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화 부모 된 자 (2)
임완아는 살짝 얼이 빠져 있는 상공을 달래주고 싶었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찌감치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대체 얼마나 빛나는 분이셨는지는 어려서 궁에서 자란 그녀는 정말로 잘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만은 아녜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그 상자를 열었을 때 범한은 살짝 실망했었다. 왜냐하면 그 서한은 자신이 아닌 오죽 아저씨에게 남겨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서한의 내용은 그에게 더 큰 실망감만 안겨주었다.
“그분은 나를 막돼먹은 아들이라 불렀지요.”
범한이 미소 지은 얼굴로 계속 말했다.
“더군다나 내게는 단 한마디도 남기지 않으신 채······ 그냥 돌아가셨어요. 그런 무심함과 차분함은 냉정함을 넘어서서 황당해 보이기까지 하더라고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기 처지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출생은 어쩌면 애당초 황당한 일이 아니었을까.
범한이 말을 계속할수록 듣고 있는 임완아는 가슴이 서늘해져만 갔다.
“그분은 이 위험한 세계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 아무런 조언도 남겨주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누가 믿어야 할 사람인지조차 알려주시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밥을 먹을 때는 뭘 먹어야 하고 아내는 어떻게 사랑해줘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 게 단 하나도 없었어요.”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천하 만민에게는 크나큰 사랑을 갖고 계신 분이 자기 자식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으셨더라고요. 이거야말로 막돼먹은 거 아닐까요? 그런 막돼먹은 어머니가 있으니까 나 같은 막돼먹은 아들이 나온 거라고요.”
말을 마친 범한이 가볍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임완아가 그의 다리 위에서 일어나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다행히 아버지께서 계시긴 계시는군요······.”
범한이 앞채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할머니도 계시고, 그 두 괴상한 노인분들도 있었네요.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내 삶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에요.”
범한은 줄곧 자제심이 강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늘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임완아는 단 한마디도 껴들지 않고 그를 계속 바라봐 주었다. 그러는 동안 단순히 가슴이 아파 탄식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어느새 은은하게 미소 지은 얼굴로 그의 독백을 들어주고 있었다.
“내가 노래 한 수 불러줄게요.”
범한이 갑자기 진지하게 말을 바꾸었다.
임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 큰 남자가 어떤 노래를 불러주겠다는 거지?’, 라고 생각하며 궁금해했다.
범한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목 상태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맑고 투명하면서도 살짝 우수에 찬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매우 슬픈 곡이었지만 살짝 기대감 같은 것도 숨어 있었다.
비 내리는 처마 밑에서 아이는 턱을 쭉 빼고 엄마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이 불어와 아이의 흰 옷자락을 힘없이 펄럭이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데 선율에 이끌려 가다 보니 말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슬픔 때문에 어느덧 시선은 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 * *
노래가 끝을 맺었다.
“무슨 뜻이에요?”
범한이 부른 것은 임완아가 들어보지 못한 언어로 되어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게 매우 괴이한 소리로 들렸다.
“가사 내용은 간단해요. 대략 이런 내용이에요.”
모친 대인, 안녕하세요?
저는 어제 삼나무 가지 끝에서
반짝이는 별 하나를 보았답니다.
별이 저를 보고 있는데
모친 대인처럼 무척 따스했어요.
그래서 별에게 말했어요.
좌절을 견뎌내겠다고 말이죠.
저는 사내아이니까요
만약 고독감이 밀려오면,
저는 말할 거예요.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러면 그렇게 할게요. 답장 주세요.
모친 대인께.
잇큐 올림.
잇큐 올림.
모친 대인, 잘 지내셨어요?
어제 사원에 있는 작은 고양이를
옆 마을 사람들이 데려갔어요.
작은 고양이는 울면서
엄마를 꽉 끌어안았어요.
그래서 제가 말해줬어요.
울지 말라고.
너는 외롭지 않을 거라고.
너는 ‘남자니까’라고.
다시 엄마를 만날 때가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분명 그럴 거라고.
그러면 그렇게 할게요. 답장 주세요.
모친 대인께.
잇큐 올림.
잇큐 올림.
눈가가 벌게진 임완아 향해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멋진 곡이죠?”
“네.”
임완아가 물었다.
