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화 살면서 감당할 수 없는 향
섭령아의 말에 진지했던 토론이 순식간에 농담이 되고 말았다.
범한은 입술 꼬리를 올리고 잠시 웃었다. 그런 후 옆에서 대화를 중인 남녀들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과거 황궁에서 있었던 재밌는 소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데 범한은 모르는 일이어서 그는 점점 대화에서 밀려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말하자면 이런 거였다. 범한이 경도로 오기 전, 응접실에 있는 남녀들은 어려서부터 서로 보며 자란 사이였고 경국 내 황족들 가운데서도 이들은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러니 범한은······ 애당초 이들에게는 외부인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와 같은 기분에 과도하게 몰두하지 않았다. 앞서 북제 황제에 관해 논의할 때 그는 깊은 사색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언가가 계속 아른거려서 그걸 잡아내야만 할 것만 같은 기분이 은연중에 들었다.
범한은 상경성에서 북제 황제와 만났을 때의 상황을 머릿속에서 상세히 복기해 보았다. 그리고 1년 반 동안 자신이 그들과 협력하기로 한 묵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런 후 여기에 북제 황제의 심미관과 취미, 삶의 세부 사항을 결합해 보니, 머릿속에서 점점 무언가 밝은 빛 하나가 뚫고 나오려는 것만 같았다.
한데 그 빛은 계속 맴돌기만 할 뿐 밖으로 뻗어 나오지 않았다.
옅고 그윽한 향이 퍼져 있는 가운데, 범한은 계속 멍하니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고 자신을 보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범한은 자신이 추태를 부렸음을 알아차리고는 난처하게 웃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한마디 던졌다.
“향이 좋군요.”
‘향이 좋군요 라니!’
응접실에는 범한을 살짝 정신을 놓게 할 정도의 담담하고 그윽한 향이 깔려 있었다. 범한은 순간 정신을 차렸지만, 마력에 이끌리듯 코를 벌름거리다가 다시금 정신을 잃고 말았다. 무척이나 맑고 우아한 향내였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농염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화친왕비가 일찌감치 돌아와 있었고, 그녀는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범한이 억지로 웃으며 물었다.
“어디서 가져오신 향입니까?”
화친왕비는 살짝 경악했지만 이내 웃음을 지었다.
“얼음과 눈에 비견될 만큼 냉정한 총기만 지닌 줄 알았는데. 마음이며 코까지 모두 섬세하네요. 이 향낭을 찬 지 1년이 넘었지만 왕야께서는 냄새를 알아차리지 못하셨답니다. 한데 작은 범 대인은 내가 오늘 이걸 차고 나오자마자 알아차리는군요.”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섭령아의 경우는 자기 코를 문질러 보았지만 특별한 향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응접실에 피워놓은 향이 호숫가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휩쓸려 매우 옅어졌다는 것 말고는 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다.
“향을 피워서 난 냄새가 아니었습니까?”
섭령아가 호기심에 물었다.
화친왕비가 웃으며 대꾸를 해주었다.
“당연히 피워놓은 향에서 나는 냄새는 아니랍니다.”
그녀가 허리춤에서 작고 정교하게 제작된 향낭을 꺼내 보여주며 말을 이어 갔다.
“상경성에서 가져온 것이에요.”
범한은 향낭을 집어 들고 한껏 맡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향낭은 여인이 몸에 지니는 물건으로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하든 향낭을 빌려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었다.
화친왕비의 말에 범한이 어느새 평온한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북제에 가보지 못했으니 이 연한 향을 구분해내지 못할 겁니다. 저는 가봤으니 맡을 수 있는 것이고요.”
화친왕비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기를 한다면 작은 범 대인도 맡아보지 못했다는 쪽에 걸게요······ 상경성의 황궁에서 뒷산에 올라가 본 적 있나요?”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친왕비가 말했다.
“이 향낭에는 금목서 꽃이 들어가 있어요. 그 꽃은 상경성 황궁 뒷산에 있는데, 온 천하에 딱 그 한 그루밖에 없고요······. 금목서 꽃은 향이 매우 옅어서 신경을 쓰지 않으면 맡고 싶어도 맡을 수 없답니다.”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뒷산 계곡에 있는 정자에서 잠시 머물렀었는데. 그 귀하디귀한 금목서 꽃은 보지 못했습니다.”
