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화 이것은 음모야! (1)
관복을 입은 홍상청이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며 명란석 옆으로 다가갔다.
“명씨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홍 대인 안녕하십니까?”
이미 놀라서 머리가 둔해진 명란석은 범한의 심복을 보고도 수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고, 상대방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건지 예측하지도 못했다.
“제 본명은 청와입니다. 해적섬에 있었던 사람이지요.”
홍상청이 명란석의 귓가에 대고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주 쓸모도 없어진 유리 파편은 맹자 형님이나 란화 누이, 그리고 섬에서 죽은 수백 명에 달하는 사형들을 위한 것입니다······. 란화 누이는 도련님이 가장 아끼는 첩이었으니 잊지 않으셨겠지요······.”
말을 마친 홍상청은 마음속에 기쁨이 용솟음쳐서는 크게 외쳤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큰 소리로 웃으며 홍상청이 떠난 자리에 서 있는 명란석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벌벌 떨면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마치 이제야 자신이 그 손으로 아끼던 여자를 죽인 사실이 실감이 난 모양이었다.
* * *
소주성 밖 명원에 소식이 전해지자 명청달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최상품 관요 도자기 그릇을 떨어뜨렸다. 사방에 파편이 튀었다. 값비싼 그릇이 깨졌는데도 그는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는 은거울이 깨져서 유리 조각이 되었다는 소식에 너무 놀라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 사방에 흩어져 있는 도자기 파편들을 바라본 그가 비로소 은거울도 이처럼 무수히 많은 파편으로 깨져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 * *
“소송을 건다고요? 저는 두려울 게 없습니다. 어전 앞에서 소송한다면 더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요······.”
영주에서 6개월 동안 머무르며 왕계년을 기다리던 범한은 마침내 마차를 타고 항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감찰원의 소식을 받아 본 범한이 눈썹을 들썩이며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경도는 아직 조용했고, 강남에서는 이미 상황이 시작되어 있었다. 범한은 작년 강남에서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며 명청달에게 쓴맛을 안겼을 때보다 지금 상대방을 손안에 넣고 주무르는 게 더 재미있었다.
사실 그는 대략적인 계획만 제공하고 구체적인 집행은 모두 아래 부하들에게 맡긴 상태였다. 이에 그는 지금까지 섬에서 일어난 참극을 기억하고 있는 홍상청이 명씨 집안의 숨을 단숨에 끊지 않고 고통스럽게 조금씩 천천히 끊으려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개구리를 솥에 넣고 천천히 익혀 죽이려는 속셈이지요.”
범한이 옆에 앉아 있는 왕계년을 향해 말했다.
“명씨 집안이 당한 일들을 생각하니 내가 애통해질 지경입니다. 이제 불이 다 피워졌으니 놀이는 멈추고 수확하라 명령을 내리십시오.”
왕계년이 한 달 가까이 경도에 홀로 머무르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황궁의 동태를 주시하기 위해서였다.
“이틀 정도 지나면 장 공주와 황태자는 명씨 집안이 살든 죽든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명씨 집안에서 움직이기 전에 손을 쓰려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왕계년의 말을 들은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들은 제가 이런 방법까지 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요······. 명씨 집안은 지금도 제가 자신들을 계속 괴롭힐 거라 걱정하고 있겠지만, 이제 저는 그럴 여력이 없습니다.”
그가 갑자기 히죽 웃었다. 마차 발을 걷고 강남의 관도를 바라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게 무척이나 즐거운 모습이었다.
왕계년이 처음 들어보는 괴상한 노랫소리에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
“대인, 그건 도대체 무슨 노래입니까?”
범한이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1년 동안 참아왔던 일을 마침내 진행하려 하니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 * *
흠차 대인의 마차 의장이 최대한 느린 속도로 항주를 향해 출발했을 때 소주성 안에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강남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설정이 범한이 직접 쓴 서신을 받아 보고는 서재에 앉아 넋을 놓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좌우에 서 있는 책사들 역시 서신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설청과 마찬가지로 넋을 놓은 상태였다.