“잇큐가 서한을 쓴 사내아이겠군요? 너무 불쌍해요.”
“그래요. 정말 정말 똑똑한데 자기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없는 불쌍한 아이지요.”
범한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나와 무척 닮긴 했는데······ 그 아이에게는 서한을 보낼 주소라도 있었죠. 한데 나는 어디로 서한을 부쳐야 하는 거죠?”
“그 곡 제목이 뭐에요?”
“모친 대인이요.”
* * *
조용한 침실 안. 창밖에서 들어오는 은은한 자연광에 기대어 범한이 열쇠를 꺼내 검은색의 긴 상자 맨 바깥쪽 부분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런 후 손가락으로 차분하게 몇 번 누르고 나니, 범한은 갑자기 오죽 아저씨가 보고 싶어졌다.
위쪽에 있는 금속의 기구와 그 얇은 서한을 천천히 꺼낸 범한은 그것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서한에 담긴 내용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의 눈빛은 세 번째 단 위쪽에 있는 쪽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건 언제든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쪽지였다. 쪽지 위에는 반듯반듯한 섭경미의 글씨체가 있었다.
“이봐, 만약 오죽이 보는 거라면······ 우리 솔직해져 볼까? 너 누구야!”
범한은 그 비가 왔던 날처럼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
“당신 아들인데요.”
“대체 누군데 이 상자를 연 거야?”
“내 딸이거나 아들이면, 누군가를 살려야 할 때 아래에 있는 물건을 보거라. 이 점 꼭 명심하기 바란다!”
범한은 세 번째 단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서 물건을 꺼내 위에 쓰여 있는 글자를 보았다. 그런 후 참다못해 씁쓸하게 웃으며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 낙태약이었다. 저기요, 엄마······ 장난이라도 좀 창의적으로 하실 수는 없었나요?”
그 후로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범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감에 찬 웃는 얼굴로 상자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엄마, 사람을 살릴 생각이에요. 하지만 이 물건은 쓰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는 모든 걸 우스개일 취급하는 게 습관이 되신 거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에도 무지 웃긴 방식으로 제 곁을 떠나셨고요. 하지만 저는 달라요. 어떻게든 이 세계에서 살아 나갈 거예요. 제 딸이든 아들이든······ 그들과 함께요. 믿어 주세요. 어떻게든 그 아이를 잘 돌볼 거예요······. 적어도 어머니보다는 잘 할 거라고요!”
* * *
범씨 가문의 좋은 소식은 곧장 날개를 달고 각 권문귀족들이 사는 저택의 높은 담벼락을 넘어 들어가는 것은 물론 찻집에서 조심스레 일하고 있는 일꾼에게까지 날아가 모두가 다 아는 일이 되었다. 이에 경도 왕공귀족들의 열띤 토론 주제가 되었으며, 백성은 식후 또는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소재가 되었다.
이 소식은 당연히 황궁에까지 날아갔다. 웅장하게 가로막고 있는 담벼락을 무시하고 넘어가 결국에는 황제와 황태후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요 태감이 조용히 퍼뜨린 소문에 의하면 황제 폐하께서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가볍게 수염을 쓰다듬었다고 했다. 매우 만족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다시 그 작은 전각에 납시셨다고 했다. 한편 황태후 할머니는 소식을 들은 후 서둘러 함광전 뒤쪽으로 가서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고 했다. 손가락 끝으로 염주를 계속 어루만지고 있었는데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고.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기는 하지만, 범한을 포함해서 경국 황제에게는 모두 다섯 아들이 있었다. 3황자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잠시 논외로 해도 1 황자는 제법 나이가 있고 혼인을 했어도 아직 자식이 없었다. 2 황자와 태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리저리 계산해 봐도 범씨 집안에 속해 있는 사사 배 속의 아이가 황실 제3대 중 첫째가 되는 셈이었다.
황궁에 있는 귀인들은 얼떨결에 기뻐했지만 황태후만은 은근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번에 회임한 이가 신아였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신아의 신분이 군주라는 걸 떠나 그녀가 범한의 정실이기 때문이었고······ 자신이 가장 예뻐하는 외손녀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으니 범한의 권세와 지위 때문에라도 저택에 무수히 많은 축하 선물과 축하객들이 몰려들 게 뻔했다.
