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화 태도가 모든 걸 결정한다 (1)
다음날 범한은 감사의 인사를 하러 입궁했다. 비록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 같은 웃음을 지은 채 이곳저곳을 다녔다. 특히 황태후와 황제 앞에서는 감사의 마음을 더 강렬하게 드러내는 한편 이제 막 아비가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또 감격했다는 느낌까지 추가했다. 이에 그의 연기력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
황궁은 눈이 다 녹아 깨끗하고 우아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범한은 동궁에 앉아 앞에 있는 태자마마를 바라본 채 이런 저런 소재를 찾아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범한은 담황색의 의복을 입고 매우 진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태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얼마 후 있을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태자는 그에게 고모와의 관계를, 다시 말해 범한에게 장모와의 관계를 개선할 것을 권유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보아하니, 진심이었다. 다만 태자가 범한과 장 공주 중 누구 입장에 서서 생각해 주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예전 일은 그냥 묻게. 포월루에서 본궁이 자네에게 말했던 것처럼, 어른들의 일이 어찌 지금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겠는가?”
태자가 차분하게 말하며 범한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범한은 이익의 크기만큼 거짓말이 늘어나고 연기자의 연기력도 느는 법이라고 깊이 믿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정에서 모두 그 의자의 귀속권을 놓고 눈치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한데 그 의자는 천하에서 가장 큰 이익이었다. 그러니 태자가 범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새빨간 거짓말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문제는 범한이 태자가 한 말 중 대체 어디까지가 진짜고 또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데 있었다.
그가 태자의 위치에 있었다면 그와 같은 약속을 했을까?
예전 일은 그냥 묻으라고?
태자에게는 타고난 지위와 황태후의 총애, 그리고 장 공주와의 비밀스러운 관계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감찰원과 황실 금고를 쥐고 있는 범한의 지지까지 더하면, 그가 황제로 등극하는 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이었다. 이에 범한의 지지만 받을 수만 있다면 태자는 충분히 희생을 치를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범한이 지닌 삶의 경험과 그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와 같은 거래는 성사될 가능성이 없다는데 있었다. 태자가 정말로 뒷배 없는 사람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정말로 그런 사람으로 변한다면, 어떻게 그런 자와 함께 할 수 있을까?
범한은 태자와 온화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우연히 처음 경도에 왔을 때 태자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훌륭한 태도와 그 일들이 떠올랐다. 이에 마음속을 채우고 있던 복잡한 색상의 구름이 오히려 더 두터워 져 버렸다.
“완아 누이는 잘 지내지?”
황궁에서 정말 여러 곳을 갔었지만 동궁의 태자만 처음으로, 그것도 매우 직접적으로 완아가 잘 지내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범한은 잠시 정신이 멍해져 잠시 웃고는 더듬더듬 태자에게 말을 해주었다. 말을 하는 동안 범한의 눈빛은 상대방의 뺨을 진지하게 주시했다. 그리고 과거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자잘한 것들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태자는 너무 적막하고, 불쌍한 사람이란 점이었다.
* * *
범한이 동궁에서 밖으로 나가는데 석양이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붉은 담벼락 위로 나타난 옅은 붉은색 노을이 점점 주변을 물들여 나갔다. 이에 범한 주변에 있는 키 작은 겨울나무와 전각들도 물들어 갔다. 한데 그건 상서롭지 않은 붉은색이었다.
범한은 뒷짐을 진 채 무슨 생각을 하는 듯 차분한 표정으로 있었다. 오늘 그는 온통 태자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앞서 일순간의 느낌처럼, 지금 와서 꼼꼼하게 생각해 보니, 범한은 그제야 자신을 포함한 다섯 황자 중 실제로는 가장 불쌍한 이가 태자란 걸 알게 되었다. 동궁의 태자는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을 뿐이었다. 섭가는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없어졌다지만, 그렇다면 태자는?
