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화 초상 전장
첩이 응접실에서 나가자 명청달이 아들을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젯밤에 했던 제의는······ 안 된다.”
“어째서입니까?”
명란석이 괴로운 듯 말을 이어 갔다.
“누가 조정과 맞설 수 있겠습니까? 지금 물러나지 않고······ 범한이 다시 강남으로 오면, 물러나고 싶어도 물러날 수 없습니다.”
“범한이 뭘 할 수 있겠느냐?”
명청달이 아들을 잠시 바라보고는 계속 질문을 던졌다.
“설마 군사라도 움직여서 우리를 몰살시키기라도 한단 말이냐?”
“흥, 누가 알겠습니까? 그 흠차 대인은 황제의 사생아입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소란을 피운다면······ 그가 두려워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황궁에 아는 사람이 있단다.”
명청달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황태후, 황후, 장 공주······ 이들 귀인께서 설마 황제 폐하의 사생아 하나를 못 이길 것 같으냐?”
“그렇다면 장사는 어떻게 합니까? 만약 범한이 작년처럼 한다면······ 우리 명씨 가문은 대체 얼마나 많은 은전을 채워 넣어야 손해를 만회할 수 있는 것입니까?”
명란석이 분노에 싸여 불안한 상태로 말을 이어 갔다.
“예전에는 황실 금고 사업을 하면 벌고 싶은 만큼 벌 수 있었습니다. 하오나 지금은 파는 만큼 돈을 갚아나가는 실정입니다. 낙찰 받을 때 가격을 너무 높이 제시한 바람에 이윤은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또 감찰원 사람들이 날마다 와서 소란을 피워대니······. 아버님, 이렇게 나가다가는 얼마 못 버팁니다. 3개월 정도면 우리 가문에서는 땅을 팔기 시작해야 합니다.”
“급할 게 뭐 있느냐?”
명청달이 반대하며 말을 이어 갔다.
“황실 금고의 장사는 어떻게든 계속 해야 한다. 이는 장 공주마마의 뜻이다. 지금 우리가 손을 놔버리면 범한이 우리를 놓아주기는 하겠지. 하나 장 공주마마를 어찌 대할 수 있겠느냐? 황실 상인이 아닌 명씨 가문은 단순한 고깃덩이에 불과하다. 언제든 사람들에게 잡아먹혀버릴 거란 말이다.”
명청달은 1년 전에도 아들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적어도 동이성으로 가는 물건은······ 적게 팔면 적게 밑질 수 있습니다.”
명란석이 운을 띄워 보았다.
그러자 명청달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
“안 된다! 사고검에게 밉보일 수 없는 데다가······ 우리에게는 아직 태평 전장의 현금이 필요하다.”
현금이란 말에 부자는 동시에 침묵했다. 조정과 범한이 전력으로 압박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명씨 가문은 지금껏 잘 버텨오면서 가문의 넓은 땅을 지켜왔다. 그런데 이를 가능하게 해준 건 동이성과의 양호한 관계였다. 태평 전장과 초상 전장 계속해서 은을 공급해 주고 있어서였다.
“만일······ 제가 만일이라고 했습니다. 태평 전장과 초상 전장이 우리 집안을 더 이상 지탱해주지 못하고 은전을 회수하려 들면 어쩌지요?”
“은을 회수하려 든다고? 그 돈을 위해 전답과 점포들을 저당 잡혀 두었단다.”
명청달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한데 전장 입장에서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설마 팔아버릴 수 있기라도 하는 줄 아느냐? 그들은 우리를 계속 지원해 줄 수밖에 없을 거고······.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필요 없는 걸 거둬가게 될 거다. 은전이라고는 전혀 벌어들일 수 없는 쓸모없는 것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버텨야지!”
명청달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후 주먹을 살짝 쥐고 기침을 두 번 하고는 결연하게 말했다.
“태평 전장과 초상 전장만 문제없다면 우리는 버텨나갈 수 있다. 그러면 범한도 우릴 가지고 어쩔 수 없을 거야.”“얼마나 오래 버텨야 할까요?”
명란석이 1년 동안 집안에 닥친 풍파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버티기 힘들 지경이었다.
“범한을 무너뜨릴 때까지다. 황제 폐하께서 그분의 잘못을 알게 될 때까지이고.”
명청달의 두 눈은 움푹 패여 있었다. 그가 피로가 쌓인 눈에 한 줄기 매서움을 담고 말했다.
