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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05화 (605/1,108)

605화 황족 내 별종 (2)

범한과 섭령아는 호숫가에 서서 주먹과 손바닥을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쪽에 있는 다리는 서로 꼬여서······ 조금 애매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범한은 무릎 쪽으로 탄탄한 감촉이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고 무언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범한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섭령아에게서 떨어져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많이 느리시군요.”

섭령아가 아직 칼집에 있는 작은 칼을 승복할 수 없다는 듯 거둬들이며 말했다.

“그거야 스승님이 너무 빨라서지요.”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섭령아가 신고 있는 꽃이 수놓아진 귀여운 천 신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까 동작이 조금 더 느렸다면, 저 자그마한 발이 내 아랫도리를 찼을 거야. 그러면 분명 엄청 아팠겠지.’

“다음부터는 그런 수는 쓰지 마십시오. 남의 집 대를 끊어놓을 수 있으니까요.”

범한이 놀리듯 말했다.

그러자 섭령아가 싸늘하게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스승님이 잔재주란 파렴치한 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쩐지 내가 왜 스승님을 차버리지 못했나 했습니다. 스승님이 내 다음 수까지 꿰뚫고 있었던 건 그러한 음험한 수단을 즐겨 사용해서 그런 거였군요.”

범한은 할 말이 없었다. 앞서 두 사람이 손을 사용해 맞부딪혔을 때 섭령아는 범한의 잔재주를 사용했었다. 한데 그때 범한은 섭씨 가문의 대벽관으로 맞섰다. 바로 섭 대종사의 류운산수를 간소화판으로 시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섭령아가 여인 중에는 보기 드문 7등급 고수라고는 해도, 범한 앞에서는 능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었다.

섭령아가 느닷없이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 물었다.

“스승님, 등 쪽으로 찌르기 공격을 할 때 쓴 건 눈속임용 동작이었는데, 왜 산수(散手)로 바로 쳐낸 거죠?”

범한이 섭령아를 쓱 바라보고는 언짢은 기색으로 웃었다.

“운만 띄워본 거니, 마마께서 독을 바른 무기를 사용한 건 아닐 테죠. 그러니 제가 무서워할 필요가 없겠죠?······ 그리고 마마의 잔재주는 아직도 덜 잔인합니다. 마지막에 손 공격이 막혔을 때는 비녀를 빼서라도 상대방을 죽였어야 합니다.”

섭령아가 범한에게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되면 머리가 전부 헝클어지지 않습니까? 이곳은 1 황자마마 댁입니다. 어디에서 여종에게 머리를 빗겨달라고 하란 겁니까?”

그러자 범한이 하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입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상대방을 물어뜯을 수 있는.”

“설마 내가 모시는 스승이 그냥 덩치만 큰 개였던 겁니까?”

섭령아가 살짝 화가 나 말을 이어 갔다.

“스승이 되어서 양보할 줄도 모르고 말이야.”

고집스레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여인의 모습에, 범한은 2년 전에 경도 거리에서 있던 일이 절로 떠올라 기분 좋게 웃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주먹에 코를 한 대 얻어맞고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울던 섭령아의 모습이었다. 잠시 후 범한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이제는 스승님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저는 크게 상관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마는 왕비이십니다.”

섭령아와 범한이 서로 스승과 제자로 부른 건, 사실 경도 권력자들 사이에서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데 나이 어린 사람들끼리의 장난으로 치부하고 별 신경은 쓰지 않았다. 섭중도 자기 딸에게 그리 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다만 일찌감치 상황이 바뀌었고, 섭령아의 신분도 예전보다는 존귀해졌으니 범한이 이러한 말을 하는 건 정말로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섭령아는 기분이 나빠 토라져 버렸다.

