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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10화 (610/1,108)

610화 태감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 (1)

장수는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등에 장궁(長弓)도 메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는 것으로 상대방에게서 전해져 오는 짙은 화살의 기운에 맞섰다.

화살은 본디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만 그가 풍기는 화살의 기운은 살의까지는 아니었다. 단지 입고 있는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그 안에 숨겨진 창백해 나약해 보이는 피부를 드러내버릴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범한은 강인한 정신 통제력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강한 기세에 고개를 살짝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곧 이 장수의 실력이 범한보다 확실히 한 단계 위임을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 * *

정북 대도독 연소을은 9등급 상의 절대 강자였다. 대종사에게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일 것이다.

“대도독, 안녕하십니까.”

범한이 웃음을 지으며 온화하게 연소을에게 인사를 올렸다.

긴 복도 아래에서 연소을은 그윽하고 깊은 눈빛으로 범한의 얼굴 곳곳을 쏘아보았다. 그는 범한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었다.

“본 장수는 머지않아 북으로 돌아갈 걸세. 그래서 황궁에서 꽃등을 높이 걸고 무의를 여는 날 제사 대인과 함께 무공 연구를 할 수 없게 되어 많이 실망하고 있다네.”

무의(武議)란 조정에서 여는 격투 대결일 뿐이었다. 일단 범한이 아는 바로는 그랬다. 게다가 범한도 잘 알다시피 이처럼 전공(戰功)과 무력을 숭상하는 나라에서 연소을이 정말로 미쳐버린다면, 그는 황제 아버지의 체면은 전혀 생각도 않고 대전 앞에서 대놓고 자신에게 도전할 것이고······.

그런데 연소을이 정말로 미쳐 날뛸까? 장 공주 일파 사람이라면 모두 어느 정도는 정신이 나가 있다는 걸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상대방의 외아들인 연신독은 자신의 지시로 고 귀여운 왕 십삼랑에게 찔려 죽은 후였다.

‘내가 연소을을 이길 수 있을까?’

범한은 조용히 자문해 보았다. 대전에서는 독 안개를 뿌릴 수도, 쇠뇌의 화살을 쏠 수도 없었다. 무의에서는 정면으로 무공을 겨뤄야 했다. 한데 범한을 9등급 상의 최고 실력자라고 하기에는 그래도 아직은 실력 차가 있었다. 물론 연소을도 대전에서는 자신의 명성과 연관된 장궁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범한 입장에서는 연소을이 활쏘기에만 특출 난 실력을 지녔다고 어리석은 판단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만약 무의에서 연수을과의 겨루기가 성사된다면, 늙은 홍 태감이 생명을 보호해 줄 수 있다고는 해도 자신은 분명 중상을 입게 될 게 뻔했다.

오늘 군정(軍情) 회의에서 황제 폐하께서 연소을에게 앞당겨 북으로 돌아가도록 한 건 어찌 되었든 상처조차 입고 싶지 않았던 범한의 요구에 응답해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그것으로는 연소을의 실망감과 분노까지 가릴 수는 없어 보였다.

이에 범한은 참다못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군 내 실력자를 온화한 얼굴로 바라보고 웃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대도독, 무언가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연소을이 잠시 침묵하고는 범한의 말에 대꾸했다.

“나는 그저 범 제사의 잔재주를 배우고 싶었을 뿐이네.”

범한이 잠시 침묵을 한 후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하며 말했다.

“지금은 태평성세입니다. 그러니 싸우고 죽이는 일은 적게 할수록 좋은 것이지요.”

긴 복도 아래에 범한과 연소을만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보니 순간 위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황궁 안에서는 연소을이 자신을 공격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던 범한은 걱정 같은 건 그다지 하지 않았다. 이에 맑은 눈동자로 차분하게 상대방을 주시만 했다.

“켁켁.”

몇 차례 켁겍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늙은 홍 태감은 아니었다. 홍 태감에 비하면 머리가 하나 정도는 작았지만, 기세만큼은 산처럼 굳세게 응집된 사람 하나가 두 사람 옆에 섰다.

섭중이었다.

범한은 살며시 웃으며 생각했다.

‘제때 오셨네요. 연소을과 더 이상 눈빛으로 충돌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연 도독, 범 제사, 이곳은 황궁 내 중요 지역이니 이곳에서 큰 소리로 소란을 피우면 안 됩니다.”

