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8화 나는 당신들이 작년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소. (1)
주변에서 적이 나타난 게 아님을 확인한 고달이 무거운 마음으로 장도를 칼집에 도로 넣었다. 그러자 칼집과 장도가 마찰하며 메마른 소리가 울렸다.
검은색 연의를 입은 6처 검수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 행인으로 위장하고 있던 밀정들도 옆으로 다가와 거의 동시에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범한의 부하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범한을 주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 마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였다.
등자경은 범한 앞에 있는 나무 조각이며 마차 바퀴를 치우고는 조심스레 범한을 부축할 준비를 했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가로젓고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자신은 괜찮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화가 나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 때문에 이 조용한 거리에 쓰레기가 생기고 부하들을 곤란하게 만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달이 장도를 등에 메고 범한 곁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대인,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별일 아닙니다.”
범한이 씁쓸하게 소리 내어 웃고는 발을 높이 들어 앞으로 성큼 나아갔다.
감찰원은 일처리 효율이 매우 높아 주변 정리를 하는데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완전 새것인 새카만 마차도 어느새 거리 한 귀퉁이에서 나타나 사람들 앞에 멈추어 섰다.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쭉 빠졌던 등자월이 양다리를 주무르고는 말고삐를 건네받으려 했다. 그러자 범한이 한마디 했다.
“그 모양이 되어 놓고 뭘 하겠다는 건가. 돌아가 쉬게.”
그러자 등자월이 웃으며 그러겠노라 대답하고는 말고삐를 목풍아에게 건넸다.
거리를 정리하는 일은 범한이 분부할 필요도 없었다. 경도 백성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가 알아서 정리를 시작한 때문이었다.
마차가 다시 운행을 시작했다. 범한은 무언가 생각이 있는 듯이 앉아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함구로 일관했다. 목풍아는 조용한 거리에서 마차를 걸어가는 속도로 몰았다. 그러다 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져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가림막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한마디 해버렸다.
“대인, 황궁에서 재촉하셨습니다.”
입궁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도 범한은 마차에 앉아 한가롭게 여유만 부리고 있었다. 한편 앞서 화친왕부로 황궁의 명을 전하러 간 이는 목풍아였다. 그는 작은 범 대인이 아무리 거만하게 행동해도 황제 폐하께서는 차마 꾸짖지는 못하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명령을 전하러 간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에 목풍아는 용기를 내 범한을 재촉해 보았다.
이때 범한의 머릿속에는 서호니, 황궁이니 하는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에 온통 다른 생각 생각뿐이었던 범한이 버럭 신경질을 냈다.
“지금 생각 중이다. 그러니 그만 좀 성가시게 굴거라!”
마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이상해서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제사 대인께서 오늘따라 기분이 왜 저렇게 안 좋으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천하 관원들 눈에 감찰원 제사인 범한은 겉으로는 온유하지만 악독하고 음험한 수단을 쓰는 놈이었다. 하지만 감찰원 내부 사람들에게 작은 범 대인은 부하에게는 대단히 관대하고 통이 크며, 말이며 생각하는 것이 대범한 상사였다.
험한 말이나 욕은 말할 필요도 없고, 평소 공무를 처리할 때 범한은 자기 심복들에게는 심한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작은 범 대인을 이처럼 추태를 부리게 만든 건지 모두들 이상히 여겼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그 이유를 묻지는 못했다.
마차는 곧장 황궁으로 향하지 않고 범한의 고집으로 감찰원부터 들렀다.
범한이 턱, 턱, 턱, 세 걸음 만에 마차에서 내리더니 네모반듯한 짙은 회색 건물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외근하러 나가던 길이었던 감찰원 관원들은 제사 대인의 살기 등등 한 표정에 깜짝 놀라 서둘러 길을 터주고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감찰원으로 들어간 범한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런데 너무 급히 서는 바람에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고달과 목풍아가 하마터면 범한과 부딪힐 뻔했다.
범한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신 자기 목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머리를 최대한 뒤쪽으로 돌렸다······ 그것도 마치 자기 등 쪽에 무언가 이상한 게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고개를 돌려 등을 보는 건 대단한 고난이도 동작이었다. 범한이 9등급 고수가 지니는 유연함을 갖고 있기는 했어도 그에게도 매우 힘든 동작이었다.
목이 살짝 시큰한 것 같더니, 범한의 온 몸이 자연스레 반응해 제자리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은색 관복에 가려져 있는 등이 범한의 눈빛과 마주치는 게 부끄럽기라도 한 것처럼 있는 힘껏 도망쳤다.
고개를 돌려 등을 보려 하니 제자리에서 둥글게 돌게 된 것이었다.
범한은 그렇게 한 바퀴, 한 바퀴, 또 한 바퀴를 돌았다.
* * *
범한의 동작은 너무나도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웠다. 이곳은 감찰원 대문 앞이고, 그는 감찰원에서도 높은 자리에 있는 제사 대인인데, 마치 강아지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 꼬리를 보려 쉼 없이 제자리에서 도는 강아지 말이다.
고달과 목풍아는 옆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리고 눈가를 씰룩이기 시작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차마 말조차도 나오지 않는 장면이었다. 그렇다고 웃고 싶다고 해도 웃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범한이 이런 장난을 대체 왜 하는 건지, 이들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감찰원 대문 안팎의 관원들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입을 떡하니 벌리고 무슨 조각상이라도 된 양 넋을 놓고 범한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감찰원 대문 앞쪽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감찰원 관원들이 강인한 정신력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였다. 제사 대인이 왜 갑자기 미친 짓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들을 시험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서였다.
