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화 범한이 범삼보가 된 이유 (2)
깜짝 놀란 범한은 갑자기 뛰어들어온 사내를 주시했다. 그리고 갑자기 뛰어들어와 소리를 지른 사내가 등자경이란 사실을 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꾸짖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정신없이 말하는가? 장원으로 돌아가 춘시 때 있을 무과 시험이나 준비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왜 또 경도까지 달려온 건가?”
범한은 등자경이 벼슬길에 오르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는 그가 담주에서 경도까지 자신을 데려와 주고 성심껏 돌봐주다가 다리가 불편해진 것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등자경은 왕계년과 비슷한 심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관료 사회를 동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범한 곁에서 지내는 걸 더 좋아했다. 더군다나 병서(兵書)며 육략(六略)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자 장원에서 책을 붙들고 있은 지 사흘도 안 되어 곧바로 이곳으로 뛰어와 버렸다.
등자경이 대단히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이곳까지 온 중요한 이유가 생각나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도련님, 얼른 댁으로 돌아가 보시지요. 어르신께서도 돌아와 계시고, 온 가족이 도련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는가?”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임대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문밖으로 나가 마차에 오르려 할 때였다.
범한 뒤를 따르고 있던 등자경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유씨 마님께 아이가 생겼습니다.”
범한은 순간 얼떨떨했다. 이에 제자리에 서서 뒤로 돌아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설마 내게 형제가 하나 더 생긴단 말인가? 아버지 대인께서는······ 과연 비범하신 분이시군.”
등자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자기가 한 말 중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아차리고는 급히 말을 수정했다.
“큰 마님이 아니시고, 작은 마님에게 생겼습니다.”
범한은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마차에 올랐다. 그런 후 대보의 옷을 다시 여며주고는 고개를 돌려 화를 내며 물었다.
“좀 명확히 말하게. 유씨 가문인 국공 댁에서 회임 소식이 날아든 걸 가지고 그리 긴장할 건 없지 않은가?”
그러자 참다못한 등자경이 웃으며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국공 댁이 아니라 우리 범씨 저택 일이고요······ 사사 아씨가 회임했습니다.”
범한은 정신이 멍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자신은 사사를 일찌감치 첩으로 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를 누이처럼 생각하고 대해왔었다. 그래서 그녀를 자신의 첩실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매우 공교롭게도 사사는 어려서부터 담주 저택에서 자랐는데도 성(姓)이 없었다. 그래서 경도로 온 후 사철이의 어머니인 유씨가 그녀를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 생각해 매우 잘 돌봐준 것은 물론 나중에 사사에게 자신의 성까지 붙여 주었다.
그러니 유씨 작은 마님은, 유씨 작은 마님은 그러니까······ 사사를 이르는 것이었다. 그러니 범한으로서는 바로 반응을 내보일 수 없던 것이었다.
“사사가 정말로 임신했다고?”
범한이 껄껄껄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겠군. 회임 초기에 여인들은 성질머리가 고약해진다던데. 특히나 늦게 가면, 사사처럼 성격이 시원시원한 여인에게는 한바탕 원망 듣기 딱 좋으니 말일세.”
마차는 덜덜거리며 거리를 따라 성 서쪽을 빠져나와 범씨 가문 저택이 있는 성 남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마차 안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누군가가 몸이 튕겨져 나오는 바람에 바보같이 딱딱한 마차 벽에 머리를 부딪힌 후 내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이내 마차에서 놀라움과 당혹감이 뒤섞인 끔찍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행인들에게도 들릴 만큼 큰 소리였다.
“사사가 임신했어! 그러면 나도 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렇다. 범한은 경국이란 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 때문에 내면의 나이가 37살이었고, 그리고 이제야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 후대를 남기려는 건 영원히 본능에 통제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두 번째 강렬한 욕구였다. 그러니 이치를 따져 본다면, 충분히 성숙한 범한은 이 놀랍고 기쁜 일과 마주했을 때 감정을 통제하면서 진심으로 기쁜 마음을 표현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표현법에는 분명 문제가 좀 있었다. 왜냐하면 너무 흥분해서였다. 너무 흥분해서 감정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기쁨 외에도 동시에 두려움까지 드러내고 만 것이었다.
* * *
사사의 침대에 앉아 범한은 자기보다 두 살 많은 여인을 바보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사사는 얼굴이 살짝 창백해져 있었다. 느닷없이 자기 뱃속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걸 안 후, 긴장을 해서 그런 것 같았다. 바보처럼 사사를 바라보고 있던 범한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바로 임신이 된 거지?”
임완아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사사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완아의 얼굴에는 기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임완아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줄곧 범한에게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사사가 임신을 하고 범한에게도 후사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자 아내 입장에서 임완아는 기분이 좋았다. 만약 평범한 가정이었다면, 어쩌면 자식을 낳지 못한 본처가 첩실이 아이를 가졌다고 질투할 일이었다. 하지만 사사와 신분 차가 크기는 했어도 임완아 입장에서는 그런 질투는 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에 범한이 이상한 질문을 하자 참다못한 임완아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고 꾸짖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자 범한은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북쪽에 있는 그 사람이 자기 혈육을 잉태했을지를 두고 걱정하던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곁에 있는 여인이 덜컥 임신을 해버리자 걱정과 기쁨이 교차되고 기분이 오락가락해 결국에는 대보 동생 이보를 이어 범삼보가 되고 말았다.
* * *
임완아가 그릇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가자 범한이 침대에 누워 있는 사사를 바라보며 온화하게 말했다.
“편히 쉬게.”
사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범씨 가문 저택 뒤채 침실에 딸린 곁채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오늘 갑자기 의원으로부터 임신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유씨가 앞장서서 편안한 방을 마련해 주고 그녀를 그 방으로 옮기게 한 터였다.
