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화 태감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 (2)
정월 22일, 조정과 황궁은 변방의 이상한 움직임에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그와 같은 상황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중이었고, 마음도 편히 먹고 있었다.
그리고 날이야 어떻게든 지나가는 것이고, 밥은 때 되면 먹어야 하는 것이고, 옷도 제때 입어야 하는 건데 황궁의 귀인들에게 대년절(大年節)이 되었는데도 새 옷을 몇 벌 갖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에 황궁 수국(綉局)에서는 모 상점에 사람을 파견해 저 멀리 서양에서 들여온 옷감을 가져오려 했다. 이는 동궁의 황후가 작년에 강남에서 공물로 보낸 옷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앞당겨 주청을 올려 주문을 해 놓은 것이었다.
한편 황실 금고와 상관없이 황궁에서 추가적인 심부름을 나가게 되면 이는 담당 태감 입장에서는 부수익을 크게 챙길 좋은 기회였다.
이때 받을 수 있는 단순 수수료와 상납 비용만 해도 옷감 가격의 3할이나 되었다. 그리고 황궁에서 한 차례 나올 때마다 당사자는 몇천 냥짜리 은표를 손쉽게 소맷자락 속에 넣어갈 수 있었다.
예전에 주로 이러한 심부름꾼 역할을 한 이는 숙 귀비 궁의 대 태감이었다. 2 황자가 황제 폐하께 총애를 받아서였다.
한데 올 들어 2 황자가 받는 성은은 과거만 못했고, 대 태감도 자체적으로 뇌물 문제며 현공 사당에서의 급습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권력을 빼앗겨 더 이상 이런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황궁의 지위가 높은 태감들은 모두 눈을 벌겋게 뜨고 대 태감이 했던 일을 서로 하려 노리고 있었다.
한데 들려오는 소식이로는 요 태감, 후 태감을 포함한 높은 지위에 있는 태감들이 모두 그런 생각을 접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동궁의 수령 태감 홍죽이 올해 그 일을 책임질 거란 소식이 그들 귀에 들어가서였다.
홍 태감 홍죽은 황후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황제 폐하도 이 나이 어린 빠릿빠릿한 태감을 매우 아끼시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그의 황궁 내 지위는 날로 높아져만 갔다. 그러자 요 태감 같은 이도 점점 빛을 발하고 있는 홍죽의 앞길을 중간에 막고 싶지 않아 알아서 물러나는 편을 택했다.
이날 새벽, 어느 대형 점포 앞 밖에는 황궁 호위병들이 경호를 서고 있었다. 한데 그들은 연신 하품만 해댔다. 귀찮은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점포 안에 왕공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태감 하나 있는 것뿐이니······. 자신들처럼 무장한 무인이 정주 대군을 따라 서쪽 정벌에 나선 게 아니라 고작 황궁에서 나온 고자 하나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들은 기분이 썩 좋지 만은 않았다. 이에 경계심도 자연스레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 * *
2층의 조용한 방에서는 홍죽이 옷감의 실 두께와 색상을 상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수수료를 챙길 절호의 기회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황후마마를 대신해 하는 일이라 그는 계속 신경을 썼다. 그리고 이 동이성 점포의 주인은 일찌감치 홍죽이 쫓아내고 없는 상태였다.
홍죽의 손끝이 살짝 떨리었다. 분명 불안해서 그런 거였다. 왜냐하면 작은 범 대인이 대체 또 언제 호위병들의 눈과 귀를 속이고 자신을 만나러 갑자기 나타날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가 힘들어 하고 있을 때 방안을 비추는 빛이 갑자기 꺾이며 빛에서 무언가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누구시오?”
홍죽이 경계하며 뒤로 돌아봤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평범한 백성 복장을 한 범한이 얼굴 변장 후 아픈 눈썹 부분을 문지르며 홍죽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런 후 품에서 옥결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 옥결은 며칠 전 그가 온갖 궁리 끝에 하락방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홍죽은 뻘쭘하게 옥 조각을 받아들고는 그것을 잠시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낯선 옥결 같았지만, 그래도 만들어진 모양하며 무늬에서 익숙한 느낌이 들어 황궁 물품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는 동궁에 있던 물건이네.”
