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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18화 (618/1,108)

618화 태도가 모든 걸 결정한다 (2)

이홍성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얼굴에 점점 편안한 웃음이 떠오르더니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요 2년간의 일은 나도 똑똑히 보았다네······ 경도에서의 놀이에서 나는 자네를 이길 수 없었고, 둘째도 자네를 이길 수 없었지······.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것도 괜찮겠지. 경도에서는 자네가 놀게나. 나는 서쪽으로 가서 놀 테니.”

순간 어찌 대꾸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은 범한은 일단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그러다 한참 후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번에 서호로 가는 길은 험난할 겁니다. 그러니 몸조심해야 합니다······. 군에서 공을 세우고 명성을 쌓는 게 첩경이기는 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지로 가는 것입니다. 1 황자마마께서 군권을 쥐고 계시기는 하나 서쪽에 계시는 몇 년 동안 정말 온갖 고생을 하셨지요. 그러니 세자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자 이홍성이 생각이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대꾸했다.

“군에 몸을 던진 이상은 일찌감치 마음의 준비를 한 거라네. 부친 대인께서도 내 생각을 잘 알고 계셨어. 그렇지 않았다면 허락해 주지 않으셨겠지.”

방금 전 세자가 말한 ‘생각’이란 경도의 혐오스럽고 험악한 투쟁판에서 제대로 벗어나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범한은 이번 정서군의 골간이 여전히 2 황자의 처가가 되는 섭씨 가문이란 점을 떠올라 오히려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이홍성의 얼굴을 바라본 채 참고 또 참다가 결국에는 한마디 하고 말았다.

“섭중은······ 둘째의 장인입니다. 경도 일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는 했으나······.”

일러주려던 말을 끝맺지도 않았는데 이홍성이 손을 휘 내저으며 범한의 말을 가로막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염려 말게. 내가 자네에게 약속했으니 당연히 지킬 것이네. 나는 바보가 아니거든······ 단지······.”

그가 미소를 지었다.

“단지 자네가 너무 똑똑해 보여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발전할 기회를 찾지 못한 것뿐이네. 특히 최근 2년 동안, 자네가 부왕을 동원해 나를 철저히 찍어 눌렀지만 자네에게 고개를 숙이지는 않을 거네. 또 연금되는 건 걱정되기는 하지만 말일세.”

그러자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정왕야의 힘을 빌려 압박한 게 아닙니다. 정왕야께서 나를 이용해 세자를 압박하신 거랍니다. 이 점만은 똑똑히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다 괜찮으이.”

이홍성이 탄식을 하며 말을 이어 갔다.

“부왕과 자네 생각이 같으니까. 이왕 그렇게 된 거 내가 억지로 발버둥을 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이번에 서역으로 가는 것도 괜찮은 일이야. 사막에서 보게 될 피와 불은 훨씬 더 현실감이 있겠지.”

이홍성이 갑자기 차분해졌다. 그리고 범한의 눈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와 둘째는 줄곧 우의가 좋았지······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할 게 있네.”

부탁이란 단어에는 조금 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에 범한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차리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선수를 쳐버렸다.

“저는 신하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일들은 내가 나서서 할 수도 없지요. 더군다나 승패를 두고 누가 온전한 계산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앞서 언급한 부탁이니 하는 건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이홍성이 차분하게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내가 말할 기회를 뺏은 걸 보니 내가 할 말에 약속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일 테고······. 승부가 결정되지 않다는 말도 맞아. 어디에서부터 살펴보든 짧은 몇 년 사이에 그들을 거꾸러뜨릴 수는 없겠지. 하나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 느낌으로는 결국에는 자네가 이길 것 같군.”

“이제는 과분한 칭찬입니까?”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잊지 말게. 그래도 둘째는 자네 형제일세······ 친형제 말이네.”

이홍성이 범한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부디 둘째를 살려주었으면 하네.”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군요.”

범한이 살짝 몸을 틀어 경도 옆에 자리 잡은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분은 황자입니다. 그러니 우리 같은 신하는 제아무리 권력이 커도 그분의 생사를 결정할 수 없지요······ 더군다나 나에게 그분을 살려주라 했는데, 언젠가 둘째가 저를 잡게 된다면 그분이 나를 살려주실까요?”

범한의 말소리가 점점 싸늘해졌다.

