가 생각이 있어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범 대인께서는 저에게 황태자를 지키라 하시니 무언가 짐작하시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하지만 제 추측 옳다면 대인께서 이렇게 하시는 건 귀국 폐하와 대적하는 일 아닙니까? 이제 모두가 아는 비밀이 된 제가 대놓고 귀국 폐하에게 맞서는 짓을 했다가 후환이 생길까 걱정되지는 않으십니까?”

“괜찮으니 쓸데없는 추측 같은 건 하지 말게나.”

범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일은 폐하와 무관하네. 그저 완아가 편지에서 부탁하기도 했고, 나도 반은 황족의 일원이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되어서 하려는 것뿐이네.”

왕 십삼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범한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웃지 말게. 이제 보니 바보는 아닌가 보군······.”

왕 십삼랑이 정색하며 물었다.

“제가 언제 바보 같았던 적이 있었습니까?”

“작은 활잡이를 죽였을 때는 바보 같았네. 앞뒤 재지 않고 혈기만 믿고 나대는 자는······ 쉽게 죽는 법이지.”

범한은 이미 왕 십삼랑에게 원대 병영에 침입했던 그 날 밤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은 뒤였다. 이에 왕 십삼랑의 용맹함을 알게 된 그는 연신 감탄하면서도 용사는 쉽게 죽는 법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

왕 십삼랑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대결하는 방법에 익숙합니다.”

그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박장대소하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왕 십삼랑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자네 스승이 자네를 나에게 보낸 이유는 훗날 일어날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네······ 그러니 목숨을 소중히 보존하게나······. 남조 길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몰래 따라가는 게 좋을 거네. 나서지 않을 수 있으면 더 좋네.”

그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를 협박할 생각은 없네만 명씨 집안이 내 손에 들어왔다는 건 황실 금고 행동로 권한이 나에게 있다는 거네. 자네도 최근 두 달 동안 나와 자네 스승의 손발이 잘 맞는다는 걸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를 위해 조금 수고를 해주게나.”

푸른 깃발이 호숫가 버드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이 아무 말 없이 푸른 산언덕 위에 주저앉았다. 아름다운 서호와 존재하지 않는, 존재한 적이 없었던 끊어진 다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만약 지금 내막을 아는 왕계년이 그의 계획을 알았다면 그가 미쳐서 날뛴다고 생각했을 거였다. 하지만 범한은 미쳐서 이런 계획을 세운 게 아니었다. 이전에 그가 황태자를 쓰러뜨리려 했던 것은 황태자가 용상에 오르는 게 자신의 앞날에 좋을 게 없어서였다.

그리고 지금 황태자의 가냘픈 목숨을 지켜주려는 것은 경국 황제에게 골칫거리를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이대로 장 공주와 황태자가 사라지는 건 그와 황제 사이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던 완충재가 사라지는 셈이었고, 그렇다면 황제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곧 권력을 빼앗기게 될 것이었지만 범한은 그보다 진평평과 범건의 안전을 더 걱정했다.

경국 황제는 명성을 아주 중요시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이 점은 이번에 황궁에서 일어나 사건을 통해서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황제는 황족의 추문을 가리기 위해서 수백 명에 달하는 태감과 궁녀들을 단숨에 죽였을 뿐만 아니라 오래전 동해 섬에서 일어난 해적 몰살 사건과 언빙운을 북제에 팔아넘긴 사건을 공개했다.

이런 사건들은 장 공주가 실각하는 데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서 자신은 명성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는 걸 원치 않으며 이번 일은 황족의 추문이 아닌 장 공주의 추문일 뿐이라는 점을 에둘러 표현했다.

그런 점에서 황제는 황태자를 폐위시키는 일에서도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지난 2년 동안 조용히 분수에 맞게 행동한 황태자에게 마땅히 폐위시킬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남조로 내려가는 길에는 분명 여러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었고, 범한은 왕 십삼랑이라는 변수를 보내 그런 일들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했다.

범한은 황태자의 자리를 지켜주는 바보 같은 짓은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저 황제에게 약간의 골칫거리를 안겨줘서 황제가 자신이나 초상전장, 그리고 자신의 뒤를 지켜주는 두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하려는 거였다.

범한은 오죽 아저씨를 많이 그리워했다. 그는 경국에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걸 알았다.

만약 그에게 자신 말고 지켜야 할 사람이 없었다면 두려워하거나 걱정해야 할 이유도 없으므로 황제와 사이가 틀어지든 말든 황성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려줬을 거였다.

2 황자나 영리한 사람들이 보기에 범한이 가진 모든 것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 점을 범한 역시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황제의 권력을 숭배했고, 그건 감찰원이나 계년조, 경도 감찰원을 지키고 있는 작은 언 공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황제의 명령이라면 이들은 범한과 대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황제가 교지를 내려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빼앗는다고 하더라도 두렵지 않았고, 2 황자의 말에 설득당할 생각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멈춘 지 오래된 다른 세계 사람으로서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황제의 권력이니 하는 것들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일곱째 섭 대행수와 함께 황실 금고 공예 과정을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 살인에 남다른 자질을 가진 9품 고수였다.

더구나 그에게는 상자가 있었고, 황제 정부와 오죽 아저씨도 있었다.

푸른 산언덕에 앉아 하늘 위 붉게 물든 구름을 바라보던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황성에 엿을 날릴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하겠는데!’

* * *

경국은 현재 가장 강한 나라였다. 이에 장 공주 이운예는 십여 년 동안 경국 황제 뒤에 숨어서 많은 일을 실행하면서 암암리에 두 거대 세력을 상대로 여러 음모를 진행했다.

예를 들면 북제와 동이성 자객이 범 시랑의 사생아를 암살하려 했다는 핑계로 다시 전쟁을 일으켜 북제 영토를 빼앗아 오거나 언빙운을 북제에 판 뒤 소은과 교환을 하면서 북제 조정에 큰 혼란을 일으켜 황제와 황태후를 충돌하게 한 일 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있음에도 북제 황태후이나 동이성 사고검은 장 공주와 줄곧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심지어 황실 금고 일에서 여러 협상을 진행했다.

이 외국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알 필요도 없었다. 장 공주가 갑자기 유폐된 일은 천하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사람들은 곧이어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동했다. 예를 들면 범한의 경우 자신의 관심과 전략 중심을 천자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북제와 동이성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판단을 내놓았다.

동이성에 있는 그 대종사는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마지막 제자를 범한에게 보냈지만 범한이 다시 그 제자를 다른 사람의 경호원으로 보냈다는 건 몰랐다.

물론 알았다고 해도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장 공주가 유폐 당한 일에 쏠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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