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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40화 (640/1,108)

640화 평온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대신들이 줄지어 차례대로 들어갔다. 줄 맨 앞에는 문하중서 두 대학사와 상서들이 서 있었고, 호부상서 범건도 있었다. 용상 아래 나란히 서자 군데군데 사람이 빈자리가 보였다.

오늘 조회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 대리사나 감찰원에 잡혀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오던 관리들은 용상에 아무도 없는 걸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무 대학사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호 대학사를 바라봤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눈빛을 통해 호 대학사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오랜 시간 폐하를 보좌한 서 대학사는 폐하의 성격과 일 처리 방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폐하가 반 시진 동안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폐하의 성격상 완전히 끝낼 수 없는 일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 시진이 지난 지금 폐하가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황궁 안에 일이 생각처럼 쉽게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경도에 내리던 비가 그치면서 붉은 해가 구름 사이로 떠올랐다. 비록 빗물이 내뿜는 한기를 가셔줄 만큼 따뜻한 온기를 주지는 못했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태극전에 모인 경국 대신들은 잔뜩 긴장해서는 한겨울처럼 떨고 있었다.

그때 태감의 외침과 함께 용포를 입은 남자가 천천히 들어왔다.

만세 삼창을 한 뒤 관리들이 상소를 올리고 황제가 지시를 내리는 일련의 과정들이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모두들 이른 아침 조회에서부터 황제의 화를 건들려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서무가 고개를 들어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황제는 살짝 피곤해 보이는 것 말고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일이 터졌을 때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하는 법이다. 어쨌든 조정은 정해진 규칙이 있었고, 문신들에게는 각자의 위치와 역할이 있었다. 두 관아의 상서가 새벽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도찰원 어사 열 명 중 세 명이 사라졌으며, 경도 안에서 두 건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큰일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었다.

서무가 한숨을 쉬며 망설이다가 앞으로 나가 황제에게 어젯밤 일어난 일에 관해 물었다.

황제가 턱을 괴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짐의 뜻에 따라 감찰원이 사람들을 잡아 감옥에 가둔 것이다.”

서무가 평소 폐하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까지 간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는 폐하에게 자신과 같은 관리가 필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은 예사롭지 않은 만큼 무턱대고 물을 수가 없었다. 그가 마른 침을 삼켜 긴장해서 말라버린 목을 축인 뒤 공손히 말했다.

“소신, 안 상서를 비롯한 관리들이 무슨 죄를 저지른 것인지 궁금합니다.”

황제가 귀찮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손을 저었다.

요 태감이 용상 옆에 놓인 상자 안에서 상주문과 보고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맨 앞에 있는 늙은 대신들에게 나눠 주었다.

상소문과 보고서에 적혀 있는 것들은 서무, 범건과 같은 늙은 대신들도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들이었지만 이들은 이것들을 읽으면서 놀라고 분노하고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보고서는 당연히 감찰원이 조사해 작성한 것으로 어젯밤에 감옥에 갇힌 대신들의 죄명과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리사가 증언과 증거를 모두 확보한 이상 체포된 관리들이 살아날 기회는 전혀 없었다.

조정에서 대신들이 짓는 세 가지 표정은 당연히 황제에게 자신들은 안행서 무리가 저지른 악행을 전혀 알지 못해 놀랐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들과 함께 일한 조정의 동료가 폐하를 기만하고 백성들을 착취한 것에 대신들은 분노하고 부끄러워해야 했다. 여러 해 동안 조정에서 함께 일하면서도 그들의 사악한 악행을 미리 발견해 폐하에게 알리지 못했고, 이에 폐하의 마음을 다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에 관리들은 폐하에게 부끄러워해야 했고, 조정과 경국 백성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했다.

이 세 종류의 표정을 바라보는 황제가 살며시 조롱과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가 오늘 조회를 반 시진 늦게 연 것은 함광전에서 황태후를 위로하고, 황궁의 모든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황태후에게 자신이 화가 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 공주를 죽이지 못했음에도 전혀 실망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군주와 신하 사이에는 세 가지 표정 이외에 한 가지 표정이 더 있었다. 바로 놀라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보고서가 조정을 한 바퀴 돌았을 때 이미 네 명의 대신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들은 과거 장 공주와 인연이 있던 사람들로 보고서에 언급된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보고서를 본 순간 자신들이 마지막 날이 곧 오리라 확신했다.

네 명의 대신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머리를 조아릴 뿐 살려 달라 말하지 못했다. 황제 폐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염치없이 목숨을 구걸하는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네 명의 대신을 차갑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일어나거라.”

네 명의 대신이 흠칫 놀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쉽게 용서받을 줄은 몰랐던 대신은 놀라 감격한 표정을 지었고, 그중 한 명은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황제가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 * *

조회가 끝나고 어서방에는 경국의 진정한 권력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문하중서를 포함한 6부 원로대신들이 앉아 있었다. 다만 오늘은 왠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오늘 어서방에 황태자를 비롯한 황자들이 보이지 않는 걸 본 대신들은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황제가 그런 대신들을 바라보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조당에서 말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이곳에서만 말할 수 있는 일도 있지. 여러분은 경국을 떠받치는 기둥이고, 천자의 집안일도 국사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으니 자네들에게는 사실을 말해 주겠네.”

그 말을 들은 대신들은 황제가 장 공주의 일에 대해 말하려 한다고 짐작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안행서 등 사람들은 앞잡이에 불과한 만큼 짐도 쉽게 죽이지는 않을 거네.”