마치 진흙으로 만든 인형처럼 세 사람이 미동도 하지 않고 멍하나 있었다.
설청이 예정보다 일찍 경도를 떠나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20여 일은 지나야 소주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 시간이면 명씨 집안은 이미 상당한 손해를 본 뒤일 거였다. 더구나 감찰원이 명씨 집안의 힘을 더 약하게 만들기만 할 거라고 예상하던 그는 범한이 보낸 서신의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범한이 서신에서 이처럼 자신만만한 말투로······ 단박에 명씨 집안을 해치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이유가 뭔지 알지 못했다.
“범한은 뭘 믿고 이런 말을 한 거지? 또 싸우겠다는 건가?”
강남 총독 설청은 초상전장의 일을 알지 못했기에 범한의 자신감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그리고 왜 자신에게 준비를 잘해두라고 말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흠차 대인이 이렇게 말한 이상 반드시 일어날 일인 겁니다.”
왼쪽에 있는 책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설청에게 주의를 환기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책사의 말에 설청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만약 범한이 정말 명씨 집안을 해치우려 하는 거라면 폐하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심복으로써 어울리는 일을 하는 거라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러기에는······ 명씨 집안 배후에 있는 황족 세력이 두려울 텐데? 경도에 확실한 변화가 생기지 않는 이상 먼저 움직일 수는 없을 텐데.’
“그럼······ 작년처럼 지켜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오른쪽에 있는 책사가 잠시 고민하다가 두루뭉술한 방법을 꺼냈다.
그러자 설청이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고는 서슬 퍼런 눈빛을 쏘아내며 중얼거렸다.
“지켜보게······ 당연히 지켜봐야지. 하지만 그냥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되네. 범한은 강남로 흠차인 만큼······ 강남의 민심을 고려해야 하니 공개적인 방법으로 명청달을 궁지에 내몰 수는 있어도 암암리에 감찰원을 동원하기는 쉽지 않을 거네.”
강남 총독 설 대인이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해 말했다.
“주군을 동원해 명원과 명씨 집안의 1천 명의 사병을 감시하도록 하게······ 만약 범한의 방법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개입하지 않고 계속 지켜보기만 할 것이고, 범한의 방법이 성공한다면 그를 도와 명씨 집안 세력을 모두 해치워버릴 거네.”
오른쪽에 있는 책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병력을 동원해 명씨 집안사람들을 죽인 걸······ 황실 분들이 아신다면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설청이 범한이 보낸 친필 서신을 흔들면서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가 움직이려 하는 건 경도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네. 젊은 흠차 대인은 결코 바보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려 준 것은 자신과 공을 나누자는 의미이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강남로 관아는 한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공을 나누려면 이번에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만 하네.”
갑자기 누군가가 급히 서재의 문을 두드렸고, 설청이 미간을 찌푸렸다. 책사 중 한 명이 문을 열자 강남로 관아의 부하 관리가 뛰어 들어오더니 인사도 생략한 채 보고했다.
“총독 대인, 명씨 집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명씨 집안에 문제가 생기다니?’
놀란 설청은 범한의 행동이 너무 빠르다고 탄식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자세히 말해보게나.”
관리가 침을 꿀떡 삼키고는 설명했다.
“오전에 명씨 가문에서 황실 금고 전운사 화물을 입수했는데, 그 화물이 은거울이라 합니다.”
설명을 듣고 범한이 사람을 시켜 은거울을 부숴버린 사실을 알게 된 설청이 아까운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명씨 집안이 계약을 맺었으면 은전은 당연히 줘야지.”
정말이지 범한의 입장에 치우친 말이었다. 조정은 이처럼 상인들의 입장이나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집단이었다.
“중요한 건 은전이 아닙니다.”
