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642화 (642/1,108)

642화 한숨

“늙은이의 하찮은 인정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다니.”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 말은 황제가 마지막에 손을 놓은 걸 푸념하는 것이자 그의 마음속에 있는 의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장 공주는 어째서 조금의 반격도 하지 않아 황제가 쉽게 손을 거둘 수 있게 한 것일까? 그는 진 원장 대인이 직접 궁 밖에 상황을 지휘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건······ 장모의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제가 대인에게 장 공주가 폐하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지만······.”

범한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이 정도로 빠져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폐하가 제대로 움직이기도 전에 알아서 꽁무니를 빼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 겁니까?”

그의 옆에 서 있던 왕계년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담이 크고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지내는 집안에서 이런 대역무도한 말을 할 수 있는 관리는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서슴없이 왕계년 앞에서 이런 말을 내뱉었고, 심지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왕계년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마른기침을 했다. 그는 작은 범 대인이 자신의 앞에서 대역무도한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건 자신의 생사와 부귀가 그의 손에 달려 있어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황족의 추문을 까발려 폐하가 움직이도록 만든 계획은 범한와 왕계년 두 사람이 세운 것이었다. 워낙 중차대한 일이었기 때문에 계년조 다른 구성원들은 이 계획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언빙운 또한 전혀 알지 못했다.

다행히 강남은 경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범한과 왕계년이 세운 조치들은 2개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누구도 이 일이 두 사람과 관련 있다고 추측하지 못할 거였다.

홍죽이 갑자기 자신이나 동료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입을 열지 않는다면 말이다.

“감찰원 보고에 언급된 몇몇 일들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음에도 왕계년은 아직도 이런 일을 대화하는 게 익숙하지가 않았다. 이에 감찰원 보고서 몇몇 부분들을 가리키며 애써 화제를 돌렸다.

“회춘당에서 불이 난 일과 황실 외척이 낙마한 일, 그리고 태의가 급병으로 사망한 일은······ 뭔가 수상합니다.”

“그렇죠?”

범한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감찰원 보고서에 세 가지 사건이 연관되어 있다고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황궁에서 그 안에 담긴 내막을 알려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세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잘 알고 있었고, 사건이 발생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설마 대인께서는 장 공주와 황태자가 입막음을 하려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마 약일 겁니다. 약은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지요.”

왕계년의 이마 주름이 더 깊어졌다.

“장 공주와 황태자는 황궁에서 조사하는 와중에 이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저는 이 점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이들을 살려둔 것은 폐하가 신문할 증인을 남겨두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범한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폐하는 어째서 심문도 하지 않고도 그 일을 확신하신 걸까요?”

“그리고.”

그가 종이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했다.

“황궁 조사에서는 아무런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고, 장 공주도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이 세 사건은 도대체 누가 한 거란 말입니까?”

범한이 찜찜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세 사람은 살아 있는 것보다는 죽는 게 더 나았다. 그러니 이 부분은 그가 처음 계획을 세웠을 때 실수한 부분인 건 확실했다······. 다만 상황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 폐하가 심문을 하지 않고도 자신의 추측만으로 최후의 결단을 할 수 있게 한 사람은 과인 누구인 걸까?

경도에 있을 때 그와 왕게년은 어떤 세력이 자신들과 비슷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사전에 계획이 누설될까 두려워 조사하지 않았었다.

“다른 제삼자는 아닐 겁니다.”

왕계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범한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우리 쪽 그분일 겁니다.”

* * *

“황태자 저하가 남조로 떠났으니······.”

서재에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범한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고민을 꺼내 놨다.

“시간을 계산해보면 지금쯤이면 영주를 지나 계속 남쪽으로 가고 있겠군. 대인이 보기에 폐하 계획이 뭔 것 같습니까? 조정의 대신들이야 장 공주의 일로 인해 황태자가 화를 입은 이유를 알지 못하겠지만 저와 대인은 알지 않습니까. 폐하는 황족에게 수치를 안겨준 아들에게 절대 용상을 물려주지 않을 겁니다. 조문을 위해 남조로 간 승건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왕계년은 이 질문에 대해 감히 대답할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범한이 그런 그를 웃으며 바라봤다.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는 일도 했으니 이런 내용도 의논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왕계년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봤을 때 이번 남조 행차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싶어 하신들 바로 하실 수는 없으니까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범한이 책상을 가볍게 치며 대답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영민하시고 위풍당당하시어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실 우리 폐하께서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이번 일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지 않도록 하실 겁니다. 그러니 이번에 황태자가 남조로 간 것은 첫째 황태자가 없는 경도에서 천천히 폐위 일을 계획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

말을 하다 말고 그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남조는 날씨가 더워서 전염병이 창궐하는 곳이었다. 7, 8년 전에 연소을이 군대를 이끌고 남쪽 토벌에 나섰을 때도 병사들이 대부분이 전염병 때문에 사망했었다.

“전염병에 걸려 황태자의 몸이 점점 약해지면······.”

