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631화 (631/1,108)

631화 악랄한 놈 (2)

명청달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최소한 저는 아직도 명씨 집안의 큰 사장입니다. 대인께서는 저를 명원 안에 가둬두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제가 명원에 있는 것도 안심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이제 저를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대인의 일 처리 방식대로 죽였다가는 사람들의 의심을 받으실 텐데요.”

“또 틀리셨습니다.”

범한이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어르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르신의 신분이 저보다 대단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어르신을 죽인다고 해도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을 겁니다.”

“물론.”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은 법이지요. 그러니 명원 안에서 평온한 노년을 보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 말을 들은 하서비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품속에서 하얀 비단을 꺼내 명청달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하얀 비단을 보고도 명청달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뒤에 있던 첩만 놀라 겁에 질려서는 이빨을 부딪치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하얀 비단을 이곳에 놓고 갈 테니 죽음으로써 제게 대항할 용기가 생기거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범한이 명청달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저도 어르신에게 자살한 용기가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말대로 명원 안에서 계속 살아가시겠지요······. 자신의 친모를 목 졸라 죽인 사람은 분명 죽음의 공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테고, 또 저승에서 자신의 친모를 보는 걸 가장 두려워할 테니까요.”

“하나 충고해 드리자면 어르신은 죽지 않는 게 가장 좋습니다. 명란석은 아마도 평생 감옥에서 나오기 힘들 테니 어르신마저 돌아가시면 채 두 살도 되지 않은 젖먹이가 어르신의 지분을 상속받아야 하거든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젖먹이가 큰 재산을 쥐게 되면 앞날이······ 어떻게 되는지 어르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할 말을 마친 범한이 몸을 돌려 서재를 떠났다. 뒤따라가던 하서비가 문을 닫자 서재 안은 다시 한 줄기 빛도 없는 어둠 속에 잠겼다.

아무 말 없이 책상 위에 놓인 하얀 비단을 바라보던 명청달이 한참 뒤에 중얼거렸다.

“정말 악랄한 놈이야······.”

* * *

명원의 방어 인원은 이미 감찰원에 의해서 말끔히 교체되었다. 이에 아름다운 명원 안은 심란하고 불안한 분위기로 가득했고, 사방에는 낯선 사람들뿐이었다. 오늘 새로운 주인이 된 하서비는 명원 전체를 바꾸기 시작했지만, 가족 중에서 감히 그의 명령에 저항할 사람은 없었다.

“명원의 사병들은 이미 설청 대인이 파견한 주군에게 무기를 빼앗긴 상태입니다.”

하서비가 소식을 듣자마자 범한의 귓가에 대고 보고했다.

“명청달이 가지고 있던 힘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는가?”

“40여 명이 죽었습니다.”

“설 대인께 도움을 받았으니 잊지 말고 기억해 둬야겠군.”

범한이 잠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는 웃으며 말했다.

“명씨 집안이 마침내 자네의 것이 되었네. 복수에 성공한 느낌이 어떠한가?”

하서비가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말했다.

“명씨 집안은 대인의 것입니다.”

범한이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자 하서비가 급히 해명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명씨 집안은 이제 조정의 것이란 뜻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명씨 집안은 자네의 것일세. 명씨 집안이 언제 조정이나 나의 것이 된 적이 있었는가? 자네는 서재에서 내가 명청달과 나눴던 대화가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안심하게······ 조정은 명씨 집안이 말을 잘 듣기를 바랄 뿐 그 이상은 바라지 않네.”

놀란 하서비는 입만 벙긋 거릴 뿐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조정이 거금을 동원해 명씨 집안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도 순순히 자신에게 넘겨주려 한다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서비를 바라보던 범한이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니 하고자 하는 일도 다를 수밖에. 폐하가 어떤 분이신가? 폐하는 천하의 주인이시고, 경국 백성들은 폐하의 백성들이네. 그러니 백성이 가진 것은 곧 폐하의 것이라 할 수 있지. 백성이 자신이 가진 것을 분수에 맞게 잘 관리해서······ 나라와 조정을 이롭게 한다면 폐하로서는 그것으로 된 거네. 조정이 만약 명씨 집안에 개입하려 한다면 영남과 천주 상인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게다가 고지식한 조정 관리 중에서 명씨 집안의 거대 사업을 제대로 관리할 사람이 있을 것 같은가? 그러니 안심해도 되네.”

하서비는 목구멍에 쓴맛이 올라오는 걸 느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폐하는 천하의 주인이시라 백성들의 사업에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면 작은 범 대인은? 어째서 이익을 앞에 두고도 먹지 않으려 하시는 거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귓가에 범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자네에게 물어보지 않았는가. 복수에 성공한 감정이 어떠한가?”

하서비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주인의 신분으로 명원 안을 돌아다니는 데도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이곳을 항상 그리워했는데 막상 돌아오니 낯설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렇게 원하고 바랐던 대로 명씨 집안 주인이 되었으니 기뻐해야 마땅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별로 기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사실 복수가 그런 것이지.”

범한이 잠깐 말을 멈추다가 다시 말했다.

“복수에 성공한 뒤에 맨 처음 느끼는 감정은 허무라네.”

순간 하서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저도 명청달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일어난 일과 대인이 지난 1년 동안 해오신 일들을 떠올려 보면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평화로운 변화를 이루려면 긴 시간을 가지고 차분히 진행해야 하는 법이네.”

범한이 웃으면서 설명했다.