“산꼭대기에서 자라니까요.”
화친왕비가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국사께서 과거 북쪽 땅에서 친히 가져다 심으셨지요. 더군다나 향도 강하지가 않아서 그 누구도 이 꽃을 따다가 향낭에 넣을 생각을 안 했었고요······ 그래서 내가 작은 범 대인이 황궁에 머무르기는 했어도 그 향을 맡아본 적 없을 거라 단정했던 거지요.”
범한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렇다면 왕비께서는 이 향낭을······.”
범한이 왜 이 향낭에 집착하며 캐묻는지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범한은 이유가 탄로 날까 봐 웃으며 해명하기 시작했다.
“저는 그 향이 좋습니다. 그래서 완아에게 하나 주고 싶을 정도랍니다.”
임완아가 살며시 웃었다. 그녀는 상공이 분명 다른 생각으로 저러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범한이 왜 저러는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1 황자가 한마디 끼어들었다.
“다 큰 남자가 어찌 여인의 일에 마음을 쓰고 그러는가!”
그러자 화친왕비가 잠시 눈을 부라렸다.
“말에 올라야 말을 얻을 수 있고, 수를 놓아야 꽃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리 하는 자가 진정으로 멋진 남아입니다.”
화친왕비의 말에 1 황자는 바로 입을 봉해버렸다.
화친왕비가 범한 쪽으로 돌아서서 웃었다.
“신아 군주에게 하나 주고 싶어도 쉽지 않을지도······. 아니다. 측근이라 할지라도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작은 범 대인에게는 기회가 있을 수도······. 황제 폐하께 책을 써 보내서 부탁을 드려봐요.”
여기서 황제 폐하라 함은 당연히 북제의 그 젊은 황제였다.
범한이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설마 큰 공주께서 지니고 있는 것도 귀국의 황제 폐하께 하사받은 겁니까?”
“그렇답니다.”
화친왕비의 눈에 잠시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흐르더니 그녀가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상경성에서 오직 황제 폐하 한 분만 이 금목서 꽃이 들어간 향낭을 지니실 수 있었거든요. 그분은 이처럼 매우 옅은 향을 좋아하세요. 이 향낭은 상경성에서 떠나기 전날 밤에 황제 폐하께서 지니고 계시던 걸 제게 하사해 주신 거랍니다. 경국에서 지내게 될 저에게 고국의 향을 기억하라면서요.”
화친왕비의 담담한 몇 마디 말에 응접실은 살짝 감상에 빠져들었다.
범한은 곁눈질로 향낭을 쓱 훑고는 웃으며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 * *
화친왕부에서 식사를 마친 후 한담을 나누자 어느덧 해질녘이 다 되었다. 그 사이 1 황자는 범한과 2 황자를 서재에 넣어 놓고 깊은 대화를 나누도록 만들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포월루에서 충분히 깊은 대화를 나눈 터였다. 현재 2 황자 뒤에는 섭씨 가문과 대종사 하나가 있었다. 그러니 2 황자는 뒤로 반 발자국도 물러날 의향이 없었다.
한편 범한은 자신의 상황이 2 황자가 말한 것처럼 크고 굳건한 권력을 지닌 것 같아도 실은 누란지세의 형국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한데 세상을 살다 보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는 법 아닌가. 그러니 범한에게는 내빼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없었다.
그리고 적어도 경국의 황제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을 일이었다.
2 황자가 마지막으로 범한을 그윽하게 잠시 바라보고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안지, 자네에게 일깨워줄 게 있는데······ 자네는 의심할 여지없이, 최근 2년 동안 경국에서 최고의 골칫거리 제공자였다네······과거 일은 자네도 잘 알 거네. 부황께서 왜 자네를 담주에서 자라도록 했는지, 그리고 왜 모든 번거로운 일들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으신 건지 말일세.”
