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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41화 (641/1,108)

641화 흐름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황궁 안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게 이상하기는 했지만, 겁을 먹은 태부들은 황태자에게 고의인지 아닌지 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핑계로 황태자가 국사를 들으러 어서방에 가지 않아도 아무도 그 속에 어떤 음모가 숨겨져 있을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황실 별궁은 임완아가 혼인하기 전에 머물렀던 곳으로 범한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담을 넘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아마 지금 그가 다시 담을 넘으려 한다면 분명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가 될 터였다.

별궁 주변 경호는 물샐틈없이 삼엄했다. 별궁 주변 거리는 이미 폐쇄되었고, 감찰원은 밖에서 엄격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장 공주가 건강이 좋지 않아 별궁에서 요양 중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폐하가 장 공주를 이곳에 유폐시키고 감찰원을 시켜 모기 한 마리도 날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삼엄한 경비를 서게 했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유폐 생활은 얼마나 오래갈까?

호위병의 보호를 받으며 마차 한 대가 동쪽에서부터 다가왔다. 마차 주인은 입궁했으나 아무런 소식도 얻지 못해 위험을 무릅쓰고 서성의 황실 별궁에 찾아온 것이었다.

마차를 몰고 있는 사람은 등자경이었고 마차에는 범씨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지만, 거리 절반쯤 왔을 때 누군가가 막아섰다.

마차 발이 걷히자 피곤함과 슬픔이 섞인 임완아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입궁해서 황후는 만나지 못했지만, 황태후는 만날 수 있었다.

황태후는 임완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황궁 안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통해서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걸 확신했다.

별궁 안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갇혀 있었다.

임완아는 불길한 예감에 더는 참을 수가 없이 이곳까지 찾아온 거였다. 그녀는 지금 어머니를 못 본다면 영영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저렇게 유폐된 채 몇 년을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부인 폐하께서 아무도 마마의 휴식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감찰원 관리가 차분히 설득했다.

“정 그러시면 폐하께 직접 청을 올려 보십시오.”

범씨 가문의 마차가 왔는데도 들여보내 주지 않자 임완아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알겠네.”

한시름 놓은 감찰원 관리가 재빨리 감사 인사를 올렸다. 만약 다른 대신이나 귀인들이 장 공주를 보러 왔다면 감찰원 관리들은 몽둥이를 들고 거칠게 내쫓았을 거였다. 하지만 지금 마차에 탄 여자는 장 공주의 친딸이었고, 더욱이 감찰원 제사 대인의 아내였다.

이러한 신분 때문에 감찰원 관리들은 조금이라도 예의 없게 행동할 수 없었다.

임완아는 상대방의 감사 인사가 들리지 않는 듯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멀리 보이는 익숙한 별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어뜨리며 속으로 어머니의 안녕과 행복을 빌었다.

* * *

장 공주가 유폐된 사실은 조정과 민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장 공주가 10여 년 동안 경국 조정에 암암리에 뻗쳐온 영향력과 그녀와 그녀 주변 사람들의 조정과 민간을 통제하는 능력을 무시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장 공주가 죽지 않는 이상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폐하가 신속하게 장 공주 세력을 제거해 제왕의 통제력이 여전히 뛰어나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조정에 변고가 일어날 거란 걱정을 잠식시켜 준 것이었다.

특히 몇몇 파벌에 속한 사람들은 이번 일이 일어난 걸 오히려 기뻐했는데, 예를 들면 감찰원이나 문하중서, 태상사 같은 곳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감찰원에서 차를 마시자고 자신을 부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황제와 공주가 싸우는 재미있는 광경을 보았으니 이번 삶은 헛되지 않았다며 즐거워했다.

또 몇몇 사람들은 슬픔과 괴로움에 고통스러워했는데,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이유는 서로 달랐다. 예를 들어 임완아의 경우에는 모녀의 정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했지만 다른 사람은 자신이 성공할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모든 세력 중에서 이 일로 가장 놀라고 겁을 먹은 세력은 바로 2 황자 쪽이었다.

범한은 지난 2년 동안 장 공주와 2 황자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드러냈고, 2 황자 세력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그래서 2 황자의 진정한 뒷배가 장 공주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고, 이에 사람들은 장 공주가 세력을 잃고 유폐된 지금 2 황자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했다.

사람은 장 공주와 황태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2 황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왕부에서 2 황자는 모두가 예상하듯이 경악, 실망, 슬픔, 황당함, 괴로움 등의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그가 과자에 손을 뻗더니 먹지 않고 부셔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가 고개를 들어 왕부 대문을 바라보았다. 언제든지 태감과 태상사 관리들이 쳐들어와서 자신을 붙잡아 유폐시킬 것만 같았다.

2 황자는 부황이 갑자기 고모를 공격한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부황의 조용한 움직임과 천둥처럼 빠르고 강한 행동력에 진저리를 쳐야 했다. 그는 이제야 부황은 행동할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내하고 있었던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자가 한번 움직이자 세상이 변했다. 잠잠하던 천자의 우레와 같은 움직임에 경도의 상황이 완전히 변해버린 것이다.

2 황자는 자신이 앞으로 어떤 상황에 부닥치게 될지 몰랐다. 다만 황제가 자신과 장 공주의 관계를 알고 있는 만큼······ 자신이 앞으로 두각을 나타낼 기회가 사라졌다는 건 확실했다.

그가 한숨을 쉬며 손에 쥐고 있던 과자 가루를 접시에 놓았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건네준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옆에 있는 왕비 섭령아를 바라봤다.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부황께서는 당신 작은할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 당신에게는 함부로 하시지 못하실 겁니다.”