범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홍죽이 입을 살짝 오므리고는 물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범한이 날짜를 언급하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태자가 광신궁에 가는 건 분명 그날일 거다. 황궁 내 소식을 많이 알고 있는 네가 그게 정확한지 확인 좀 해줘야겠다.”
홍죽이 기억을 더듬어 보고 계산을 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이 마음을 놓았다. 그 날은 최근 며칠 동안 왕계년이 매일 그 외척의 저택 앞에서 잠복근무를 하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 외척은 황궁으로 약을 보내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같은 날짜에 약을 보내고 있었다.
범한이 홍죽의 눈을 주시했다.
“옷감을 들고 입궁하면, 동궁에서는 늘 하던 대로 그것을 각 궁에 나눠줄 것이다. 그러면 너는 황후가 언제 궁녀에게 광신궁으로 옷감을 보내려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다음날 오후입니다.”
홍죽은 이 일과 옷감이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없어 살짝 긴장한 상태에서 대답했다.
“알았다. 네가 물건 구매를 책임지고 있으니, 옷감을 궁으로 가지고 들어갈 때 일단 시간을 끌어 보거라.”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시간 계산은 잘 해야 한다. 동궁에서 천을 광신궁에 하사할 때 태자도 광신궁으로 가도록 해야 하느니라.”
홍죽이 얼굴에 난 작고 가려운 여드름을 만지작거리며 의혹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기에 그러십니까?”
범한은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다. 이에 홍죽은 무슨 생각이 있는 듯 들고 있던 옥결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든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이건······ 흡사 황후마마께서 전에 사용하시던 것처럼 생겼습니다.”
“맞다!”
범한이 진지하게 분부했다.
“네 밑에 있는 어린 내관이 몰래 훔쳐다가 판 거지.”
“그 쥐새끼 같은 놈들이 감히!”
홍죽이 현 상황을 망각하고 무의식적으로 동궁의 수령 태감 역할로 돌아가 사납게 화를 냈다. 그는 지위가 높은 태감이어서 돈을 받아낼 수 있는 곳이 천지였다. 그러니 그런 별 볼 일 없는 짓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다 순간 정신을 차린 홍죽은 작은 범 대인이 자신에게 단순히 동궁의 질서를 바로 잡으라고 이 물건을 주는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이에 웃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 옥결은······ 어찌 처리할까요?”
“광신궁으로 옷감을 가져가는 궁녀 방에 놓거라.”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이어서 해야 할 일은 매우 간단하다. 황후마마께 그 옥결을 떠올리게 하는 거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으냐?”
홍죽은 총명한 사람이라 금세 이해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모든 걸 광신궁과 연계시킬 수는 없었다.
한데 범한에게는 더는 설명을 해줄 시간이 없었다. 아래층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홍죽 귀에 대고 몇 가지만 더 신신당부했다. 그것은 바로 다른 건 절대 신경 쓰지 말고 앞서 말한 세 가지 일만 제대로 완성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족이 될 만한 행동은 하지 말고, 반드시 자기 안전을 챙기며, 절대 연루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범한은 몸을 숨기고 방안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점포 주인이 공손하게 들어와 태감께서는 분부를 더 내리실 게 있는지 물었다.
홍죽은 아무도 없는 옆쪽을 보며 잠시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범한의 당부가 생각나 이맛살을 찌푸리고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짜내며 말했다.
“이 옷감은······ 처음에 마마께서 고르셨던 것과 다른 것 같군.”
당황한 주인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겉으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감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저희 같이 규모가 작은 장사치가 어찌 황궁에 계시는 귀한 분들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는 말하는 도중에 은표 몇 장을 홍죽의 옷소매에 찔러 넣어 주었다.
