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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16화 (616/1,108)

616화 부모 된 자 (3)

신문과 작위, 이 두 가지가 선물로 내려지자 황궁에서 느낀 기쁨이 경도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그러자 앞서 선물을 보냈던 관원들은 마음을 푹 놓게 되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그래서 요 태감이 들고 온 예단이며 붉은 종이를 보고 복잡한 마음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옆에 있는 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황궁에서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걸까요? 제 아이와 그분들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토라진 게로구나.”

범건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네가 조금 더 성숙했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토라져 있던 거로구나. 무슨 관계라니? 네 생각엔 무슨 관계인 것 같으냐? 제3대가 될 첫 번째 아이란다. 황태후마마께서 몇 년 동안 마음을 졸이셨는지 모를 게다. 그러다 드디어 귀한 손자를 안아보실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쁘셨을 테고, 이리 파격적으로 상을 하사하신 게란다.”

범한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귀한 손자를 안아보시게 되었다고요? 내일 사사를 담주로 돌려보낼 것입니다. 담주에서 아이를 낳고 자라게 할 거고, 할머니께서 안고 데리고 놀게 할 것입니다.”

이 역시 토라져서 한 말이었다. 사사는 임신 중이니 천리의 험한 여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범건은 범한을 꾸짖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아 그냥 큰 소리로 웃기만 했다. 나흘 전에 사사의 회임 소식을 들은 후부터는 줄곧 엄숙하고 단정했던 호부 상서도 기분을 숨기지 못했고, 그의 얼굴에서는 기뻐 득의양양해 하는 표정이 떠날 날이 없었다.

이 세계에서 황제와 아들 쟁탈전에서 이긴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군다나 그 아들은 곧 자기에게 손자를 낳아주게 되어 있었다. 이에 범건 대인은 안도감과 영문 모를 득의양양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 황궁에 들어갔을 때 감사 인사드리는 거 잊지 말 거라.”

범건이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아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한데 아들은 자기가 한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태자마마께는 왜 아직까지도 태자비가 없는 것입니까?”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순서대로 진행된 것이기는 하지만, 1 황자마마와 2 황자마마 모두 혼례를 올리셨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났습니다. 설마 태자마마의 경우는 황궁에서 시급히 여기지 않으시는 겁니까?”

정말 자연스럽게 던진 질문이었다. 말 속에 슬쩍 끼워 넣어 말한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게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이었다. 범건은 기쁜 나머지 아들이 자신을 시험해 보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3년 전에 황태후마마께서 태자비를 맞을 계획을 서둘러 추진하셨단다. 황후마마께서 경도 각부에서 신부를 선발하겠다고 알리셨고, 심지어는 우리 집으로도 연락이 왔었지······.”

범한은 순간 부르르 떨며 생각했다.

‘약약이가 그때 황자비가 되었다면······ 정말 끔찍했을 거야. 그건 누이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끔찍한 일이지. 나는 곧 태자를 거꾸러뜨릴 예정이잖아. 나는 지금 형제인 태자에게 적장자가 가진 자리를 빼앗기 위해 계획을 꾸미는 중이잖아? 그러니 약약이가 태자비가 안 돼서 정말 다행이야.’

범건이 말을 이어 갔다.

“한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태자마마께서 계속 동의를 안 하시니······. 그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었어. 태자마마에 대해 너도 잘 알다시피, 어려서부터 방탕하셨단다. 관기가 있는 교방이며 기방을 자주 다니셨다. 한데 남녀 간의 일을 많이 좋아하는 분이 이상하게도 혼례는 올리려 하지 않으시더구나.”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본 후 대답을 했다.

“하오나 태자마마의 혼사는 그분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 아닙니까.”

“바로 이런 점에서 태자마마의 총명함이 나오는 거란다.”