“내가 부르겠다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내가 그리 못 한다면, 당신이 나를 스승님이라고 부르면 되겠군요. 섭씨 가문의 산수 무공은 외부인에게는 전수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범한은 순간 숨이 턱 막혀 씁쓸하게 웃기 시작했다. 섭령아의 말 대로였다. 범한은 대벽관을 섭령아에게 배웠으니 상대방으로부터 매우 큰 이득을 챙긴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둘 사이를 소원하게 만들 만한 말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두 사람은 호숫가를 따라 걸었다. 섭령아는 왕비가 된 후부터는 공공연히 돌아다니거나, 누군가와 겨루기를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니 오늘 스승과 우연히 겨룬 건, 비록 잠깐이기는 해도 그녀에게는 매우 흥분된 일이었다. 섭령아는 쉽게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 섭령아가 한동안 아무런 말도 않다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우리 아버지도 경도로 돌아오셨어요.”

범한은 깜짝 놀랐지만 그녀가 무엇을 알려주려 한 건지 잘 알고 있었다.

“옛 군부에 있는 사람들은 현재 스승님을 성가신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섭령아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범한이 고개를 내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의 권력이 제아무리 강해도 군측이 자신과 대립하고, 섭씨와 진씨 가문 사람이 계속 남아 있다면, 범한은 2 황자에게 근본적인 타격을 줄 수 없었다.

또한 황위 계승권을 빼앗아오고 싶어 하는 2 황자의 강렬한 욕구를 완전히 불식시킬 수도 없었다. 섭중이 경도로 돌아오는 건 단순히 직무 보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섭중과 그 뒤에 있는 섭류운은 섭령아와의 관계 때문에라도 이미 2 황자의 버팀목이 되어있었으니······.

“겨우 며칠 조용히 지내는가 싶었는데, 마마 입에서 다시 나쁜 소식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던 섭령아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스승님, 나는 섭씨 가문의 여식이에요. 그러니 나는 아버님과 그분 곁에 설 것입니다.”

범한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생각을 해본 후 대단히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정말이지 당연한 결정이에요. 믿어 주세요. 지금 진심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섭령아의 눈에서 슬픔이 살짝 흘렀다. 범한이 진심으로 한 말임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입장이 부드러워지기는 힘들다는 건 더 명확해진 터였다.

“보세요. 호숫가 얼음도 언젠가는 녹잖아요.”

범한이 갑자기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어 갔다.

“세상사가 꼭 그렇게 될 거라고 누군가가 말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섭령아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보석처럼 맑은 눈으로 기쁨의 빛을 반짝이며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 * *

응접실은 호수 맞은편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고, 또 창문을 열어 놓은 상태였다. 이에 범한과 섭령아도 응접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범한이 응접실 창문 쪽을 가리키며 옆에 있는 섭령아를 놀렸다.

“우리 둘이 호수 근처에서 산책하는 건······ 좀 체통에 맞지 않는 일 같습니다. 저 안에 계신 분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우리 흉을 보았을 수도 있겠군요.”

경국은 개방된 풍속을 지니고 있었지만 남녀가 단둘이 함께 있는 건 아무래도 타당하지는 않았다. 이에 섭령아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범한이 또 놀렸다.

“둘째 황자마마께서 곧 터져버릴 정도로 화가 나신 건 아닐까요? 그러면 살짝 수줍어하는 듯한 차분한 웃음을 짓고 계시겠죠?”

“기억해 줬으면 좋겠네요! 스승님도 매번 그 이상한 웃음을 지으니까요!”

섭령아가 크게 화를 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일단 완아가 무슨 생각을 할지부터 생각해 봐요!”

“완아는 좋은 사람입니다!”

범한이 탄식을 하며 말을 이어 갔다.

“자기를 위해 다른 이런저런 여인을 들이라고 제게 계속 채근한다고요······.”

이 말을 내뱉은 순간 범한은 속으로 ‘제기랄!’이라고 소리쳐버렸다.

이번 농담은 사제 사이에 나눌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애매함이 지나쳐 맹랑한 감도 있었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과거의 어린 규수가 아닌 황자에게 시집을 간 왕비이니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섭령아는 깜짝 놀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범한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크게 놀랐다. 그리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범한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날려버렸다.