고개를 돌려 방 안 물건들을 살펴본 범한은 새어머니에게 은근히 감동을 받았다. 그러다 살짝 초췌해진 사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잘못이네. 내가 마지막으로 소식을 알게 되는 사람이 되다니.”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범한은 따스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리고 임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듣기 좋은 말을 더 많이 해줘야 했다. 그런데도 범한은 고작 몇 마디 하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바보같이 사사의 얼굴을 바라만 보면서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사사가 눈가가 붉어지더니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 별로 안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범한이 깜짝 놀라 펄쩍 뛰며 씁쓸하게 말을 이어 갔다.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그래. 마음의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거든.”
범한이 사사의 손을 잡아끌더니 천천히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내 마음속에서 자네는 줄곧 내 옆에서 먹을 갈아주던 여종이었지.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을뿐더러 담주에서도 돌아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자네가 뜻밖에도 아이 엄마가 된다기에.”
“우리 바보 같은 도련님, 우리가 담주에서 떠난 지 벌써 3년이나 됐거든요!”
사사가 눈물을 거두고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침대에 몸을 반쯤 기댄 채 부드러운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강남으로 가는 동안 함께 지낼 때도 담주에서 정식으로 첩이 된 후에도 그녀는 옛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범한을 도련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늙게 되도 나는 마음의 준비는 안 하고 있을 것 같군.”
범한이 안타까운 듯 손바닥을 치며 말을 이어 갔다.
“아버지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확실히 좀 두렵거든.”
“도련님께서 뭐든 다 하실 수는 있어도······ 아이 낳는 건 여인이 하는 일이라고요.”
“뭐든 다 할 수는 있다고 했어? 아이는 여인이 낳을지 몰라도 아이를 교육하는 건 남자의 일이지······ 아이 하나를 어른이 될 때까지 키우는 일은 어려운 일이야.”
범한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사사의 살짝 불룩한 아랫배를 만져주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다시 자책하기 시작했다.
“아까 아버지께서 이미 4개월이라 하셨는데······ 왜 나에게는 일언반구도 안 한 건가? 내게는 부끄러워 말을 못 했다 쳐도, 그래도 아씨 마님께는 말을 했어야지.”
사사는 자기 배를 만지고 있는 손바닥이 느껴지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에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리고는 살짝 두려워하며 말했다.
“두려웠습니다······ 진짜 임신한 게 아니면 어쩌나 두려웠습니다.”
“아이가 어찌 진짜 가짜가 따로 있겠는가?”
범한은 눈을 감고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볼록한 감촉을 느껴보았다. 그러자 이런저런 감정들이 복잡하게 스쳤다. 기쁨, 두려움, 그리고 살짝 시큰한 마음······.
‘이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내 아이라고?’
자신이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공포가 기쁨을 압도해 버렸다. 다행히 정신만은 똑바로 차리고 있던 터라 사사 앞에서 그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이제 막 엄마가 되는 사사는 그런 범한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을 것이다.
범한이 살짝 머리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나는 이제 뭘 해야 하는 거지?”
그러자 사사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도련님, 당연히 드시던 식사는 계속 드시고, 주무셔야 할 때 주무시면 되지요. 제가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매일 제 곁만 지키고 계실 수는 없잖아요!”
범한이 갑자기 사사의 팔목을 가볍게 끌어당겨 그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는 그녀의 맥을 살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임완아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상공이 사사의 맥을 짚어주고 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범한이 손가락을 천천히 치우며 웃었다.
“어찌 그리 쉽게 알 수 있겠습니까? 내 손가락이 B 모드 초음파라도 되나요?”
“비틀어 쥔다고요?”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단어가 등장하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임완아와 사사가 동시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범한이 두어 번 헛기침을 한 후 사사에게 평소 주의해야 할 것들을 당부했다. 특히 찬바람은 쐬지 말라고 강조한 후 문밖으로 나와 등대가 아내에를 불러 세세하게 분부를 내렸다. 여종들은 건강을 챙겨야 했고 음식 역시 어류나 육류로만 챙기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아울러 범한은 영양가가 있는 음식 몇 가지를 골라 주었다.
“장원에서 양젖을 짤 수 있는가?”
등대가의 아내가 흥분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사 배 속에 있는 건 범씨 가문의 자손이다. 그러니 이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흥분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얻은 후 범한이 말했다.
“매일 한 그릇씩, 반드시 끓여서 주게.”
그러자 방안에 있던 사사가 임완아에게 바짝 붙어서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양젖은 별로예요.”
사사의 투정에 임완아가 처음 폐병 치료를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범한이 매일 억지로 양젖을 먹였고 비린내 때문에 정말 괴로웠었다. 이에 참다못한 임완아가 문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양젖이 신선이 내린 명약이라도 되나 보죠?”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신선이 내린 명약은 아니지만 그래도 몸에 매우 좋은 거예요. 비린내가 역하긴 해도 사사는 참고 마셔야 해요.”
임완아에게 갑자기 사기가 예전에 썼던 방법이 떠올라 기뻐하며 말했다.
“그건 사기에게 맡기죠. 행인(杏仁: 살구 씨앗이나 아몬드)이었는지 말리꽃차(재스민차)인지 모르겠는데, 살짝 쓴맛이 나는 걸 넣으니까 비린내가 사라지더라고요.”
사기가 먹는 걸 챙겨줄 거란 말에 침대에 기대어 있던 사사는 몹시 불편했다. 그녀도 원래는 사기와 같은 큰 여종이었다. 그런데 임신했다고 갑자기 대우가 높아지니, 사사는 이러한 변화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또 저택 내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뒷말을 할까 무섭기도 해 무의식적으로 거절하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