섭령아의 맑은 눈동자에 옅게 근심이 어렸다. 그녀는 자신의 부군이 며칠 동안 얌전히 집안에 머무르면서 언제든지 체포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위로하거나 무슨 방법을 써서 도울 수 없었다.

지금 2 황자가 기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섭씨 집안 밖에 없었지만, 장 공주가 유폐된 뒤로 며칠 동안 그는 섭씨 집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황궁에서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장 공주가 갑자기 세력을 잃은 뒤로 그는 무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함부로 움직였다가 부황의 화를 더 돋울까 봐 두려워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쥐죽은 듯 조용히 있었다. 유폐되는 것이 최소한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 말이다.

2 황자는 왕부에서 조용히 머무르며 최후의 날이 오기를 기다렸고, 조정과 민간에서도 2 황자가 끝장나는 그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황궁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유를 궁금해하며 온갖 추측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마침내 황궁에서 소식이 날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의 예상을 깼을 뿐만 아니라 경국 전체가 경악할 만한 놀라운 소식이었다. 왕부에서 소식을 받은 2 황자는 너무 놀라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무한한 기쁨과 의문에 휩싸인 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어째서?’

폐하는 남조국(南詔國) 군주가 세상을 떠나자 황태자 이승건에게 대신 조문하러 가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렇다면 남조국은 어디에 있는 곳일까? 남조국은 7년 전 경국 군대가 함락시킨 속국으로 습하고 더운 날씨 탓에 항상 질병이 창궐하는 곳이었다. 더구나 도로 사정도 무척이나 안 좋고······ 가는 길도 멀어서 한번 갔다 오려면 최소 4개월이 소요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남조가 경국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양국의 관계가 무척이나 좋았고, 또 남조의 군주가 세상을 떠났으니 경국에서 상응하는 지위의 사람을 보내 조문해야 하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황태자를 보내는 것은 상례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었다.

어째서 1 황자를 보내지 않은 걸까?

어째서 호 대학사를 보내지 않은 걸까?

어째서 범한을 보내지 않은 걸까?

이 민감한 시기에 황태자가 천 리 밖에 있는 남조로 보내지는 건 무슨 의미인 걸까? 혹시 유배를 보내는 건 아닐까?

장 공주가 유폐되자 사람들은 모두 다음에 쓰러질 인물은 2 황자일 거라 생각했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황태자가 먼저 쓰러졌다.

설마 폐하가 황태자를 폐위시키려 하는 것일까?

당시 상황의 세세한 부분들은 이런 판단을 뒷받침해 주기에 부족했지만, 조정의 교활한 관리들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해 내기에는 충분했다. 다만 상황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건지 이유를 모를 뿐이었다.

물론 지금 이 상황이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2 황자였다. 2 황자는 긴장해 땀을 뻘뻘 흘리며 부황의 행동은 항상 모두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서 하늘에 뜬 구름처럼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2 황자는 이후 더욱 조용히 지냈다.

그리고 20일 뒤 창백한 안색의 황태자가 금군과 호위 십여 명, 그리고 감찰원까지 삼중 경호를 받으며 경도 남문을 나갔다. 그는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것 같은 머나먼 남조국을 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

* * *

경도에서 멀리 떨어진 강남은 이미 싱그러운 봄 향기가 가득했다. 특히 서호 주변 버드나무에서는 꽃이 피어나기 시작해서 서호 옆에 위치한 팽씨 장원은 어느 곳보다도 봄기운으로 만연했다. 저택 뒤쪽에 쭉 펼쳐진 푸른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며 공기 중에 있는 습기와 날마다 따뜻해지는 햇볕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하지만 장원의 주인은 마음이 즐겁지 못했고, 기지개를 켜고 한가롭게 봄 날씨를 감상할 여유도 없었다. 우거지상이 된 그는 최근 며칠 동안 감찰원과 저택에서 보낸 보고와 서신, 그리고 궁정에서 만든 신문을 살펴보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사천립이 보낸 포월루에서 입수한 정보를 전해들은 그는 마침내 일의 발전 궤적이 정보들과 일치한다는 걸 확인했다.

장 공주는 서성 별궁에 유폐되었고, 황태자는 황명을 받아 천 리 밖에 있는 남조국으로 조문을 떠났다.

이 두 가지가 이번 일로 인해 초래된 직접적인 결과란 사실에 청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사천립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스승님, 폐하께서 왜 화가 나셨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장 공주마마께서 조정이나 강남에서 스승님을 공격하는 못하게 되었으니 기쁜 일이 아닙니까? 어째서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범한이 사천립을 비스듬히 흘려 보며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을 삼키고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자네는 얼른 소주로 돌아가서 포월루를 지켜보도록 하게.”

사천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떠나자 이번 일의 내막을 아는 왕계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범한 뒤에 가만히 서서 대인이 경도에서 온 모든 정보를 다시 살펴보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범한이 걱정하는 이유를 잘 알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힘들게 계획한 일의 결과가 고작 이거라니.”

범한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한 일이었는데······ 어째서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가 있죠?”

왕계년이 낙심해 죽상을 한 범한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장 공주마마가 장모라는 사실도 대인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어떻게 저런 정 없는 말을 할 수가 있지.’

범한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장 공주와 황제 사이에 설치한 폭탄을 깊은 궁 안에 있던 늙은 노부인이 제거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여전히 이 일의 과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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