“2년이든 3년이든 버텨야 한다. 경도 쪽 상황을 기다려야 하느니라.”
“하지만 지금만 해도 집안에서 은전을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 많습니다. 어쩌면 계속해서 전장에서 은전을 조달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명란석이 걱정스레 대꾸했다.
“집안의 몫을······ 억지로 일부를 하서비에게 주었더니.”
명청달이 눈을 감고 계산을 해보았다.
“작은어머니가 낳은 셋째와 넷째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기는 해도 그들은 손에는 아무것도 없단다. 절대 대다수가 우리 손에 있어서지. 그러니 전장 쪽에서 은을 조달할 때 선만 안 넘으면 된다.”
심계가 깊은 상인인 그는 비록 태평과 초상 전장이 솥 아래에 넣어 둔 장작을 갑자기 빼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줄곧 조심하고 삼감으로써 위험을 최소로 낮추려 했다.
* * *
소주성의 전장과 전당포 거리는 그다지 길게 늘어서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청석판이 깔린 거리는 유난히 깨끗했다. 이곳에 오는 이가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대단한 부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명란석은 명씨 가문의 계승자였으니 당연히 후자에 속했다. 그래서 그가 ‘초상’이란 글자가 적힌 푸른 깃발의 전장을 아무도 모르게 찾아가자 초상 전장의 대행수 곧바로 공손하게 그를 맞이해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범한이 강남으로 온 후부터 명씨 가문은 외부로 은전을 빌리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황실 금고 낙찰은 받았지만, 천하에 퍼져 있는 태평 전장의 막대한 실력으로도 그리 많은 현금을 순식간에 모을 수는 없었다. 이에 명씨 가문은 초상 전장에 도움을 청하는 모험을 한 것이었다.
초상 전장은 생각과 달리 겨우겨우 동의를 해 준 터였다. 하지만 한 차례 협력으로 명씨 가문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남겼다. 명씨 가문은 초상 전장에 대해 상세하게 배경 조사를 했고 이곳의 자금이 북제 금의위 지휘사 심중 집안의 유산 및 동이성의 한 집안에서 나오는 것이란 걸 알고는 이내 마음을 놓았다.
양측의 협력은 날로 늘어만 갔다. 이에 초상 전장은 이미 태평 전장이 된 것도 모자라 명씨 가문의 최대 협력자가 되었다. 이에 1년여의 시간 동안 명씨 가문은 이 전장에서 300만 냥의 은전을 빌렸다.
명란석은 오늘도 또 은전을 가지러 온 것이었다. 양측은 매우 능숙하게 서명을 한 후 계약서와 공증서에도 서명을 함으로써 양자 간의 수속을 마쳤다.
그러자 초상 전장의 대행수가 갑자기 난색을 표했다.
“명 도련님, 뭔가 일이 있는데 이걸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명란석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심장이 순간 ‘두근’ 하며 어떤 생각이 들었다.
‘초상 전장이 갑자기 명씨 가문에게 어떤 의심이라도 든 거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평범해 보이는 대행수가 떠보는 듯이 말했다.
“이 두 달 동안은 괜찮았습니다. 하오나 듣자 하니······ 흠차 대인께서 곧 강남으로 돌아오신다고 합니다.”
명란석이 싸늘하게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생각했다.
‘온 천하가 우리 집안과 흠차 대인 범한의 불화를 알고 있거늘. 한데 초상 전장은 왜 전에는 멀쩡히 잘 있다가 이제 와서야 겁을 내는 거지?’
대행수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명씨 가문이 강남 상권을 쥐고 있은 지 백 년입니다. 그러니 우리 같은 작은 전장은 당연히 의심해서는 안 되겠지요······ 다만, 도련님께 한마디 일러드릴까 합니다. 천하에서 돈 버는 거래가 많다고는 해도 어찌 조정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명란석의 심장이 두근댔다. 그건 명씨 가문의 사업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과 딱 맞아떨어진 말이었다. 한데 전장 대행수는 명씨 가문의 당사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명란석은 대행수가 갑자기 이런 언질을 해주는 데 대해 살짝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외부인 앞에서 무언가 말을 하기가 뭐해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장사를 해야 황실 금고에 있을 때보다 돈을 더 벌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대행수는 소리 내어 껄껄 두어 번 웃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명씨 가문 마차가 푸른색 바닥석으로 덮인 길 위를 떠나자 초상 전장의 대행수가 살짝 허리를 굽히고 뒤쪽에 자리 잡은 창고방으로 들어갔다. 경계가 삼엄한 창고방에는 은과 각처에서 발행한 전표가 놓여 있었다. 한데 대행수는 상인들 중 제일인 명씨 가문의 것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그가 은전을 융통해준 차용증을 조심스레 단독의 칸 안에 넣고는 그 안을 흘겨보았다.
