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638화 (638/1,108)

638화 내리치는 천둥과 쏟아지는 빗물 (3)

황제가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

“왜 그랬느냐?”

“왜 그런 거냐고요?”

이운예가 갑자기 황제의 손아귀 아래에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고통만 더 심해질 뿐이었다. 그녀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그런 거냐고요?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한 게 이유라면 이유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그 애를 놀리고, 그 애를 비통해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게 좋았을 뿐입니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오늘에서야 그 애가 느낀 절망과 고통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만족스럽군요.”

황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물었다.

“그 애가 너를 좋아했다고?”

“그러면 안 되는 법도 있습니까?”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장 공주의 얼굴은 유혹적일 만큼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당당하게 물었다.

“이 천하에 저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가······ 과연 있을까요?”

그녀가 바로 코앞에 있는 황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오른손을 들어 뺨을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황제 오라버니도 저를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뻔뻔스러운 것!”

황제가 그녀의 손을 떼어내며 소리쳤다.

이운예는 화를 내지 않고 숨을 헐떡이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오라버니도 저를 좋아하시잖아요······. 제가 오라버니의 누이이기는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요?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요. 마음은 대동산 깊은 산속에 숨기거나 바닷속에 던져 넣는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모든 남자가 짐승처럼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황제가 차가운 눈으로 호흡이 갈수록 가팔라지는 누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모든 남자가 네 치맛자락 아래서 넋을 놓는 건 아니야. 여자는 영원히 남자 머리 위에 설 수 없는 법이니까.”

“섭경미를 말하는 건가요?”

이운예가 갑자기 표독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그녀랑 달라요!”

“너는 영원히 그녀를 앞지를 수 없다.”

황제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앞으로 수년을 발악해도 너는 영원히 그녀를 능가하지 못할 거야. 너는 절대 내 마음속에서 그녀가 차지한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니.”

이운예의 얼굴빛이 순간 검게 변했다. 아마도 그 말이 그녀의 마음속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한 모양이었다.

황제가 잔인한 목소리로 귓가에 대고 계속 말했다.

“너는 평생 그녀를 능가하기 위해 발악하겠지만······ 절대 능가할 수는 없을 거야. 지금 그녀와 짐의 아들이 네가 가진 모든 걸 가져가서 무척 괴로운 모양이구나?”

이운예가 발악하며 독기어린 눈빛으로 황제를 노려봤다.

“너는 심지어 짐의 사생아 아들만도 못해.”

창밖에서 다시 ‘우르릉 쾅쾅’하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장 공주 귀에는 황제가 자신의 귓가에 대고 하는 말이 창밖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천둥소리보다 훨씬 크게 들렸다.

“모든 남자를 데리고 놀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어째서 그 애는 가지고 놀지 못하는 게냐?”

이운예의 눈빛이 점점 담담해지더니 괴로워하면서도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는 완아의 상공이니까요.”

황제가 비웃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너는 자기 조카까지 건들 정도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지 않니?”

장 공주가 가엽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우리 형제 세 명 중에서 두 명이 미치게 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혹시 오라버니는 아시나요? 아마 모르시겠죠? 아신다면 자신의 부하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첩으로 만들지도 않으셨을 테니까요!”

궁전 밖에 바람과 천둥소리가 갑자기 멈추면서 안도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황제의 손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장 공주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당시 북벌 때 오라버니는 중상을 입어 온몸이 경직돼 움직일 수 없었지요.”

장 공주가 기침을 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진평평은 위험을 무릎 쓰고 먼 길을 달려 오라버니를 구했고, 당시 동이성 포로였던 영 재인이 목석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오라버니를 간호했지요.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진 원장은 말 오줌을 마시고 말고기를 먹으며 버텼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은혜를 입은 두 사람을 오라버니는 어떻게 했지요? 오라버니는 진평평이 영 재인을 좋아하고, 영 재인도 진평평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중간에 영 재인을 가로채지 않으셨습니까······.”

숨이 막혔는지 잠시 말을 멈춘 장 공주가 두 눈을 부릅뜨며 말을 이었다.

“황제 오라버니, 그 당시 제가 어렸다고 해서 이 일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때 어마마마께서 격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로지 영 재인의 신분 때문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시 영 재인을 사지로 몰았던 이유는 뭡니까? 만약 섭경미가 나서서 사정하지 않았다면 영 재인과 1 황자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황제 오라버니는 이 일이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진평평이 태감이라서 상관없었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장 공주가 악에 받쳐서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오라버니는 정말 자신의 저보다 떳떳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이처럼 장황한 공격을 늘어놓았음에도 실망스럽게도 황제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황제가 천천히 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죽기 전까지도 짐과 진 원장의 관계를 흔들려 하는구나. 운예야 짐이 너를 무척이나 아끼는 건 맞지만······ 더는 살려둘 수가 없구나.”

* * *

동궁에서 가련한 모자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다만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황태자는 그나마 황후보다는 침착하게 상황을 대처할 힘이 있었다. 그는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상황이 무척이나 두려웠지만 경국 황제에게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 덕분인지 두려운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을 구하고 장 공주를 구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황궁 안에서 부황의 화를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황제 폐하가 그 사람에게 상황을 알릴 길을 모두 차단했다는 데 있었다. 효심이 깊은 황제 폐하는 황실의 더러운 추문 때문에 어머니의 몸이 상하는 걸 원치 않았다.

황태자는 자신에게 한 가닥의 희망이 남아 있다는 걸 알았다.