“안정이 모든 것보다 중요했던 만큼 평화롭게 일을 진행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네······ 나는 폐하를 대신에 뛰는 사람일 뿐이네. 폐하께서는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일을 진행하길 바라셨고,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을 뿐이야······.”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게다가 명청달은 장 공주와 황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고, 군대 쪽의 지원도 받고 있는데 내가 어찌 제멋대로 할 수 있었겠나.”

장 공주가 언급되자 하서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상주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전부 없애버리게. 어차피 실물 없이 종이 위에만 존재하는 것이지 않은가.”

범한이 이어서 설명했다.

“표를 만들어서 궁에 보낼 것이네.”

하서비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게 하면 장 공주께 미움을 받을 텐데······ 반격 당하지 않겠습니까?”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황궁 안에 있는 장 공주는 이미 나를 사무치게 미워하고 있겠지만 반격을 하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을 테니 문제없지.’

그가 하서비를 향해 손짓했다. 사생아로 태어난 두 명의 사내가 주인이 바뀐 명원 안을 돌아다녔다. 두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후속 조치를 의논하면서 천하 3대 건축물 중 하나인 이곳의 화려한 풍경을 감상했다.

* * *

1개월 전부터 경도의 깊은 황궁 안에서 어떤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곳 귀인들의 시중을 드는 아랫사람들은 항상 옛날이야기나 은밀한 말들을 입에 올리길 좋아했기에 소문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소문은 경천동지할 만한 것이었기에 퍼진 지 2일 만에 소리소문 없이 묻혀버렸다.

이 소문은 원인도 분명하지 않았고 출처가 어디인지도 알아낼 수 없었으며 더구나 어떤 증거도 없었다. 태감과 궁녀들은 입이 천박해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이 소문이 귀인들의 귀에 들어갔다가는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근거 없는 소문은 황궁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재미였고, 대부분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금방 잊혔다. 그리고 이렇게 잊힌 소문은 나중에 다시 입에 올라도 이전처럼 재미있거나 신선하지는 않은 법이었다.

올해 황궁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몰고 올 소문도 이렇게 자연히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잊지 않고 있었고, 더욱이 그 사람은 가장 예민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느 날 깊은 밤에 그 소문을 다시 입 밖으로 꺼냈다.

요 태감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의 입이 너무 천박해서 노비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낮은 평상에 앉은 중년 남자가 들고 있던 상소문을 내려놓고는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궁에 있던 궁녀가 죽었다고 하던데?”

이미 깊은 밤이라 어서방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쉼 없이 정무를 살피는 경국 황제는 후궁에서 잠을 자는 경우보다 어서방에서 잠을 자는 횟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태감들은 일찌감치 잠자리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가벼운 바람이 창틈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자 실내 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등불이 유리로 덮여 있어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네, 그렇습니다. 황후마마께서 어린 시절 가지고 다니셨던 수청아 옥결을 훔친 죄로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줄곧 발뺌하다가 결국 수치심을 못 이기고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요 태감은 쓸데없는 말은 전혀 보태지 않고 최대한 간결하게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수청아 옥결이라고?”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동안 그 물건이 뭐였는지 고민하는 듯하더니 잠시 뒤 웃으며 말했다.

“생각났네. 황후가 어렸을 때 가지고 다니던 그 물건은 부황께서 혼사가 결정된 뒤에 하사했던 것이네. 당시에는 부황이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황궁 안이 혼란스러워서 아주 좋은 상품을 보내지도 못했는데도 황후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면서 매일 그걸 차고 다녔지.”

미간을 찌푸리고 얼마 없는 따뜻한 추억을 떠올리던 그가 중얼거렸다.

“거기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던 거로 기억하는데.”

요 태감은 황제의 마음이 어떤지 알지 못했기에 눈치만 살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후가 그 물건을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궁녀를 죽일 정도는 아닌데.”

황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황후가 그동안 인자한 주인으로 불리지 않았는가? 어질고 현명한 국모 역할을 잘해오던 황후가 그런 사소한 일로 갑자기 돌변했다고?”

요 태감은 분명 궁녀가 수치심에 자살했다고 말했지만, 황제는 궁녀가 살해당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사실 황궁 안에 사람들은 모두 영리했기 때문에 진실을 감추기 위해 궁녀를 자살로 꾸며 살해했다는 건 모두가 짐작하는 사실이었다.

“자네가 몰래 조사를 해보게.”

황제가 다시 상소문을 들며 말했다.

황궁 안은 평소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요 태감이 늙은 태감 몇 명을 데리고 어떤 일을 조사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게다가 황제는 이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이지 며칠 동안 관련된 소식에 관해 묻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요 태감이 공손히 보고했다.

“궁녀의 죽음에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다만, 궁녀가 사건이 일어난 날 오후에 광신궁에 옷감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전날 황후마마께서 동이성에 주문한 양포를 받으셨는데, 그걸 관례에 따라 각 궁에 보낸 것일 뿐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요 태감의 부연 설명에 상소문에 고정되어 있단 황제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로 향했다. 그가 요 태감을 한번 본 뒤 다시 상소문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알겠네.”

“황태자께서 당시에 광신궁에 계셨다고 합니다.”

요 태감이 고개를 있는 힘껏 숙이며 말했다.

황제가 상소문을 가볍게 탁자에 내려놓고는 잠시 무언가 생각했다. 그리고는 ‘알겠네’라는 세 글자 말 대신 지시를 내렸다.

“홍죽을 불러오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