섭중이 경도 수비를 맡게 되었을 때 범한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었고, 연소을은 아직 산에서 사냥이나 하고 있었다. 그 정도의 경력을 지닌 사람이 이런 곳에서 말을 꺼내자 자연스레 무게가 실리었다.

연소을이 살짝 당황해 고개를 돌려 예를 차려 인사했다.

범한은 웃으며 물었다.

“섭 숙부님, 오랜만입니다. 정주에서 잘 지내시는 거지요?”

섭중이 끼어들자 연소을은 입을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섭중 역시 연소을과 범한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생각했다.

‘연소을의 외아들이 죽은 건 줄곧 현안이었어. 그런데 왜 연소을은 그게 범한이 한 거라고 단정하는 걸까?’

“하관은 공무가 있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범한은 지금이 기회란 생각에 서둘러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자 섭중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한데 연소을이 느릿느릿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작은 범 대인 꼭 몸조심하게나.”

범한은 순간 마음이 싸했다. 그의 말 속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이에 갑자기 호방한 기세에 휩싸인 범한이 두 손을 모아 하늘로 높이 치켜들고 인사를 올리며 하하하 웃었다.

“하늘께서 보우해주시니 연 대도독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웃음을 짓고 있던 연소을이 갑자기 싸늘하게 변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골수를 뚫어버릴 기세로 범한의 눈을 응시하며 매 글자에 심을 주어 말했다.

“하늘은 내 눈을 가릴 수는 없었다네. 범한, 자네는 내 손에 죽게 될 거야.”

이때 황궁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고 섭중도 아직 두 사람 곁에 있었다. 그런데도 연소을은 오만하게도 범한을 위협하는 말을 내뱉어 버렸다. 그러자 참다못한 섭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무어라 한마디 하지는 않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범한은 참다못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섭중은 2 황자의 장인이었고, 일찌감치 그쪽 사람이 된 터였다. 한데 연소을은 자기 앞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황궁에서 황제의 사생아를 죽여버리겠다고 말한 건 정말이지 오만함이 극한까지 치달은 미친 짓을 한 것이었다.

범한이 가볍게 옷소매를 펄럭이고는 고개를 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연소을, 감히 내기하는데, 당신이 먼저 내 손에 죽을 겁니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꼴로 말입니다.”

그 말을 마친 후 범한은 두 손을 모아 섭중을 향해 인사를 한 후 연소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천천히 황궁 문을 향해 걸어갔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점점 멀어지는 범한을 바라보고 있는 연소을의 모습은 냉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섭중도 범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저 젊은이는 대체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지? 이미 몇 년 동안 해놓은 게 있으니, 범한 때문에 내가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일어나서는 절대 안 되는데.’

섭중은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연소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탄식을 내뱉고는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일이 그리되었다고 너무 상심하지 말게. 황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다는 걸 유의하고 말이네. 저자는······ 평범한 자가 아니지 않은가. 황제 폐하의 아들일세.”

하지만 연소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아들이라면 저에게도 있습니다.”

* * *

황궁 대문이 있는 곳에 다다랐을 무렵, 범한은 이미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범한 스스로 봤을 때 연소을과 자신은 일찌감치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국면에 들어서 있었고, 아직 그것을 실행으로 옮길 적당한 시기와 장소만 없던 것뿐이었다. 지난번에 그가 만든 상황은 홍 태감에 의해 깨져버린 터였다. 그렇다면 다음번에야 말로 연소을이 쳐놓은 상황에 빠지게 되려나?

한데 왜 왕 십삼랑은 연신독을 죽인 후 갑자기 종적을 감추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건지.

범한은 속으로 계산을 해보며 황궁성에서 나왔다. 그러자 예외랄 것도 없이 그 옆에 1 황자가 와 있었다. 그는 황족 중 유일하게 군에 몸담고 있는 맹장이었다.

“자네와 연소을이 무언가 말했다지?”

1 황자가 범한 옆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자의 아들이 죽고 나니 아무나 물어뜯는 거지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저를 죽이겠다더군요.”

그러자 1 황자가 이맛살을 잠시 찌푸리고 살짝 노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오만한 말을 내뱉었군. 이곳이 어딘지 생각지도 않았나 보지?”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본 후 1 황자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연소을은 이미 나쁜 의도를 가지고 결심한 듯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황제 폐하께서도 모르시지는 않을 것 같긴 하나,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1 황자는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쁜 의도라는 건······ 대체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이지?’