안에는 차용증이 두툼하게 들어 있었다. 초상 전장이 지금이라도 당장 명씨 가문에게 돈을 갚으라고 압박한다면 어떻게 될까. 명씨 가문은 조정과의 계약을 어기고 황실 금고의 물건을 파는 일을 관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의 어마어마한 가산을 팔아 돈을 갚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초상 전장은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 떠오른 대행수가 옆에 있는 보조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명씨 가문의 여섯째 어르신이 돈을 얼마나 빌려갔지?”
“이미 한도액을 넘겼습니다.”
보조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는 대행수의 수단에 매우 탄복하고 있었다. 그가 알기로는 지금 현재 초상 전장은 명씨 가문의 근 절반에 달하는 재산을 확보한 상태였다. 비록 명씨 가문 사업의 가치가 겨우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화와 부라는 건 일단 차용증에 반영되면, 그리고 어떤 시기에 교묘하게 도달하는 순간 가치가 갑자기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그 손님은······ 계약서를 갖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대행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아직 강남으로 돌아오시지는 않은 건가?
초상 전장 뒤에 있는 방에서 대행수가 푸른 깃발을 향해 공손하게 지시를 바랐다.
“거기 계신 대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왕 십삼랑은 소주로 온 후 바로 초상 전장으로 왔다. 그는 이 전장과 명씨 가문이 협력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한데 의외였던 건, 아니, 온 천하 사람이 봐도 의외였던 건, 이 전장의······ 주인이 범한이란 점이었다!
왕 십삼랑은 입에서 살짝 쓴맛이 났다. 일단 스승님께서 범한을 왜 이리 중시하셨는지, 그리고 왜 자신에게 그분의 태도 일부를 대리하도록 하신 건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어서였다. 다음으로 그는 범한과 낡은 사당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어서였다. 마지막으로 초상 전장은 이미 명씨 가문에게 충분히 많은 차용증을 써준 상태인데, 이 일에서 자신은 돈을 받아내러 온 졸개일 뿐이니······ 이 모든 상황을 바꿀 수는 없어서였다.
이 사실을 지금 동이성에 알리고, 명씨 가문에게 알린다 하더라도 그로서는 이미 정해진 일을 바꿀 수는 없었다.
명씨 가문은 끝난 거였다. 정확히 말하면, 명청달이 범한 앞에 무릎을 꿇고 앉고,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을 몰래 죽이고, 불쌍한 모습으로 천하에 동정심을 구하고, 범한이 우레와 같은 공격을 펼치기 이전에······ 명씨 가문은 끝장이 난 거였다.
다시 말해, 명씨 가문이 들인 모든 노력은 사족이었고, 무기력한 발악이었던 거다.
범한이 지금까지 전혀 손을 쓰지 않았던 건 경도로부터 오는 압박에 대응해야 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그가 손을 쓴 건 경도의 귀인들은 더 이상 명씨 가문을 도울 여력이 없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어서였다.
왕 십삼랑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생각했다.
‘범한은 대체 어떤 수단을 써서 명씨 가문을 향한 장 공주의 지원을 멈추려 하는 걸까?’
“그거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오.”
왕 십삼랑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돈을 받아내러 갈 때 내가 당신과 함께 가겠소.”
대행수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주 오래 전, 그는 호부에서 대단히 성공한 관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단히 성공한 고리대금업자였다. 그리고 점포 정리에 그는 능수능란했다.
“주인어른 쪽에서 행동에 나서실 것입니다. 그러니 대인은 소주성에서 며칠 더 머물러 주십시오.”
그의 말에 왕 십삼랑이 생각했다.
‘범한이 명씨 가문을 처리한다고 했으니 차용증만 가지고는 분명 모자랄 거야. 또 무슨 행동에 나서려는 거지?’
* * *
범한은 강남에서 이미 행동에 들어가 있었다. 그에게는 시간차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강남에서의 행동에 필요한 경도에서의 행동도 이제 천천히 시작되고 있었다.
2월의 어느 날, 곤경에 빠져 있던 동이성 옷감 가게 주인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보낸 은표가 제 역할을 했나 보다.
‘내일, 그렇지! 바로 내일.’
옷감이······ 황궁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