······섭가가 사라지고 4년 후, 경도 피의 밤에 태자의 외가 쪽 사람들은 모두 도살이 되었다. 태자의 외할아버지는 범한의 아버지인 범건의 손에 죽었고, 태자가 잃은 혈육의 수는 범한보다 많았다. 그 후로 태자는 황궁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면서 긴장되고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건 자신을 사랑해주는 황태후와 황후밖에 없는 채로 말이다.
아니, 황후는 그렇다 치자. 아버지께서 예전에 말해주셨던 것처럼 황제 폐하께서 황후와 태자를 폐하지 않은 건 황후가 너무나도 바보 같아서였다. 그리고 외척이 완전히 제거된 형국은 황제가 바라던 바였다.
그러니 태자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황태후뿐이었다. 그리고 황궁 내 환경과 황후가 과거 일을 너무 신경을 쓴 탓에 그는 성장하면서 중도적이고, 겁 많고, 나약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을뿐더러 친구를 만들 수도 없었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건 침묵뿐이었다.
하지만 경국 황제 폐하는 자신이 선택한 후계자가 영원히 침묵하기만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2 황자를 도발해 태자를 조금 더 날카롭게 다듬으려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범한을 도발해 2 황자를 누르게 하고는 범한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태자를 다듬는 데 쓰고 있었다.
한데 이런 기형적인 인생은 자연스레 수많은 심리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침묵하고 또 침묵하는 가운데 폭발하지 않으면 변태로 변할 수 있다. 그런데 태자는 후자를 선택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본심은 지나치게 공포스러운 부분은 없어 보였다.
황궁 담벼락까지 걸어온 범한이 고개를 돌려 우뚝 솟은 태극전을 바라보았다. 태극전은 노을빛 속에서 불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범한이 눈을 가볍게 뜨고 속으로 탄식했다.
‘제가 어찌 당신과 대립하려는 입장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태자와 2 황자를 비교한다면, 사실 범한은 태자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2 황자의 온화한 표정 아래에 숨은 무정함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범한은 2 황자를 낙마시켜서 그의 목숨을 살려주려 하는 중이었다.
물론 같은 수단을 태자에게까지 쓸 수는 없었다. 태자의 지위는 너무 특수해 그는 구름 위로 올라가 용이 되거나 비늘 아래로 피를 흘리며 황천행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2 황자는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황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범한에게 무척이나 많은 기회를 준 것이었다.
태자는 오히려 그와 반대였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 할 수 없어야 자연스레 황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일단 요 1년 동안 태자가 이 점을 숙고하고 있던 거라면 그동안 보여주었던 것처럼 유난히 총명하게 차분함을 유지할 것이고, 이 모든 걸 냉정하게 바라보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차분하다고 해서 너그럽다고는 할 수는 없다. 만약 범한이 정말로 그러한 거짓된 모습에 속아 마음이 약해진다면, 상대방이 등극한 후 범한이 맞게 되는 건 분명 현 황후의 미친 듯한 추적과 복수, 그리고 장 공주의 인정사정없는 숙청일 것이다.
그런데 그때가 되면, 태자가 범한의 생명을 생각해 줄까?
2 황자를 아직 격퇴시키지 않았는데 태자도 갑자기 튀어나오자······ 범한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마음을 더 냉정하게 다잡고 생각했다.
‘세상살이란 게 살아가려니 정말 쉽지 않군. 그러니 태자는 내 탓 하지 마시오.’
범한은 마지막으로 타들어가는 듯한 황궁의 노을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사실은 저 용좌에 앉아 계신 중년의 남자 때문이었다.
범한은 느닷없이 살짝 즐거워졌다. 문득 저 중년 남자가 부끄러움에 화를 내고 발광하는 모습을 보고, 황제 폐하의 위장된 차분함을 깨부수어 버리고 그에게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선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결국, 다 잔인한 사람이었다.