동궁은 이미 요 태감이 데려온 사람들에 의해 포위된 상태라서 다른 궁 사람과 연락한 방법이 없었고, 황후와 황태자가 별궁에서 키운 측근이 뇌우를 뚫고 이곳까지 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마마마, 궁을 불태워야 합니다.”

황태자가 몸을 돌려 넋이 나가 멍하니 있는 황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비로도 식히지 못할 만큼 큰불로 이 궁을 불태워버려야 합니다!”

* * *

끝없이 내리는 비는 황성의 건물과 궁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렸고, 광신궁 안은 조용했다. 아니 조용해 보였다······. 최소한 그 안에서 오누이가 나누는 독기 어린 대화는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묻혀 밖으로 새 나가지 않았다.

광신궁 밖에는 여전히 아무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늙은 홍 태감도 이곳에 있지 않았다. 모두 광신궁과 멀리 거리를 유지해야만 죽음과도 멀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먼발치에서 기다렸다.

한편 요 태감은 여전히 동궁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광신궁을 향해 있었다. 그는 궁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랐지만, 자신이 그곳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보고 싶은 마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가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냈다. 젖어서 얼은 발은 이미 감각이 없었다. 조심이 동궁 안의 상황을 주시하던 그는 폐하가 자신에게 동궁을 감시하라고 명령하시기는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 황후와 황태자가 뭘 하는지 확인하는 건 분수에 맞지 않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광신궁에 비하면 동궁은 아주 조용하고 평화롭기까지 했다. 그래서 요 태감을 긴장되기는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동궁에서 근무하던 태감과 궁녀들이 모두 죽었는데 황후와 황태자 두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때 빗물이 들어가 약간 습했던 그의 눈동자가 갑자기 건조해지더니 눈앞에 불이 보였다.

엄청난 불길이 일어났다.

동궁을 집어삼킨 불길이 무수히 많은 불꽃을 튀기며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그리고는 어마어마한 열기를 따라 신속하게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요 태감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멍하니 동궁이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거지? 설마 안에 있는 모자 두 사람이 스스로 불을 지른 건가? 분신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 자리에 굳은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불길을 바라보던 요 태감이 다시 생각했다.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어떻게 불이 날 수가 있지? 왜 빗물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거야?’

요 태감은 곧바로 지금 불이 난 이유나 꺼지지 않는 이유를 고민할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당장 불을 끄기로 했다.

그에게 황후와 황태자가 정말 분신자살을 하려 한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지금 확실히 아는 것은 만일 이대로 황후와 황태자가 죽는다면 폐하의 화가 자신을 향할 것이라는 거였다.

이에 요 태감이 불에 타는 것처럼 메마르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물을 가져와라!”

많은 태감과 궁녀들이 황궁 안에 있는 대야를 총동원해 불을 끄기 시작했다. 이들은 동궁에 불이 난 걸 발견한 순간부터 불을 끄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긴장한 요 태감은 함께 나서지는 않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척이나 신중했기에 누구든 먼저 나서서 궁 안에 있는 모자에게 접촉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동궁에 난 불은 무척이나 수상쩍었다. 자연적으로 생긴 불이 아니라 누군가가 기름을 뿌려 지른 듯 불길은 맹렬했고, 물을 뿌려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얼마 뒤 기름이 모두 탄 듯 불길이 잦아들더니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충성심이 강한 태감 한 명이 안에 있는 주인을 구하고자 시커멓게 탄 궁문으로 돌진했다.

용감하게 검게 탄 궁문으로 돌진한 어린 태감은 그대로 나무에 머리를 박고는 기절해 버렸다.

요 태감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자 시위와 태감들이 다시 동궁을 포위했다. 그리고 불을 끄려고 몰려왔던 다른 사람들은 동궁 밖에서 서로 눈치만 살피며 서 있었다.

동궁 안은 불에 타서 더욱 처량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간 요 태감의 눈에 궁전 처마 앞 빗물이 모이는 돌판 위에서 황후가 황태자를 끌어안고 있는 게 보였다. 빗물에 젖은 황후 몸에 살짝 그을린 흔적이 보였다.

요 태감이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불은 꺼졌습니다.”

동궁의 불이 꺼졌으니 두 모자는 계속 동궁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손바닥이 데어 물집이 생긴 황태자가 요 태감을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자네가 본궁을 죽이려 한 건가?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동궁에 불이 난 소식을 알리지 않고 숨기려 하는 건가?”

황태자가 이어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본궁은 무사하지만, 어마마마께서 연기를 마시는 바람에 정신을 잃으셨다.”

황태자의 목소리는 동궁 밖에까지 들렸다. 불을 끄려 모여 있었던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는 안도했다. 황후와 황태자가 무사하니 자신들이 화를 입을 위험은 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동궁을 포위하고 있는 태감과 시위의 귀에는 이 말이 다른 의미로 들렸다.

황태자의 말에 흠칫 놀란 요 태감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비로소 평소 평범해 보이기만 했던 황태자가 정말로 황제의 친아들이 맞는다는 걸 실감했다. 황태자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나자 과감히 동궁에 불을 질러 상황을 타개할 기회를 만든 것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면서 집안일을 처리하려고 일부러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을 선택했고, 하늘도 천둥과 비를 내려 도와주었다. 게다가 밖으로 말이 퍼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 수백 명에 달하는 태감과 궁녀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동궁에서 불이 나면서 황후와 황태자의 상황을 모두가 알게 되었고, 이 일은 더는 숨길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집안일이 나랏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황태자의 침착한 얼굴을 바라보던 요 태감은 마음이 서늘해졌다. 평소 무능해 보이던 황태자는 위기를 만나자 눈빛이나 생각 모두 폐하와 너무나도 비슷해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