그런데 정말로 며칠 동안 성 남쪽에 위치한 범씨 가문 저택의 대문 앞으로 마차가 줄을 이었고, 각로 관원들의 끝도 없이 찾아 왔다. 이에 등자경 부부는 나중에는 다리가 풀릴 지경으로 계속해서 바삐 뛰어다녀야 했다.
정왕부 사람처럼 일부 중요한 인사들이 방문했을 때는 범한이 직접 나와서 맞았다. 하지만 나머지 손님의 경우는 호부 상서 범건이 직접 나서서 막아주었다.
다행히 손님들은 중요한 선물만 전달하러 온 거라 너무 오래 머물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정과 황궁 사람들에게는 사실은 다 계산이 있었다. 비록 범한에게 아이가 생기는 큰 경사였지만, 그래도 임신한 쪽은 첩실이었다. 그러니 저택 내 군주마마의 기분이 어떨지 생각하지 않은 채 마냥 열정적으로 축하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한쪽에게 잘 보이자고 다른 쪽에게 밉보이게 되면, 이건 제대로 된 거래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관원들은 황궁에서 얼마만큼 좋아하고 계시는지 아직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 * *
3일 후 경국 관원과 백성의 눈에 비친 황궁에서의 기쁨은 두 가지로 요약이 되었다. 하나는 궁정에서 테두리를 아름답게 두른 신문을 발간한 건데, 붉은색을 사용함으로써 천하 만민에게 그 경사스러운 소식을 알렸다.
궁정에서 발간하는 신문에서는 줄곧 관원들의 연애사를 둘러싼 사랑과 질투라는 웃긴 이야기를 담아왔다. 그중 하나가 진평평의 첫사랑 이야기였다. 비록 재미없고 특색 없는 글이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한편 범한은 감찰원을 맡은 후 기풍 바로 잡기를 통해 감찰원의 광명화를 이끌었다. 이를 위해 8처에게 1처 입구에 무수히 많은 공고문을 붙이게 했고, 음산한 관료 사회의 알력싸움을 사건 해결 과정이라는 글로 엮어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전생에서든 현생에서든 베갯머리에서 벌어진 일과 주먹으로 밀어붙인 일은 제일 잘 팔리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궁정 신문은 베갯머리 이야기만 있고 주먹으로 밀어붙인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반면 1처 문 앞에 걸린 공고문은 그 모든 걸 담고 있어서 어느새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범한에게 자식이 들어서자 다행히도 황제는 범한과 관련한 내용을 궁정 신문에 대서특필할 수 있도록 윤허했다. 이에 신문에서는 범한이 담주와 경도에서 겪은 일을 장편의 재미난 소설로 엮었다. 글에서는 은연중에 군주, 북제 성녀, 범씨 가문 저택의 젊은 어머니가 한 일, 황궁에서 시를 지은 사건, 강남에서의 일 등등의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그건 범한의 20년 인생을 총괄한 것이기도 해 매우 다채로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에 신문이 출간되자마자 경도에서는 없어서 난리였다. 각부의 아가씨들은 집안 어른들에게 부탁해 거액을 들여 사들인 후 이것을 규방에 비치해 두었다. 그리고 신묘를 향해 자신에게도······ 범한 같은 남자를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이로써 궁정 신문은 1처 공고란 앞에 몰려 있던 경도 백성들을 다시 빼앗아오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황궁에서 기뻐한다는 걸 보여 준 두 번째 사건은 바로 상을 하사한 것이었다.
황제인지 황태후의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황궁에서 하사한 상이 범씨 가문 저택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비록 아이를 가진 건 사사였지만 범건부터 유씨까지, 그리고 저 멀리 북제에서 공부하고 있는 범약약까지 큰상이 내려졌으며, 범한의 본처인 임완아는 가장 큰 상을 하사받았다.
능라 비단, 금과 옥기 등 먹는 것부터 장난감까지 저택에 빼곡하게 쌓여갔다. 그 바람에 등대가의 아내는 너무 바빠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도련님께서 예전에 황제 폐하를 구하고서 받은 상이 이것만 못한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사사에게도 상이 내려졌다. 그녀에게 칭호가 내려졌는데, 범한은 왜 칭호가 내려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당연히 그건 아직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 작위가 내려져서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