왕계년이 무의식중에 이 말을 내뱉고는 자신의 말에 점점 겁이 없어진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범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대인과 제 추측이 맞는다면 폐하는······ 정말 무서운 분이십니다.”

이 말을 내뱉는 범한의 눈빛에 여러 복잡한 감정이 담겼지만 왕계년은 알아채지 못했다.

“완전하게 성공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범한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대인은 장 공주가 죽지 않은 이유가 뭐라 생각하십니까?”

범한이 오늘 두 번째로 장 공주가 죽지 않은 사실에 안타까워하자 왕계년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범한은 장 공주의 사위인 만큼 인륜적으로 봤을 때 그녀가 세력을 잃은 사실에 안타까워하는 게 더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왕계년은 범한이 경도에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장 공주를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범한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음모와 권모술수로 장 공주와 힘을 겨룰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범한은 미친 사람이라 불리는 장 공주가 어떤 광적인 반응을 할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범한은 이런 불확실성이 가장 싫었다.

더욱이 그는 이번에 경도 황궁의 일로 모든 게 마침내 끝났다고 안도할 수 없었다.

장 공주는 사지에 몰렸으면서도 왜 자신이 가진 힘을 동원해 최후의 반격을 하지 않은 것일까?

군대 원로는 왜 나서지 않았을까?

연소을은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을까?

만약 일이 너무 빠르게 진행돼서 군대 측이 미처 반응할 시간이 없었다면······ 섭류운은 왜 나서지 않은 것인가?

범한은 섭류운이 군산회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그래서 소주성에 나타나 포월루를 부수면서까지 주 집사를 데려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군산회가 아무리 느슨한 조직이라 하지만, 그래도 장 공주가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왕계년에게 장 공주가 황제를 광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자신을 설득할 핑계일 뿐이었지 정말로 그렇다고 믿지는 않았다.

다만 몇몇 세상일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게 진정한 원인인 경우도 있었다.

책상 옆에서 범한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왕계년이 나가는 와중에도 그는 한숨을 멈추지 않았다. 방문을 닫던 왕계년이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장 공주가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세력을 잃었으니 앞으로 조정에서 제사 대인과 대적할 사람이 없을 것인데.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고도 제사 대인은 어째서 저리 한숨을 쉬시는 걸까?’

사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범한은 충성스러운 신하도 아니었고 성실한 신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강남에서 범과 학이 싸우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는 장 공주가 무너지기를 바랐지만, 황제를 믿지도 않았다. 그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황제의 방법이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고 강렬한 데다가 황제의 힘은 이 일을 계기로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혼자 서재에 남은 범한은 경도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자세히 분석했다. 그는 장 공주의 광적인 성격상 일부러 황제 폐하가 화를 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황제가 장 공주를 살려둔 이유는 무엇일까? 가족간의 정 때문에?’

범한은 황제에게 그런 감정이 있을 거라 믿지 않았다.

감찰원 보고서 아래 있는 편지들을 다시 펼쳐 읽어본 범한이 잠시 고민하다가 답신을 쓰기 시작했다. 편지는 모두 경도 집에서 아버지와 임완아가 보낸 것들로 사사와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건강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임완아의 편지에는 장 공주의 일도 언급이 되어 있었다. 비록 자세한 말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범한이 황궁에 무언가를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범한이 다시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임완아는 보기 드물게 영리한 사람이므로 모든 게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이번 일을 범한이 중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편지에서 이 일을 언급한 것은 임완아가 장 공주에게 모녀의 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건 자식으로서 무척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황제도 냉혈한이었고 범한도 냉혈한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든 황족들이 냉혈한인 건 아니니 말이다.

범한이 진지하게 답신을 썼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자신이 의심하는 부분을 적었고, 임완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주로 위로하는 말과 함께 사사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이어서 상주문을 쓰기 시작했다. 황제에게 보내는 기밀 상주문이었다. 상주문에서 직접적으로 장 공주를 용서해 달라고 적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사람이라면 인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상주문을 여러 차례 읽어본 그는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황제가 자신의 위선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황제의 화도 돋우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편지를 봉합한 뒤 부하들에게 1급 우편로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범한은 모든 일이 끝나자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몇 달 동안 겉으로는 강남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보내는 척하면서, 뒤로는 경도를 상황을 주시하는 데 온 신경을 쏟는 바람에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다.

일이 완벽하게 끝나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생각한 대로 진행되었기에 범한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잠겨 있던 서랍을 열고 안에 있는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와 일곱째 섭 대행수와 1년 넘게 공들여 기록한 황실 금고 3대 작업장 공예 과정이 적힌 종이였다.

황실 금고의 모든 공예 과정이 다 적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것이 만약 북제에 흘러 들어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파장이 생길 거라는 건 분명했다.

그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일은 세세한 국면에서 보면 자신과 진평평이 무의식적으로 합작해 황제를 움직인 일처럼 보였지만 큰 국면에서 보면 황제가 자신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었다.

‘왕 십삼랑이 한가하게 지낸 지도 오래되었지.’

이런 생각을 하며 일어난 범한은 모든 걸 정리하고 서호 장원을 떠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