“나는 둘째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드렸습니다. 1년여 동안 내가 왜 그분의 날개를 제거했는지 알겠지요······. 하오나 둘째는 상관 않더군요. 그분 자신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너무 커져서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방심하고 멈춘다면······ 그건 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고요.”

이홍성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둘째는 열 살 때부터 억지로 적장자 자리를 빼앗는 길에 들어섰지······ 그리고 그런 시간이 너무 많이 쌓여서 그에게는 바꿀 수 없는 인생 목표가 되고 말았고. 그러니 자네가 둘째만 살려준다 해도 그분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걸세.”

“그런 이유에서였군요.”

범한의 얼굴이 점점 더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오른팔을 들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서 몇십 리를 가면 우리 범씨 가문의 장원이 있습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나요?”

이홍성이 범한을 잠시 쳐다보았다.

“저곳에는 네 사람이 묻혀 있습니다.”

범한이 팔을 내리고 말을 이어 갔다.

“범씨 가문의 호위 무사 네 사람이 묻혀 있습니다. 내가 경도로 온 후 계속 나를 호위해주던 사람들인데 외양간 길에서 살해당했습니다.”

범한이 계속 말했다.

“외양간 길에서 벌어진 급습은 장 공주님의 뜻에 따라 둘째가 짠 계획이었습니다. 비록 세자 입장에서는 이용당한 거지만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어찌 봐도 공범자니까요······ 그날 나는 경도에서 나를 죽이려는 자가 있다면 절대 인정사정 봐주지 않겠노라 맹세했습니다. 3년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내 사람도 많이 죽었고, 저쪽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었지요. 그리고 양쪽의 서로에 대한 원한은 일찌감치 진흙탕 속 선혈이 되어 씻으려야 씻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왕 둘째가 섭씨 가문의 도움으로 계속 시간을 끌어온 거······ 나도 그분과 함께 시간을 끌 작정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이홍성을 주시한 채로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둘째가 물러서기를 거절한 이상 이 일은 너 죽고 나 살자 식이 된 건데······ 저에게 그분을 봐주라는 건, 생각해 보니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꼴이겠군요! 한데 이런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제게 그런 요구를 한 건······ 정말 불공평한 처사라고 말이죠.”

불공평하다니······ 이홍성이 자조적으로 웃기 시작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번 일이 평화롭게 끝맺기만을 바랄 뿐이네.”

“하지만 태자마마와 2 황자마마의 마음을 봐야겠지요!”

범한은 황제가 할법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황제 폐하 손에 들린 칼일 뿐입니다. 평화롭게 끝맺음을 하려면, 두 분이 황제 폐하 앞에서 어찌 행동하는지 보면 그만입니다!”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돌연 작별인사를 하고 있는 이 시점에 홍성에게 이리 무정하게 말한 건 너무 각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참다못해 고개를 내젓고는 말투를 온화하게 바꾸었다.

“이번에 서쪽으로 가면 나와 둘째 사이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는 거니 매우 현명한 결정입니다. 그러니 제 입장에서는 고맙다는 인사하는 게 맞겠지요.”

“무엇이 고맙다는 건가?”

이윽고 이홍성이 무언가 알았다는 듯 씁쓸하게 말을 이어 갔다.

“도망가 줘서 고맙다는 거군. 나중에 자네가 칼을 휘두를 때 참지 않아도 된다는 거겠지?”

그러자 두 사람 다 웃음이 터져버렸다.

말고삐를 쥐고 있는 이홍성의 손을 보는 순간 범한은 마음이 동해 세 번째로 같은 말을 했다.

“이번에 서호행은 험난할 겁니다. 그러니 부디 몸조심해요.”

이홍성은 일단 조용히 있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몸을 돌려 범한을 잠시 바라본 후 자그마하게 말했다.

“만약 내가 서역에서 죽는다면······ 내 사망 소식을 약약에게 서둘러 알려주게······ 내가 죽었으니 그녀는 북쪽에서 숨어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필경 이국타향에 있으니 집에 있는 것만 못할걸세.”

범한은 누이의 유학과 관련한 진상을 세자가 정확히 알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저도 모르게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이에 예절 바르게 양손을 모아들고는 억지로 웃으며 한소리 했다.

“살아서 돌아오기나 해요!”

그러자 이홍성이 큰 소리로 하하하 웃었다. 그리고 탁탁탁 채찍 휘두르는 소리와 함께 준마가 비탈길을 뛰어 올라가더니 말을 타고 있는 세 사람을 이끌고 길을 따라 먼지를 휘날리며 곧바로 서역으로 향했다.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이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이홍성이 평안하기를 기도해주었다.