범건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황태후마마와 황후마마를 설득하려면 태자마마도 많은 걸 생각했어야 할 거다. 우선, 1 황자마마와 2 황자마마가 모두 혼례를 올리시지 않았었지. 경국은 효로 천하를 다스리니, 형제간에도 위아래를 나눠야 하고. 아우 된 입장에서 두 형님보다 먼저 혼례를 올릴 수 없다고 하신 거다······ 그때 1 황자마마께서는 아직 서역에서 서호들을 상대하고 계셨단다. 바로 혼사를 올리실 수 없는 입장이니, 그것 때문에 뒤로 미루게 된 거란다.”

“이유는 충분하지만 설득력이 없습니다.”

범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조혼에 있어서는 대표 격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도 첫 번째로 낳게 되고 말입니다.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마찬가지의 이유란다. 천자 가문과 관련한 일이니 설득력을 가진 사람이 말해줄 필요가 있었지.”

범건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태자마마는 당시에 태자의 태부로 있던 서무 대학사께 움직여 달라고 도움을 청하셨단다. 서 대학사는 강직한 사람이라 태자마마의 말씀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어. 그래서 황제 폐하께 상주문을 올려 태자마마의 혼사를 잠시 연기해 달라고 건의한 건 물론이고 북쪽으로도 편지를 써서 장묵한 대가에게도 한마디 해달라고 요청했단다.”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예전에 장묵한 선생께서는 그런 일도 하셨군요.”

범건이 갑자기 아들의 미간에 드리워진 피곤함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잠을 못 잔 거니? 얼른 가서 쉬거라.”

이에 범한은 난처하게 웃어 보이고는 인사를 하고 서재에서 나왔다.

요 며칠 확실히 못 쉬긴 했었다. 그 이유는 첫째, 사사가 임신을 해서 그녀 곁을 지켜주고, 더 달래주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싶어 그녀를 보살피느라 시간을 보내서였고, 둘째, 완아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사사에게 이것저것을 챙겨주고 있지만, 그래도 여인의 마음이니 수백 번도 더 바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이에 범한은 가슴이 아팠고, 자주 완아와 함께 있어 주면서 그녀를 달래주어야 했다. 이렇게 양쪽을 다 돌보다 보니 자연스레 자신이 쉬어야 하는 시간은 줄어들게 된 것이다.

서재 앞쪽으로 난 복도에서 범한이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그리고 고뇌에 차 고개를 가로로 내젓다가 문득 언제 있었던 일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집 안에 있는 정원에서 깨닫게 된 인생의 지극한 도리가 생각났다.

‘남자가 결혼을 일찍 하는 건 결국에는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태자가 계속 일찌감치 혼례를 올리기를 거부한 건 어쩌면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에 범한은 하품을 하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태자가 그렇게나 정이 많은 사람인 줄 몰랐군. 진짜 악연이 따로 없어!’

바로 그때 유씨가 온화하게 웃으며 늙은이 하나를 데리고 걸어왔다. 깜짝 놀란 범한은 입을 떡 벌리고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길길이 뛰며 크게 소리부터 질렀다.

“드디어 와주셨군요!”

방문자는 단순한 손님이 아니었다. 그는 범한이 대단히 존경하고, 신뢰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비개 스승님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두 사람이 새해 들어 처음 만나는 것이다 보니 늙은이와 젊은이 사이에는 우레가 번뜩이고 강풍이 불며 금세라도 칼을 번쩍일 것만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그리고 언제든 독약을 꺼내 들고 서로에게 맛보라고 권유할 것만 같았다.

유씨는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연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이곳에 더는 남아 있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에 두어 마디 말을 건네고 자리를 비켜주고는 비개가 찾아왔다는 중요한 소식을 범 상서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스승님.”

범한이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비개의 이상한 색상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동안 저를 피해 계셨는데, 어째서 오늘은 오신 겝니까?”

비개가 불쾌한 기색으로 범한을 쓱 쳐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좋은 일은 생각도 말 거라. 네가 보내 준 약과 약방문을 여러 차례 시험해 보았다. 아무 문제도 생기면 안 된다 생각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매우 어렵더구나.”

범한이 고뇌에 차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비개가 찾아온 이상은 문제를 해결했을 거라 여겨서였다. 한데 첫마디부터가 저런 멋진 대답이 아니라니.