범한은 마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내내 계속 그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서 연소을의 거친 전의와 살의를 알아차리지 못하실 리 없어. 그렇다면 왜 호랑이를 다시 산으로 돌려보내려 하신 걸까? 그자를 경도에 가둬두지 않고 말이지?’

이는 범한으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의문점이었다.

범한은 속으로 자조적으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연소을이 자신을 죽이러 오거나 자신이 연소을을 죽였을 때가 되면 세상은 분명 매우 재밌게 변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편 그때가 되면 황제 폐하께서는 그동안 두고 있던 마작에서 승리의 전야를 맞이하시게 될 거라 보았다.

* * *

정월 15일, 경국 경도에서는 눈도 내리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이날은 밤이 되자 성 전체에 형형색색의 등이 높이 걸렸다. 그러자 메말랐던 거리에 행인들이 잔뜩 오갔고, 남자와 여자들은 아름다운 등불을 맞으며 가슴을 설레게 해줄 누군가를 찾아 나서는 동시에 귀찮게 될 만한 일은 피해 다녔다.

여종들을 데리고 나온 규수들은 얼굴을 발그레하게 밝힌 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한편 예절 바른 젊은 남자들은 적당한 거리에 서서 그녀들이 노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날 밤은 봄기운이 앞당겨 오는 날이었다. 그래서 거리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신발이 벗겨져 있었고, 그 손들은 부드러운 살결을 얼마나 만져댔는지 모를 정도였다. 뒤꽁무니를 쫓고, 이름을 알아내고, 촉촉해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탐색전을 벌이고. 쾌락을 쫓는 활동은 밤새도록 이어졌고, 호르몬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중매인 없는 자체적인 선 자리를 마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민간에서의 환락은 경국 조정이 지닌 엄숙함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비록 황궁 각루에서도 거대한 등이 걸리고, 황궁 내부에서도 황태후, 황후, 귀빈들이 수수께끼 등의 놀이를 하며 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감찰원의 삼엄한 검고 네모진 건물에서 범한이 주도적으로 붉은 등불을 걸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경국 조정은 엄숙함을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15일 이전부터 군이 이동하기 시작해서였다. 정북 대도독은 친위병을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창주 연경 일대에서 북제 소속인 천하 명장의 날카로운 시선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섭중 역시 정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경국 조정에서도 다시 한 차례 서쪽으로 병사를 보냈다. 이를 위해 5로 중앙군에서 정예병들을 근 10만을 뽑았으며, 이들 무적의 군인들을 정주 일대로 보냈다.

초봄이 되면 이 10만에 이르는 정예 부대는 진압을 명목으로 서쪽으로 200리를 진군해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서호와 만 리를 남하해온 북만에게 조금이라도 이상한 움직임이 보인다면, 이들 경국의 무적 병사들은 서호 사람들을 습격해 대대적으로 도륙할 수도 있었다.

군을 움직이는 건 국가 대사였다. 비록 아직 병사만 이동시키고 아직 전투 개시를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6부는 후방 보급을 위해 일찌감치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경국은 군으로 일어난 나라여서 그런지 군과 관련한 모든 사무적인 사항에는 일찌감치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각부 간의 협력도 대단히 효율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른 나라와 맞설 때 경국은 이런 식으로 늘 단결이 잘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동안에는 황자 간에 서로 알력 싸움을 하고 있다는 점과 범한의 위력을 떠올리는 이가 없었다.

범한도 며칠간 매우 바삐 지냈다. 감찰원은 군에 정보를 제공하고, 아울러 각 사(司)에서 보내온 기계와 병기를 심사해야 했다. 이에 범한도 감찰원에 갑자기 밀려들고 쌓인 일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다행히 언빙운이 도와주는 바람에 범한은 15일 날 저녁에 입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말로만 듣던 무의를 잠깐이나마 볼 수 있었다. 대전 앞에서 벌어지는 결투는 과연 볼만했다. 경국에는 정말이지 고수가 많았는데······. 한데 연소을과 범한의 생사를 건 결투가 빠져서 그런지 대신들은 도무지 흥이 나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해서 범한에게 대놓고 결투 신청을 하는 바보는 없었다. 그들은 연소을이 아니었다. 자진해서 목숨을 재촉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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