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화 내리치는 천둥과 쏟아지는 빗물 (1)
동이 틀 무렵 구름이 점차 경도 하늘 위로 모이더니 어스름하던 하늘을 검게 물들였다. 황궁 뒤쪽 난잡스럽게 세워진 건물들 안에서 태감과 궁녀들이 몸을 뒤척이며 잠에 빠져 있었다. 물론 이들 중 몇몇은 이미 깬 상태였다.
홍죽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신의 뺨을 때렸다. 마치 뺨을 때리면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동궁에서 당직을 서지 않은 덕분에 태감과 시위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완의방에 위치한 자신의 집 안에 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두려웠고, 자신이 앞으로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잠든 사람들을 깨울 정도로 크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홍죽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창가로 다가가 그가 소매 안에 손을 넣고는 범한이 호신용으로 준 독이 묻은 비수를 쥐었다. 자신의 입을 막으려고 온 사람과 필사의 항전을 벌일 준비를 했다.
싸운다고 한들 죽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서생처럼 강직한 성격을 지닌 홍죽은 싸우지 않고 순순히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가 손을 덜덜 떨며 문에 귀를 바짝 붙이고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갑자기 참혹한 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조용해졌다.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진 홍죽은 밖에 있는 누군가가 죽었다는 걸 눈치챘다. 이곳 완의방에서 머무르는 태감과 궁녀들은 대부분 동궁과 광신궁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홍죽은 당연히 밖에서 발생한 일이 무얼 위해서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비수를 꽉 쥐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찢어져 상처가 나는 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 자신을 죽일 사람이 쳐들어올지 알 수 없었고, 자신이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홍죽은 죽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아무도 홍죽의 방을 찾아오지 않았다. 완의방에서 들리던 소리도 점차 잦아들더니 곧이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홍죽이 피 맛이 나는 침을 삼키며 문틈 사이로 밖을 바라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가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몸이 굳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발목을 주무르던 그가 모든 용기를 쥐어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젊은 태감과 궁녀들이 머무르는 집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아무런 이상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발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걸어가 다른 집 문에 손을 뻗었다.
빗장이 걸리지 않은 문이 스르륵 하고 열렸다.
집 안을 본 홍죽은 얼굴이 더욱더 하얗게 질려서는 입을 쩍 벌렸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방구석에 낭자한 혈흔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은 이미 비워진 상태였다.
그는 완의방에 있는 집들의 상태가 모두 이럴 거라 확신했다. 이곳에 있는 태감과 궁녀들은 이미 폐하의 명령에 따라 죽임을 당했으며, 시체는 동이 트기 전에 은밀한 장소로 운반되어 불태워졌다.
과연 폐하는 서슴없이 손에 피를 묻힐 수 있는 사람이었다.
넋이 나간 홍죽이 뒷걸음질 쳐서 집 안을 빠져나왔다. 완전히 비어 버린 완의방에 홀로 남은 그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고민해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홀로 살아남았다는 감동과 두려움이 엄습해 오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쾅!’
그때 먹구름 깊은 곳에서 번쩍하고 빛이 생기더니 이어서 ‘우르릉 쾅쾅’하고 천둥소리가 경도와 경도 주변 마을에 전해졌다. 이어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천둥소리를 동반한 빗물이 땅 위에 쏟아져 내렸다.
홍죽은 빗물이 자신의 얼굴을 때리고 얇은 옷이 젖는 것도 모른 채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정신을 차린 그가 목숨줄과 같은 비수를 꽉 쥐고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 안으로 들어간 그는 문을 굳게 닫은 뒤 다시는 열지 않았다.
* * *
“부황, 왜 이러시는 겁니까!”
황태자가 평소에는 절대 보이지 않았던 분노에 찬 눈빛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경국 황제는 아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양손을 뒷짐을 지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황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갔다 대었다.
황후가 흠칫하며 가장 익숙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가장 원망하는 중년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걸 지켜봤다. 그녀는 남자가 입고 있는 금빛으로 빛나는 용포를 자세히 볼 수 있었고, 용포에 금실로 새겨진 문양을 자세히 볼 수 있었으며 남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자세히 볼 수 없었고, 그 표정 뒤에 숨겨진 마음도 읽어낼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으면서도 황후는 여전히 황제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황후의 몸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제 폐하를 뼈에 사무치도록 두려워했다.
황제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네 아들 교육 좀 잘하게.”
황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도 오늘 동궁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를 알지 못했던 그녀는 황제의 말을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황태자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알기에 황태자는 최근 분수에 맞게 조용히 행동하며 어떤 일에도 나서지 않고 있었다. 모성애를 건드는 황제의 말에 격분한 황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제 아들이라고요? 그럼 폐하의 아들은 아니란 말입니까?”
황제가 아무 말 없이 황후의 뺨을 만지며 못마땅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폐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큰 소리는 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야.”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을 섬뜩하게 하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황후가 절망하는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저를 내치시겠다는 겁니까? 저를 내치시려고요? 십여 년 동안······ 제게 눈길 한번 주지 않으시더니 결국 저를 내치려 하시는 겁니까? 제가······ 감사해야 하는 겁니까?”
