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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35화 (635/1,108)

635화 황궁 안, 피와 황토

조용한 방안에서 언약해가 창밖에 둘러싸인 담장을 바라보며 조금 전에 떠난 동료를 떠올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동안 무슨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갑자기 웃었다.

감찰원은 반 시진 만에 장 공주가 은밀하게 심어둔 모든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세상 사람들의 두려움을 받는 장 공주의 능력을 생각해 보면······ 이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처럼 감찰원이 신속하게 장 공주 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주 오래전에 심어놓은 두 밀정 덕분이었다.

특히 원굉도는 장 공주가 잘생긴 임 서생과 눈이 맞은 그때부터 임 서생의 옆에 심어진 밀정이었다.

궁녀는 장 공주의 성격과 취향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홍죽은 ‘우연히’ 그 은밀한 비밀을 발견했으며 신양의 책사인 원굉도는 장 공주의 세력과 목표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감찰원에게 은밀하게 전달해주는 정보가 있는 이상 장 공주 쪽은 감찰원에게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없었고, 이에 진평평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장 공주를 위협적인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오늘 감찰원은 정확하면서도 과감하게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이처럼 뛰어난 활약을 펼친 원굉도는 감찰원이 건립되고 처음 배출해낸 밀정 중 한 명이었다. 그때 같이 배출된 밀정들은 조정과 세상 속에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모두 사라져버렸고, 그래서 그는 지금 감찰원이 과거 감찰원과 다르다는 걸 알지 못했다.

진평평은 이들과 폐하 사이에서 모든 걸 주관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게 경국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모든 것들은 사실은 진평평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 * *

먹구름이 낀 하늘은 아직 어둑어둑했지만 거대한 저택 안에서 배추를 심길 좋아하는 노인은 이미 일어나 나무바가지에 물을 담아 땅에 뿌리고 있었다.

군대 안에서 가장 덕망이 높은 진씨 가문 영감님은 나이가 많은 탓에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오늘은 그의 아들도 잠자리에서 아주 일찍 일어났다. 경도 수비 자리에서 쫓겨나 이제는 추밀원 부사가 된 진항이 대충 저고리를 몸에 걸친 채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정원 안으로 달려왔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 귓가에 대해 조용히 뭐라 속삭였다.

그는 이제 더는 경도 수비 통령이 아니었지만 진씨 집안은 군대 안에 심어둔 눈과 귀가 많은 덕분에 맨 처음으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오늘 새벽에 경도 안에서 심상치 않은 동향이 감지되었으며 감찰원이 주도적으로 움직였다는 사실 말이다.

미간을 찌푸리는 진씨 가문 영감님의 노쇠한 얼굴에서 놀란 기색이 보였다.

“폐하가 장 공주마마의 세력을 건드렸다니······ 이유가 뭔지 아느냐?”

아무도 이유를 몰랐다. 오랫동안 조용히 있던 경국 황제 폐하가 왜 갑자기 움직였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장 공주가 지난 몇 개월 동안 얌전히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저희는 어찌합니까?”

진항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황제 폐하의 움직임이 큰 행동을 위한 시작일 뿐이라면 이어서 화를 당할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해 봐야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진씨 가문 영감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찌 하느냐니? 어찌 그리 멍청한 질문을 하는 것이냐.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것이야?”

“하지만······ 장 공주마마는 저희 집안이 한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진씨 가문 영감님이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 명씨 집안 무상주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교주 수군 일을 말하는 것이냐? 교주 쪽은 네 사촌 형이 처리하고 있으니 황궁에서는 어떤 흔적도 알아내지 못할 거다. 그리고 명씨 집안은······ 폐하께서 고작 1할의 무상주 때문에 이 몸을 내치지는 못하실 것이야.”

“하지만······.”

진항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만약 지금 장 공주가 세력을 잃는다면······ 앞으로 조정에 범한의 세력이 득세하게 될 텐데. 소자 범한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걱정됩니다.”

진씨 가문 영감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엇보다도 오늘 이운예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말지가 중요하다.”

“설마 폐하께서 장 공주마마를 죽이기라도 하실 거란 말씀입니까?”