* * *
구름이 적고 하늘이 높았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맑은 날이었다. 경도성 문밖으로 뻗은 도로 양측에 잎이 다 떨어진 겨울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고, 나뭇가지는 이빨과 발톱을 세운 것처럼 흉악한 모습으로 고향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검은 마차 대열이 성문에서 줄줄이 나오더니 도로 옆으로 정렬을 했다. 그런 후 그들은 앞쪽에 있는 사람들이 흩어지기를 기다렸다. 한 젊은이가 마차 가림막을 열고 나와 마차 앞에 서서 이마에 손을 얹어 햇빛을 가렸다. 그리고 한쪽을 바라보며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저건 또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젊은이는 바로 범한이었다. 때는 이미 2월로 접어든 시점. 범한은 경도에 더 남아 있을만한 핑계를 찾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현 국면에서는 자신이 경도를 떠나 있는 게 훨씬 유리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야 일이 일어난 후 자신이 연루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사사가 임신한 건 그에게는 살짝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범한은 상의를 통해 완아에게 경도에 남아 사사를 돌보도록 해 놓고 자신은 혼자 강남으로 떠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오늘은 그가 경도를 떠나는 날이었다. 앞서 얻은 교훈도 있고 해 범한은 자신의 출발 사실을 몇몇에게만 알렸다. 그래서 태학에 있는 젊은 문인들도 범한이 떠난다는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번 출발은 비교적 차분하고 살짝 적적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범한이 도로 전방에 정렬해 있는 경국 장수들을 보며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도로 한쪽에 있던 이별의 슬픔이 짙게 드리워진 송별대 안에서 기마병 몇몇이 떨어져 나왔다. 그들은 빙 돌고는 곧장 범한의 마차 대열로 향했다.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그들을 범한은 웃는 얼굴로 마차에서 내려 기다렸다.
기마병 중에서 제일 앞에 있는 군관은 면으로 된 옷 위에 얇은 갑옷을 입고 있어 영웅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몇몇 보좌진들이 따르고 있었다.
제일 앞에 있던 군관이 범한 앞에 서서 채찍을 휘두르고 말에서 내렸다. 군더더기 없이 매우 깔끔한 몸놀림이었다. 그가 얼굴에 쓰고 있던 보호대를 벗었다. 온화하면서도 영웅의 기개가 있는 얼굴인데, 이제 보니 정왕 세자인 이홍성이었다.
“우리 둘이 동시에 경도에서 출발하게 되었군.”
이홍성이 범한의 어깨를 힘을 주어 두드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했다.
“경도에 멀쩡히 잘 있다가 왜 군에 들어간 겁니까? 사내로 태어나 공을 쌓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꼭 사막에서 그것을 구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요. 왕야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면 세자가 이 같은 결정을 내린 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경국은 말을 타고 누비며 천하를 얻었다. 이에 민간의 풍습은 소박하고 실질적이고 강인했으며, 황족인 자제들도 어려서부터 무예와 말 타는 법을 익혔다. 윗세대부터 군과 함께 정벌 활동하는 게 몸에 익어 있었고, 이번 세대 중에서는 1 황자가 가장 모범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개 낮은 교관부터 시작해 대장군의 위치에 오른 경우였다.
이 홍성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대꾸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경도에 남아 있으면 부왕께서 나를 왕부 안에 가둬두시기나 할 텐데······ 그건 감옥 생활과 다를 바 없지. 그러니 그런 식으로 계속 굴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서역으로 가서 괴상하게 생긴 서호인이나 죽여야겠네.”
그러자 범한은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없다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대꾸했다.
“꼭 건강히 지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미안하니까요.”
“자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이번 출정은 손해는 아니구먼.”
이홍성이 살짝 어리둥절해 하다가 웃음을 지었다.
“이왕 사는 거 삶의 목표가 몇 개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번에 정서군(征西軍)에 들어간 건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걸 하는 셈이라네.”
이에 범한이 말했다.
“그런 인생의 이상향을 갖고 있는 줄 나는 몰랐습니다. 나는 그저 세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은 꽃놀이 배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을 의식해 더는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이홍성이 말고삐를 쥐고 범한과 나란히 앞으로 나아가 도로 아래쪽 언덕으로 갔다. 이곳에는 잎이 다 떨어진 고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하늘을 어두컴컴하게 가려버려 한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고요함뿐이었고 그 누구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