자신의 어머니가 모욕을 받는 모습을 본 황태자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황제의 앞으로 달려가 그를 가로막고는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버지, 그만하십시오!”
그가 황제와 황후 사이를 가로막았음에도 황제는 그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황제가 깊고 그윽한 눈동자로 황태자 뒤에서 울고 있는 황후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어떤 경우에도 체통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법이네. 황후, 그렇지 않은가?”
황후가 겁에 질린 얼굴을 들고 황태자의 좁은 어깨너머에 있는 황제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는 황후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가 황태자의 몸에 부딪혔다.
흥분을 가라앉힌 황태자는 부황이 얼마나 냉혹하고 무정한 사람인지 깨달았다.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부황의 눈동자는 최소한 그가 앞으로 어머니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눈동자는 황태자에게 다른 한 가지 사실도 알려주었다. 황제가 그를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사람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는 뜻이었다.
황태자는 부황이 왜 이렇게 화가 났으며, 자기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건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고민하던 그는 머릿속에 순간 어떤 일 하나가 떠오르자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물러서지 않았다.
황제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올 때마다 황태자는 대동산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용포를 입은 남자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분노가 그의 몸을 짓눌렀다.
황태자의 귓가에 자신의 무릎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두려워 물러나고 싶었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황제가 뒤에 있는 어머니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와 황후 사이에 선 그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있는 힘껏 저항했다. 살을 에는 듯한 무시무시한 기운에 머릿속이 아득해진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이것이 일대 제왕이 가진 기세인가? 용상에 앉으려면 이렇게 무정해져야 하는 것인가?’
“왜 이러시는 겁니까?”
강력한 압력을 가까스로 이겨내던 황태자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아버지!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러자 황제가 마침내 황태자를 바라봤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아들을 바라본 황제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역겨워서 그런다!”
황태자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한 황태자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황제 앞에 주저앉은 그가 울기 시작했다.
황제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황후 옆으로 걸어가 있는 힘껏 뺨을 때렸다.
황후가 비명을 지르며 낮은 평상 위에 쓰러졌다.
황제가 고개를 숙여 황후의 귓가에 대고 이를 갈며 말했다.
“짐이 맡긴 아이를 저렇게밖에 키우지 못한 건가?”
몸을 꼿꼿이 세우고 동궁 밖으로 나가려던 황제가 고개를 돌려 역겹다는 눈빛으로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만일 좀 전에 네가 짐의 앞을 계속 막았다면 짐도 너를 조금은 존중해 줬을 거다.”
이 말을 끝으로 조금의 온정도 찾아볼 수 없는 경국 황제가 떠났다. 그의 강직하고 냉혹한 모습에는 한 집안의 남편이나 아버지가 아닌······ 제왕의 모습만 있었다.
대문이 천천히 닫힌 동궁 안은 옅은 피 냄새와 통곡하는 황후와 황태자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어 쓸쓸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황태자가 갑자기 천천히 일어나 약간은 넋을 잃은 어머니를 부축해 앉혔다.
그때 황후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려 했다. 절망과 분노에 찬 눈빛을 한 황태자가 황후의 손목을 잡고는 소리쳤다.
“어머니 죽고 싶지 않으시면 당장 할마마마께 사실을 알릴 방법을 생각해 내십시오!”
황후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 * *
동궁과 광신궁 안과 밖, 완의방 안과 밖에서 반 시진 만에 두 궁전에서 근무했던 태감과 궁녀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홍죽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황제 폐하가 황실의 추문을 숨기기 위해 수백 명의 원혼을 희생시킨 것이었다.
이때를 계기로 경국 황제 폐하는 점차 자신의 가장 강인하고 냉혹하며 잔혹한 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용포를 입은 중년 남자가 광신궁 밖에 도착했다.
그의 옆에 따라오는 태감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오는 걸 본 늙은 홍 태감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유령처럼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 광신궁 안에 있는 장 공주와 밖에 있는 황제 사이에는 두꺼운 문만 있을 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 앞에는 이제 무엇이 있을 것인가?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지난날의 추억을 맞이할 것인가? 십여 년 동안 서로를 위하고 생각했던 두 사람의 사이가 일순간에 멀어질 수 있을까? 두 사람은 황제와 신하의 입장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될까? 아니면 오라버니와 누이의 입장에서 마주하게 될까?
경도 하늘 위에 깔린 먹구름이 갈수록 두꺼워졌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낮은 평상에 앉아 있는 장 공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궁문을 바라봤다. 그때 궁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온몸이 젖고 긴 머리가 산발이 된 중년 남자가 천천히 들어왔다. 빗물에 젖은 용포에 그려진 용은 마치 인간 세상에 나오고 싶다고 발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장 공주 이운예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지금 보니 참 모진 분이십니다.”
‘쾅!’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큰 번개가 내리쳤다. 번개의 불빛이 번쩍이면서 짧은 순간이지만 어두운 황궁의 모든 것들을 환하게 비추었다.
번개의 불빛에 비친 황제 폐하의 모습은 분노, 고독, 고집, 포악함이 모두 담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