홍죽이 그것을 힐끔 쳐다보니, 만족할만한 액수였다. 하지만 아직은 조심해야 했기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꽃에서 이 노란색 실의 굵기가 문제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보다 보니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특히 이 비단에서 쓴 실은, 어째 충분히 튼튼해 보이지 않는군.”
“아니, 그럴 리가요?”
주인은 속으로 안 좋은 욕을 날리며 얼굴을 구긴 채 말을 이어 갔다.
“진짜로 서양에서 온 옷감입니다. 세 겹으로 혼방된 거고, 36수로 된 걸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홍죽이 껄껄껄 웃었다.
“그런가? 하나 급할 거 없으니 가서 제대로 알아보게. 며칠 뒤에 다시 가지러 오겠네.”
그러자 주인은 마음이 급해졌다.
“태감님, 이건 황궁의 황후마마께서 급히 요청하신 겁니다. 날짜가 늦어지면 작은 일에도 태감께서는······.”
점포 주인의 말에 기분이 상한 홍죽이 눈을 부라리며 음침하게 말했다.
“똑똑히 듣거라. 황궁에 계신 분께서 이 옷감을 언제 원하시든 일단 나부터 만족시켜야 하거늘······. 황후마마께서 어떤 분이신데 그깟 작은 일을 기억하고 계시겠느냐!”
말을 마친 홍죽은 소맷자락을 툭 털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내려가는 내내 홍죽의 낯빛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점포 주인은 홍죽의 뒤를 따랐다. 그는 높은 태감에게 미움을 샀다는 생각에 속으로 계속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고 며칠 더 미뤄지게 되면 이 태감에게 은표를 더 찔러 넣어 주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데 홍죽의 낯빛이 나빴던 게 실은······ 두렵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해서란 건 전혀 알지 못했다.
홍죽은 자신과 작은 범 대인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작 나이 어린 태감인 자신도 경국의 역사를 바꿀 능력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을 태감이 아닌 서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치국평천하를 열망하는 서생 말이다. 한데 이 순간 홍죽은 일개 태감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드디어 체감하고 있었다.
* * *
경도로 돌아온 지 한 달, 범한은 명확한 기류를 느꼈고, 일부 일들에 대해서는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당연히 요전에 2 황자가 그에게 사적으로 해준 말이었다.
범한은 2 황자의 분석과 판단이 매우 정확하다고 인정했고, 혹시라도 정세가 그와 같이 발전한다면 자신의 처지는 이상하리만치 난처해질 것이고 불투명한 앞날을 갖게 될 거라 생각했다.
경국의 황제 폐하는 평소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백성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는 이상하게도 냉혹하고 무정하게 몇 년 동안 자기 아들들에게 싸움을 부추기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싸움은 일정 한도 내에서 통제가 되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황제는 냉혹하리만치 사나운 사람이기는 했어도 변태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변태 아버지가 아닌 이상에는 자기 아들들이 서로를 잔인하게 죽일 때까지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 활약한 2 황자와 현재의 범한은 사실은 태자를 다듬어 놓기 위한 숫돌에 불과했다. 용광로에서 막 꺼낸 태자라는 보검이 이 두 개의 숫돌 사이에서 부러져 버리지 않았다면, 황제는 머뭇거리며 사람을 바꾸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역할 1과 역할 2사이의 경쟁도 이렇게 격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요즘 들어 태자는 꽤 괜찮게 행동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빛이나 열정을 발휘할 기회가 없어 칼집에 봉해진 칼날처럼 채 해를 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태자는 분명히 약자는 아니었다. 단지 예전에 열정과 빛을 발할 기회를 형제들에게 빼앗겼던 것뿐이었다.
이렇듯 칼은 계속 칼집에만 있었지만 황제 폐하는 오히려 그 상태를 마음에 들어 하고 안심했다. 왜냐하면 태자의 그와 같은 처세가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인내하는 지혜로 비추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