고달은 힘겹게 입술을 꾹 다물고 범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도련님이 임씨 가문 큰 도련님과 오랫동안 어울리시더니, 살짝 바보가 되신 거 아니야?’
범한이 갑자기 뱅글뱅글 돌던 걸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범한 입장에서는 겨우 몇 바퀴 돌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몇 바퀴가 몇 년처럼 느껴졌었다.
제자리에 선 범한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손가락을 뻗어 자기 등 뒤를 가리키며 고달에게 물었다.
“내가 걷는 자세가 변한적 있었나요?”
“없습니다.”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던 고달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살짝 안심한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봐도 모든 게 정상 같이 느껴집니다.”
고달과 목풍아는 범한이 한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범한이 갑자기 몸서리를 치더니 역겹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땀이 찬 양손을 옷섶에 대충 두어 번 닦고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감찰원 정문 대청에서 사라지자 조각상이 되어 있었던 감찰원 관원들은 그제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방금 전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해서 서로를 몇 차례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상대방의 눈에 담긴 웃음을 발견하고는 자기네들끼리 시끄럽게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 * *
범한은 자신이 추태를 부려서 무료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감찰원 부하들에게 무수히 많은 대화거리를 제공해 주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일에는 관심조차 없어서 바로 밀실로 들어가 버렸다. 밀실로 들어간 범한은 얼떨떨해하는 언빙운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최근 1년 동안의 북쪽 정보가 담긴 문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2처는 행동이 매우 민첩했다. 차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북쪽 관련 정보 문서가 밀실 책상 위에서 작은 산더미처럼 쌓였다.
범한이 무례하게 손만 휘휘 내저으며 언빙운에게 나가라는 의사 표시를 했다. 딱 봐도 범한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보이자 언빙운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에 밀실에서 나간 후 작은 소리로 고달과 목풍아에게 몇 마디 물었지만 범한의 행동과 관련해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문서가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깊은 사색에 빠졌다. 문서의 대부분은 상경 황궁에서의 이야기와 소식들로 채워져 있었다. 범한 입장에서는 과거에 이미 다 본 내용이었다. 그래도 범한은 북제 황제와 관련한 부분을 더욱 눈여겨서 살폈다.
과거에는 두서없는 정보들 사이에서 북제 황제의 성격을 분석하는 데 대단히 어려움을 겪었었다. 하지만 지금의 범한은 북제 황제에 대한 예측과 판단이 서 있던 터라 이번에는 자료를 뒤져가며 단서를 찾는 데 훨씬 수월한 느낌이었다.
지금 범한은 대담한 가설에 입각해 조심스럽게 증거를 찾는 중이었다. 그리고 일단 목표가 세워졌으니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자료를 뒤지던 범한은 드디어 자신의 추측을 기반으로 여러 해 동안 쌓인 무수히 많은 세세한 정보들을 하나로 꿰어가며 황당한 사실에 점차 가깝게 다가갔다.
그것은 바로 천하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일이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머리통을 잘라버릴 일이었고, 이는 범한조차도 안절부절못하게 만든 사실이었다.
사건 문서에는 명확히 쓰여 있었다. 북제 황제는 어려서부터 황태후 품에서 자랐다고 말이다. 그래서 옆에서 키워주던 유모를 바꾼 적 없었고, 십 년 동안 딱 두 사람뿐이라고 했다. 제왕에게 유모가 고작 둘 뿐이라니. 그녀에게 붙인 궁녀의 수도 너무 적고 말이다. 북제의 호화스러운 기풍과 비교하면 완전히 극과 극의 모습이었다.
북제 황태후는 다음과 같이 해명했었다. 북위가 과거에 사치로 나라를 말아먹었으므로 북제 황제에게는 어려서부터 소박하고 간소한 삶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세인은 북제 황제가 여색을 밝히지 않고, 네 명의 측비(側妃)도 모두 평민 출신에서 뽑아 올린 거라고 여겼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것을 가지고 범한은 더 많은 걸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화친왕부의 2 황자가 말한 것처럼, 일국의 군주에게 후궁은 조정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절묘한 무기였다. 그러니 그의 논리대로라면, 조정 대신들의 딸들을 비로 맞이하는 게 안 될 리 없는 거였다.
그러니 조정 대신들의 딸을 측비로 들이지 않은 건 어리석은 행위라 할 수 있었다. 하나 그건······ 범한은 북제 황궁의 모자가······ 아니, 모녀가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란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북제 황제가 대신의 딸을 비로 받아들이고도 시종일관 잠자리를 치르지 않는다면 이 소식은 자연스레 왕공귀족에게 전해질 것이고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이유를 추측하러 들 것이었다. 더군다나 설사 잠자리를 갖지 않는다고 해도 마주 보고 앉거나 함께 누워야 할 텐데, 그러면 대신들의 딸은 분명 무언가 괴이한 점을 발견해내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모든 사실을 완전히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평민의 딸을 측비로 들여야만 했을 터였다.
경국 감찰원은 물샐 틈 없는 정보력을 지녔지만 지금까지도 북제 황제에 대해서는 완전하고도 세밀한 그림을 그려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상대방의 신체적인 특징은 말할 필요도 없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은 북제 황궁에서 왜 그들 황제의 몸을 엄격하게 보호하려 했는지를 설명해주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이 모든 건 범한 마음속에 있는 상황과 맞물려 세상에는 알릴 수 없는 어떤 큰 비밀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신의 딸을 측비로 맞아들이지 않고, 목욕도 그리 조심스레 하고······. 이런 것들이 북제 황제에게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니라면, 이는 범한에게는 간접적으로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
북제 황제는 동성애자가 아니라, 그는······ 아니 그녀는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