범한은 자신의 습관성 망나니 기질이 발동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너무 부끄러워 섭령아의 손을 막아낼 엄두는 못 내고 호숫가를 따라 잽싸게 뛰기 시작했다. 응접실로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 * *

응접실의 허리 높이 정도에 달린 좁은 창문은 열려 있었고, 호숫가의 찬바람이 열린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찬바람은 이내 따뜻하고 산뜻한 봄기운처럼 변해 버렸다. 응접실 안에 있는 황족 남녀들은 어렸을 때의 재미난 일들을 가지고 대화를 해나갔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호숫가에 있는 남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화친왕비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것 좀 봐요. 대체 뭘 하는 걸까요?”

1 황자가 눈을 들어 보고는 낯빛이 살짝 변했다. 하지만 이내 웃으며 해명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줄곧 령아의 스승을 자처했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또 훈육 중일 겁니다.”

화친왕비가 잠시 웃고는 곁눈질로 2 황자의 낯빛을 힐끔 살폈다.

그 순간 술잔을 들고 있던 이홍성은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창가로 다가가 호숫가를 바라보았다. 범한과 섭령아가 나란히 서서 호숫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광경에 그가 저도 모르게 웃기 시작했다.

“둘 다 야만인입니다. 저런 건 그냥 무시하고 이야기나 나누지요. 어쩌면 이따가 둘이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자 유가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옆으로 다가와 부럽다는 듯 말했다.

“저도 범한 오라버니에게 무공을 배우고 싶습니다. 하나 오라버니가 허락하지 않으니, 너무 불공평합니다.”

응접실에 있는 사람들은 호숫가에 있는 남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독 2 황자와 임완아만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함께 다과를 먹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나 나누었다.

화친왕비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설마 저 두 사람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거야?’

1 황자가 호숫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섭씨 가문 여식은 시집을 왔는데도 저리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군. 둘째야, 집에서 관리를 좀 더 해야겠구나······. 범한이 녀석도 너무하는군.”

조금 불쾌해진 1 황자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의자에 웅크려 앉아 있던 2 황자가 계화꽃 떡을 천천히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관리할 게 뭐 있겠습니까? 왕부에서 1년 동안 갇혀 지냈으니, 누구든 두들겨 패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겁니다. 여기에서 범한이 모래주머니처럼 얻어맞아 줘야 제가 집에 돌아가서 손해 볼 일이 없습니다.”

옆에 있던 임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둘 다 어른이지만 하필이면 아이 같은 성깔을 지니고 있지 뭡니까. 만날 때마다 안 싸우고 넘어간 적이 있는 줄 아십니까? 신경 끄세요. 그냥 서로 치고받고 싸우게 놔두시면, 잠시 후에 알아서 관둘 거예요.”

1 황자 부부는 두 사람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며 ‘저게 무슨 소리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임완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함께 고개를 돌려 호숫가를 바라보니, 과연 두 사람은 다시 주먹다짐에 들어간 상태였다. 섭령아가 주먹질을 질끈 쥐고 낭패라는 듯 도망가는 범한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1 황자가 웃음이 터져버렸다.

‘천자 집안에서도 일반 백성들처럼 소란도 일고 이처럼 재밌어하는 것도 괜찮겠지. 범한과 섭령아 같은 별종이 있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야!’

그러나 그러한 소란도 보다 보니 익숙해져서 사람들은 다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2 황자가 완아가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는 느닷없이 관심을 보이듯 물었다.

“공주님, 줄곧 궁금했는데, 귀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마음 씀씀이가 섬세한 건 범한만 있는 건 아니었다. 화친왕비는 2 황자가 불러준 호칭이 마음에 들어 미소를 지으며 잠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범한이 헐레벌떡 응접실 앞에 도착했을 때 화친왕비는 북제 젊은 황제에 관한 최근 재밌는 소식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 말이 응접실 밖까지 흘러나와 범한은 순간 화들짝 놀라 어리둥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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