진항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황태후 마마께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허락하실 리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폐하께서도 조정이 혼란이 빠지는 걸 원치 않으실 겁니다.”

진씨 가문 영감님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내가 폐하라면 장 공주의 미친 행동에 대해서 계속 반응하지 않거나 그럴 수 없다면 죽음을 요구할 것이다······. 물론 네 말도 일리가 있다. 황궁 안에 여전히 황태후 마마가 계시고, 폐하는 평판을 중요시 생각하는 군주이시니 이운예를 쉽게 죽이시지는 못하시겠지.”

진씨 가문 영감님이 나무바가지를 던지며 말했다.

“만약 이운예가 죽는다면 우리가 뭘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만약 다행스럽게도 살아남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내 말을 명심하거라. 만약 그녀가 살아남는다면 나중에 분명 생각지도 못한 미친 방법으로 반격을 하려 할 게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생길 거니 참고 기다려야 한다.”

* * *

굳게 닫힌 황궁 문에 박힌 구리 못은 황궁 담장 밖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노려보는 영혼의 눈동자처럼 보였다. 황궁 밖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 황자와 경도 수비 통령인 사소뿐이었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은 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감찰원이 장 공주 쪽 고위 관리들을 모두 체포해 대리사로 보냈다는 건 알고 있었다.

1 황자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네. 내가 궁에 들어가 진언을 올려야겠네.”

사소가 살며시 그의 옷깃을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대원수님! 어리석은 짓 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1 황자가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박했다.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모습을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네. 만일 이 사실을 할마마마께서 아신다면 어떠시겠는가?”

경국 황태후는 지금 함광전 안에서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함광전 안과 밖에서 전해진 소식들은 이미 경국 황제가 보낸 사람에 의해 막힌 상태였다. 경국 황제는 다른 궁에서 보낸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황태후의 단잠을 깨우고 궁 안에서 발생한 일을 알리는 걸 원치 않았다.

함광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황태후가 가장 아끼는 딸인 장 공주가 머무르는 광신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광신궁은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등이 굽은 늙은 태감이 겨울 고목처럼 광신궁 문 앞에 서 있었다.

고목이 있으니 광신궁도 더는 생기가 넘치지 않았다.

장 공주 이운예가 광신궁 난간 밖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 늙은 태감을 노려봤다.

“홍 내관, 어마마마를 봐야겠네.”

늙은 홍 태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따라 광신궁에 온 태감들은 궁 안을 바쁘게 쏘다니고 있었다. 모두들 광신궁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시신들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장 공주의 심복인 무예 궁녀들을 포함해 광신궁 안에 있는 27명의 궁녀가 모두 죽은 상태였다. 몇 구의 시신은 궁 밖 담장 아래 있었는데 분명 도움을 청하려 담을 넘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늙은 홍 태감이 사람들을 이끌고 오자 광신궁 안에 있던 궁녀들은 반격은커녕 외마디 변명 한번 하지 못하고 모두 참혹하게 죽임을 당해야 했다.

사실 그녀들에게 변명할 시간이 있었던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폐하의 뜻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누구도 살려두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것이었다.

태감들이 궁녀들의 시신을 부서진 마차에 싣고는 불태울 장소로 가지고 갔다. 마차 틈 사이로 흐른 핏자국이 황궁 돌길에 섬뜩한 흔적을 남겼다.

그러자 태감들이 빗자루로 황토를 쓸어 핏자국을 덮었다.

잠시 뒤 멀리 마차가 종적을 감추자 돌길에 흐른 핏물도 황토에 스며들어 아주 옅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바로 그때 늙은 홍 태감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무기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 공주마마, 폐하께서 황태후 마마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시면 폐하께서 오실 겁니다.”

장 공주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독기가 어리더니 양손의 주먹을 꽉 쥐었다. 잠시 뒤 그녀가 웃으며 아주 예의 있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그럼 본궁은······ 황제 오라버니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

그녀가 곧장 궁 안으로 들어가 나무문을 닫았다.

늙은 홍 태감은 허리를 굽히고 서서 늙은 고목처럼 조용히 광신궁 밖을 지켰다. 그건 마치 잎사귀 하나 피지 않은 늙은 고목의 가지가 점점 광신궁 주변으로 뻗어나가 전체를 포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안에서 장 공주가 답답해하는 표정으로 숨을 헐떡였다.