사실 그동안 범한은 완아가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말고의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신에게 후세가 있고 없고도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다. 담주 절벽에서 오죽 아저씨에게 3대 목표 중 하나로 말했던 아이를 많이 낳겠다는 건 우스개 이야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임완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를 무척이나 갖고 싶어 했고, 이에 범한도 압박감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과 제자가 저택 후원의 조용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여종 하나가 차를 내어다 주고는 물러났다.

“사촌 남매끼리 혼인을 했는데, 후세에게 영향이 가지는 않을까요?”

말을 마친 범한은 한동안 아무 말도 않다가 오랫동안 단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던 문제에 대해 물어 보았다.

비개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쉰 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네 운이 그렇게나 나쁘다고 생각하는 거냐?”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으로 비개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건 확률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자신이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란 사실에 조금도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어쩌면······ 아이를 갖기가 비교적 힘들겠죠?”

범한이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누가 그러던?”

비개는 그가 근친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비웃어 주었다.

“백여 년 전 북위 황제는 자기 딸을 십여 년 동안 강제로 취해 새끼 일곱을 낳았지. 물론 그 녀석들 중에 정상은 몇 안 되었다.”

비개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문란하군요······ 황실은 과연 천하에서 가장 문란한 곳이에요.”

범한이 탄식했다.

비개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제자가 마지막으로 한 말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은 연관된 게 너무 광범위해서 범한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과 진평평은 사전에 범한에게 무언가를 말해줄 수 없었다.

“스승님께서는 오늘 뭘 알려주시기 위해 오셨습니까?”

범한이 진지하게 물었다.

비개가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입을 열었다.

“진 대인께서는 네가 집에서 편치 못하게 지낼 거라 여기시더구나. 그래서 너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를 보내셨단다.”

“안심이라.”

“그렇단다. 내게 반년 정도 시간을 더 다오. 그러면 너희 부부의 골칫거리인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비개가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꼭 당부할 게 하나 있단다. 강남으로 돌아가야 하는 때가 다 되었더구나. 사사가 회임했다는 걸 핑계로 강남으로 가지 않는 짓은 하지 말 거라.”

황궁 내 태도를 보니 범한은 이번 일로 경도에 묶여 있게 될 것처럼 보였다. 한데 이것이야말로 진평평과 비개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일이었다. 범한은 잠시 생각을 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진평평과 비개 스승님은 자신이 경도에서 너무 오랫동안 뭉개고 있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걸 은연중에 알 수 있었다. 분명 경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거란 걸 알아차리신 것 같았다.

비개는 소싯적 범한의 스승님이었다. 그러니 그가 봤을 때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해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사람이었다. 이에 참다못한 범한이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황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예정입니까?”

그러자 비개가 웃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겠느냐!”

그의 눈빛에서 살짝 걱정이 스치기는 했지만 범한의 눈은 충분히 속였다.

그는 십여 년 전과 똑같이 맑고 티 없는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그와 함께 무덤을 파고, 시체의 배를 갈라 내부 장기를 꺼내서 보던 때가 떠올랐다. 이에 마음이 살짝 암담해진 그가 웃으며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조금 더 조심해야 한다. 어렸을 때처럼 다른 사람한테 속지 말고 말이다.”

범한은 살짝 경악했다. 그리고 순간 기괴한 기분이 들어 곧장 추궁하듯 물었다.

“스승님,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십니까?”

비개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머리가 지저분하게 날리는 데도 신경 쓰지 않고 대답을 해주었다.

“별 뜻 없이 한 말인데. 내가 허구한 날 산속을 헤치고 다니느라 네 곁에는 거의 있어줄 수 없다는 걸 잘 알지 않느냐······. 그렇지. 일연빙. 이 약에 대해서는 내가 너에게 제대로 말해준 적 없었으니, 그건 내 잘못이구나.”

범한은 감동을 받았지만 그래도 서둘러 대꾸를 했다.

“스승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승님이 안 계셨으면 우리 부부는 여러 번 죽었을 겁니다.”

그러자 비개는 잠시 웃기만 하고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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