범한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2 황자는 역시나 설득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죽 아저씨가 황제 폐하를 위협한 게 아니라면, 경국 황제가 자신을 보호하며 몰래 키운 이유는 딱 하나 밖에 없었다. 군왕이 무정하기는 해도, 그래도 자기 자식을 조금은 가엾게 생각했던 거였다.
“부황께서는 우리 형제간에 지나치게 격렬한 일이 발생하는 건 바라시지 않는다네.”
2 황자가 범한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한데 자네 입장에서는 사태를 격화시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일이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지. 형세가 갈수록 악화되어도 말이지. 이게 바로 자네가 처한 문제고 말이야.”
“살든 죽든 저는 상관 않습니다.”
범한이 2 황자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살든 죽든 상관 않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나는 죽이거나 살리거나 둘 중 하나는 꼭 하겠다는 의미였고, 다른 하나는 싸우는 게 중요하지 누가 죽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2 황자가 손을 들어 범한과 가볍게 한 차례 손바닥을 마주쳤다.
* * *
오후에 갑자기 감찰원에서 소식이 날아들었다. 서호 쪽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고 했다. 이 군사 정보는 이미 추밀원으로 간 상태였고, 황궁에서는 범한에게 입궁하라는 명령을 내려졌다.
범한은 아내에게 섭령아와 이야기를 더 나누라고 일러 놓고 혼자서 화친왕부를 나왔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타고는 1 황자를 기다려주지도 않고 마차를 바로 출발시켰다. 그러자 마차가 눈 내린 경도 거리를 천천히 운행하기 시작했다.
서후와 관련한 일은 그다지 급박한 사항은 아니었다. 양쪽 소식이 오가는데 적어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으니, 지금은 서둘러서 입궁할 필요가 없었다. 현재 범한에게 필요한 건 오늘 왕부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화시킬 시간이었다.
새카만 마차가 경도를 거리를 몇 바퀴 돌았다. 상대적으로 적막한 거리를 운행하고 있는데도 마부 자리에 앉아 있는 등자경은 경계하며 사방을 주시했다. 마차 앞뒤와 좌우에서는 눈에 띄지 않게 위장한 밀정들이 범한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범한은 두 눈을 감고 마차 뒤 의자에 기대었다. 그의 얼굴은 살짝 창백했고 입술도 살짝 말라 있었다.
담담한 향의 금목서 꽃이라······ 그날 밤 맡은 향이 바로 금목서 꽃 향이었다. 범한은 망연자실하게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 사당, 그 밭, 그리고 제대로 여미지 못한 허리띠가 떠올랐다. 분명 사리리가······ 바로 사리리가······ 깨어나기 직전 맡았던 향은 자신의 태양혈을 주물러주고 있던 양손에서 나던 거였는데!
범한이 얇은 입술을 두어 번 달싹였다. 작고 재빠르게 욕을 몇 마디 내지른 것이었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마차 벽을 손바닥으로 한 대 쳤다.
펑, 하며 큰 소리가 울렸다. 화가 너무 많이 나 저도 모르게 세게 내리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체내에 가득 들어차 있던 패도의 정기가 거칠게 들고 일어나 장풍이 닿은 곳을 부수어 버리고, 고요한 거리에 순식간에 나무판 부서지는 소리를 울려 퍼지게 한 것이었다.
새카만 마차는 종잇장으로 만든 것처럼 절반이 무너져 내리고, 바퀴가 부서져 전복되고 말았다. 깜짝 놀란 말은 멈추지 않고 달렸지만 등자경은 대경실색한 가운데서도 가까스로 마차를 세웠다.
먼지가 점점 가라앉았다. 그러자 검은색 관복을 입은 범한이 정신이 나간 듯 나무 조각 사이에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범한 곁에는 호위 고달이 있었다. 그는 장도를 검집에서 절반 정도 빼든 상태에서 주변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자객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일고여덟 명의 6처 검수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허리에 있던 쇠꼬챙이를 질끈 움켜쥐고 왼손으로는 쇠뇌를 들어 바깥쪽을 조준했다.
범한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생각 하다가 어느 순간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상자 속 편지의 두 글자가 떠올랐다. 그가 입꼬리를 올려 매우 자조적으로 웃는 표정을 짓더니 괴롭다는 듯 탄식을 했다.
“인과응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