* * *

동궁 안은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수수한 머리 장식도 채 하지 못한 황후는 허락도 없이 들어온 태감들을 바라보고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보잘것없는 것들이! 지금 반역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요 태감이 공손히 인사하며 대답했다.

“마마, 이 노비가 어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그저 황명을 따를 뿐입니다.”

이때 안색이 창백한 황태자가 안에서 나왔다. 태감과 시위들을 본 그는 곧이어 이들이 태극전과 어서방에서 부황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아봤다. 그는 무슨 일로 천한 노비들이 허락도 없이 동궁에 쳐들어온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이것이 부황이 뜻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황태자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두려움을 애써 숨기며 침착하게 물었다.

“요 내관, 무슨 일인가?”

요 내관이 예를 갖춰 인사한 뒤 공손히 보고했다.

“폐하께서 동궁에 손버릇이 더러운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황태자 저하와 황후마마를 걱정하셨습니다. 이에 이 노비에게 여기 있는 사람들을 태상사로 보내 심문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누가 들어도 거짓으로 꾸민 핑계였다. 황후와 황태자가 불안과 의혹이 섞인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보잘것없는 궁녀 한 명의 죽음이 이렇게 큰 사태를 불러올 수는 없었다.

황후가 목구멍까지 치솟는 분노를 애써 누르고는 이를 갈며 말했다.

“궁 안에 일은 본궁의 소관이 아닌가? 국사에 걱정이 많은 폐하께서 어찌 이런 작은 일까지 신경을 쓰셔야 한단 말이냐. 설마 요 내관이······ 입을 함부로 놀려 폐하의 마음을 어지럽힌 것인가?”

요 태감은 아래 가만히 서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황의 뜻이니 데려가 심문을 받게 하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여 있던 동궁의 태감과 궁녀들이 울부짖었다. 그들은 앞으로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했지만 태상사가 음침한 감옥보다도 무서운 곳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 몇 명이나 데려가는 것이냐?”

“전부입니다.”

요 태감이 고개를 들며 짧게 설명했다.

숨을 깊이 들이쉰 황후가 입술을 떨며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시중은 누가 든단 말이냐?”

“두 분의 시중을 들기 위해 곧 새로운 사람들이 올 것입니다.”

요 태감이 공손히 대답하고는 손을 들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태감과 시위들이 동궁 안에 있는 수십 명의 태감과 궁녀들을 밧줄에 묶어 연행해갔다.

요 태감은 가는 길에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이들의 손발뿐만 아니라 입까지 밧줄로 막아 버렸다.

황후는 직감적으로 오늘 일이 보통 일이 아님은 깨달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황태자를 바라보았지만, 아들의 망연자실한 눈에서는 아무런 기미도 알아챌 수 없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황태자는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요 태감 일행이 동궁을 떠나려 할 때 경도 황제가 들어오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가?”

황후가 급히 황태자와 함께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비통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이곳을 버려진 궁전으로 만드시려는 겁니까? 저를 내치시려는 것입니까?”

황제는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황태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황후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은 채 요 태감을 향해 물었다.

“짐이 뭐라 분부하였느냐?”

이 아리송한 말에 화들짝 놀란 요 태감이 곧장 바닥에 엎드려서는 머리를 땅에 찢으며 듣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을 내뱉었다.

이후 황후와 황태자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고, 놀란 황후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황태자 앞에서 쓰러졌다.

무슨 일이 터진 걸까······.

경국에서 가장 신성한 황궁 안에서, 가장 인정이 넘친다는 동궁전 밖에서 시위들이 서슬이 퍼런 검을 뽑아 들고 사정없이 휘둘렀다.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살려 달라 절규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수십 개의 머리가 땅 위에 떨어졌고, 수십 구의 머리 없는 시체들이 땅 위에 쓰러졌다. 붉은 피가 동궁 정원을 물들이자 곧이어 피비린내가 엄습했다.

그 모습을 본 황후는 놀라 기절해 버렸고, 안색이 파리해진 황태자는 온몸을 떨었다. 곧이어 그가 고집스럽고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부황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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