황제가 낮은 평상에 기대앉으며 말했다.

“조당에서도 짐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네. 일단은 일어보도록 하게나.”

대신들이 자신의 손에 들린 보고서를 바라봤다. 이건 조당에서 읽었던 보고서와는 다른 것으로 진짜 기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안에 내용을 읽은 대신들은 세 가지 표정으로 속마음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세 가지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장 공주 이운예는 경국 감찰원 주북제 밀정 수장 언빙운을 팔아넘겼다.

명씨 집안과 결탁해 해적을 암암리에 키워 황실 금고 화물을 약탈했다.

교주 수군을 몰래 동원해 섬에 있는 해적들을 학살했다.

자객을 동원해 거리에서 조정명관들을 암살했다.

보고서를 들고 있는 서 대학사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관리들은 장 공주가 야심도 있고 세력도 상당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 네 가지 죄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대역죄였다. 과거 경국은 북제가 협상을 할 때 갑작스러운 반격에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이처럼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던 북제 밀정이 생포 당한 사건이······ 장 공주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당시 그 일의 파장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대신들은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후 눈처럼 뿌려진 전단지에서 이 일의 배후를 장 공주로 지목했고 이에 장 공주는 어쩔 수 없이 경도를 떠나야 했으며 언빙운은 감찰원 4처의 수장이 되었다. 그래서 어서방에 있는 대신들은 대부분 전단지 사건이 장 공주를 수세에 몰려고 공격한 것일 뿐 정말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 이게······.”

서무는 너무 놀란 데다가 화가 치솟아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보고서에 적힌 조사 내용은 무척이나 세세했고, 맥락도 분명해서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세 죄명의 증인들은 이미 감옥에 갇혀 있었다.

“군산회란 곳도 있네.”

황제가 두 눈을 감으며 천천히 설명했다.

“운예가 만든 곳인데 회계 선생이란 작자는 이미 도망을 쳤지만 흑기들이 다른 관련된 사람들을 체포했네. 거리에서 암살한······ 자객 두 명도 지금 감옥에 갇혀 있네.”

마음을 조금 진정시킨 호 대학사는 황제가 대신들에게 황족과 관련된 이런 일을 밝히는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조심히 물었다.

“혹시······ 착오가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감찰원에서만 조사를 진행한 내용입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만약 장 공주가 정말 이런 죄를 저질렀다면 앞으로 경국에서 다시는 세력을 키우지 못하게 될 거였다. 다만 모두가 알다시피 감찰원은 범한의 통제를 받게 된 뒤로 경도와 강남에서 장 공주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만약 장 공주가 세력을 잃는다면 앞으로 조정에서 범한 쪽 세력이 득세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호 대학사는 이 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모두 범한이 조사한 것이긴 하지만 범한이 증거를 조작해 모함을 씌울 성격은 아니네······. 자객의 진술과 교주 수군 고위 장군의 서명도 모두 찾아냈고, 장부와 명씨 집안사람의 증언도 존재하니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호 대학사는 자신이 넌지시 건넨 조언을 황제가 무시하자 폐하의 마음속에 다른 계획이 있음을 알아채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

“언빙운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황제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차갑게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짐이 어떻게 경국 백성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겠나. 군대 병사들과 감찰원 밀정들은 모두 경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 아닌가. 황족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그런 사람을 팔아넘기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역겨워서······.”

어서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한참이 지난 뒤 황제가 피곤함에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운예는 어쨌든 내 누이이지 않은가. 화가 나더라도 나에게 화내 주게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서방에 있는 모든 대신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이들은 연이어 황제에게 성은이 망극하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일이 너무 수상쩍다고 생각했다.

‘누가 감히 황제 폐하에게 장 공주마마를 경국 법률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런 일을 황궁 안에서 조용히 처리하지 않고 어째서 솔직하게 대신들에게 밝힌 뒤에 황제 폐하 자신에게 화를 내라 말하는 것이지? 도대체 황제 폐하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거야?’

모두들 이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황제가 계속 말했다.

“민간에 말이 퍼지는 걸 방지하고자 장 공주 이운예의 작위와 봉지는 빼앗지 않을 것이다. 임소안은 앞으로 나와라!”

맨 뒤에서 엎드려 있던 태상사 정경 임소안이 급히 앞으로 뛰어나왔다. 그는 발이 후들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어째서 어서방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던 그는 비로소 폐하가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불렀다는 걸 깨달았다.

태상사는 황족들의 거주와 잡다한 일들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소신, 여기 있사옵니다.”

“장 공주가 감기에 걸려 몸이 좋지 않으니 서성 황가 별궁에서 요양해야 할 것 같다. 요양하는 동안 짐의 명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만날 수 없으며 명을 어기는 사람은 참수토록 할 것이다.”

“그리고 감찰원이 감시할 것이야.”

황제가 피곤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감으며 계속 말했다.

“큰 강 제방이 전부 건설되면 되면 그 애를 데리고 나갈 것이네.”

“소신······ 명을 받들겠습니다.”

임소안이 놀라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강남에서 양만리가 열심히 제방을 수리하고 건설하고 있기는 하지만 큰 강의 길이가 만 리에 이르는 만큼 제방을 전부 건설하려면 수백 년 이상은 걸릴 거야. 그러니 건설이 끝났을 때면 장 공주마마는 이미 죽어 해골로 변해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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