* * *

그날 저녁, 강남으로 향하는 감찰원 마차 대열은 예전에 습격을 받았던 좁은 산골짜기 길에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지나가는 동안 가끔 바위 위에 남아 있는 전투 흔적이 보였다. 범한은 살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속에서는 강한 살의가 솟구쳤다. 이번 강남행은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모든 일을 마무리 한 후에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진씨 가문의 배추 심는 영감님의 머리통을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진항은 추밀원 부사가 된 후로는 경도 수비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진씨 가문의 영감님은 여전히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범한도 이번 설에 진씨 가문 영감님에게 새해 인사를 하러 가는 대신 귀한 선물만 보냈다. 산골짜기 저격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범한이 이미 알아차렸다는 걸 상대방이 모른다고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산골짜기를 지나면서 범한은 황제 폐하께서 대체 어떤 안배를 해놓으신 건지 계산을 해보았다. 산골짜기 습격 사건을 이유로 조정의 몇몇 중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새 사람으로 바뀌었고, 이로써 조정은 한 차례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이루었다. 한데 그런데도 진씨 가문과 섭씨 가문의 군 내 위엄과 명성은 여전했으니, 분명 황제 폐하께서는 현 상황을 불만스러워 하실 것이라고 보았다.

황제 폐하는 대체 어떻게 하시려는 걸까? 범한은 종종 이 문제를 자문을 해보면서 자신이 용좌에 앉아 있다면 어떻게 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번 군측 인사이동과 숙청은 분명 조금 더 철저히 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찔끔 건드려 놓고 저들 군측 원로들에게 계속해서 충분히 활동할 기회를 주는 게 아니고 말이다.

어쩌면 서호의 갑작스러운 전진으로 황제 폐하의 전반적인 계획이 엉망이 됐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북제 젊은 황제의 묘수가 상삼호를 통해 발휘되어 황제 폐하에게 어쩔 수 없이 잠시 연소을을 남겨 두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경국에는 아직 7로 정예병이 있고 4로에서는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1 황자가 서쪽을 정벌하면서 키워 놓은 중견 장수들에게는 실력을 발휘할 전장이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진씨, 섭씨, 연씨라는 세 원로의 세력에만 의지할 필요가 있을까?

범한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은연중에 어떤 가능성을 예측해서였다. 약한 척하거나, 유혹하는 것 같은 게 떠올랐다. 잘나가는 아가씨의 유혹처럼 말이다. 한데 그러한 계획은 너무 황당하고, 너무 목숨을 거는 느낌이 있었다. 이에 제멋대로인 범한도 황제 폐하가 경국의 존망은 신경 쓰지도 않고 그런 안배를 하셨다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산골짜기를 지난 마차가 다시 수 리를 더 이동해 오백 명의 흑기와 합류했다. 은색 가면을 쓴 형과는 앞으로 나와 문안 인사를 한 후 조용히 흑기 대열로 돌아갔다. 그러자 오백에 달하는 흑기가 좌우로 조금씩 물러나 주었다. 이로써 경국 영토 안에서는 그 어떤 세력도 범한의 안전을 위협할 수 없게 되었다.

순간 심장이 두근, 하고 뛴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마차 칸이 살짝 움직이며 감찰원의 평범한 관원 하나가 가림막을 열고 들어왔다. 범한이 그를 쓱 바라보고는 탄복했다.

“역시 천하제일의 자객답군요. 과연 위장 능력도 나보다 훨씬 강력하고요.”

그러자 자객은 웃지도 않고 음침한 느낌으로 물었다.

“대인 무슨 분부십니까?”

“경도로 돌아가 줘요.”

범한이 그의 두 눈을 주시하며 의심할 여지없는 말투로 말했다.

“얼른 원장 대인 곁으로 돌아가 줘요. 지금부터는 그분 곁에서 한 치도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그분의 안전을 책임져 줘요.”

그러자 그림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진평평이 직접 범한에게 보낸 사람이었다. 한데 이제는 범한이 갑작스레 자신을 진평평에게 돌려보내려 하고 있었다. 범한이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 실력은 당신도 잘 알거예요. 그리고 그분이 절름발이란 건 당신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분께 가줘요.”

그림자가 잠시 생각을 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마차 대열에서 벗어나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되어 순식간에 산골짜기와 밭을 지나 경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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