관리가 설청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명씨 집안의 자금 회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명씨 집안이 그동안 몇 개의 전장에 돈을 빌렸는데······ 지금 전장 사람들이 명원에 찾아와 빚 독촉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빚 독촉을 하고 있다고?’
설청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했다.
‘강남에서 백 년 동안 위세를 떨쳐온 명씨 집안에게 감히 빚 독촉을 하다니······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명씨 집안은 넘쳐나는 게 돈인 데다가 전장 중에서 명씨 집안의 눈 밖에 나고 싶어 하는 곳은 없을 텐데······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설청의 머릿속에 순간 수만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범한이 지난 1년 동안 한 일들이 모두 명씨 집안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서였던 것인가?’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명씨 집안이 정말 빚을 상환하지 못한다면 전장들은 상점을 싸게 팔아 빚을 상환하라 독촉할 것이고, 집안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질 텐데······ 이건······.’
설청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알고 있기로 폐하의 뜻이 명씨 집안이 순순히 조정의 통제를 받도록 만들라는 것이지······ 혼란에 빠지게 하라는 게 아니었다.
‘명씨 집안이 파산이라도 한다면 그곳에서 일하는 수만 명과 명씨 집안과 관련된 일을 하는 강남 백성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마친 설청이 급히 물었다.
“태평전장도 빚 독촉을 하고 있는가?”
“아닙니다.”
“사람을 보내 밖에서 명원을 지켜보라고 하게.”
명씨 집안의 가장 큰 협력자인 태평전장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설청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잿빛이 된 얼굴빛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알리게. 명씨 집안과 전장 사이의 갈등에 조정이 관여하지는 않겠지만 명씨 집안이 쓰러지는 일은 허락할 수 없다고 말이네!”
범한도 설청처럼 황제의 뜻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명씨 집안을 한입에 모두 털어먹더라도 강남 민심에 영향을 줄 정도로 흉하게 먹거나 노골적으로 명씨 집안을 핍박해서는 안 됐다.
그래서 그는 눈을 뻔히 뜨고 명씨 집안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고, 명청달도 자신의 집안이 쓰러지도록 놔두지는 않을 거였다. 사실 이번 빚 독촉은 명씨 집안이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 빚을 상환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더 큰 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거였다. 오늘 몇몇 전장들이 명원에 가서 빚 독촉을 한 것은······ 그렇게 해도 초상전장 막후의 사장은 드러나지 않을 거라는······ 범한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 *
빚을 진 사람은 항상 돈을 받으려는 사람보다 더 태연하고 당당하게 행동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명씨 집안의 현재 주인인 명청달은 따뜻한 찻잔을 받쳐 들고 한 모금 한 모금 차를 음미하며 천천히 눈을 껌뻑였다. 그의 아래에는 채권자라고 할 수 있는 각 전장의 대행수들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전장 대행수들도 자신이 당당히 빚을 독촉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이들은 의자에 엉덩이를 3분의 1만 걸친 채 안절부절못하며 명씨 집안 주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빚을 독촉하러 온 사람치고는 겁에 질리고 자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전장 대행수들은 명씨 집안 가주가 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자신들은 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처럼 짓이겨 죽임을 당하거나 강남 지역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 명원을 찾아온 것은 1년 동안 명씨 집안의 사업이 계속 지지부진해서 걱정하고 있는 차에 누군가가 달콤한 말로 같이 가자 꼬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돈을 만지는 사람들이었다. 이에 돈을 가장 사랑하고 아꼈고, 자신의 돈이 사라지는 걸 가장 참지 못했다.
최근 한 달 동안 감찰원이 다시 강한 공격을 퍼부으면서 명씨 집안은 연달아 손해를 보고 있었고······ 최근에는 은거울까지 망가져 막심한 손해를 복 말았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계속 터지는 데다가 오늘 황실 금고 전운사에서 은전을 독촉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자 전장 대행수들의 인내심도 마침내 무너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