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화 황족 내 별종 (1)
범한이 미안하다는 듯 받아쳤다.
“마마, 용서해 주시지요. 떳떳한 대장군왕께서 저까짓 유리에 신경 쓰신다고요? 싸게 해달라는 말씀은 마시고, 나중에 황실 금고에서 필요한 물건이 있으시면 서한이나 주십시오. 제가 그냥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1 황자는 좋아하기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황실 금고는 중요한 곳이네. 자네가 조정을 위해 벌어들인 은전이 모두 강 공사비용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내가 감히 그런 일로 이득을 취할 수는 없지.”
범한이 아는 1황자마마는 충심이 깊은 사람이라 그에게 위와 같은 대답은 전혀 의외랄 게 없었다. 이에 범한이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하오나 유리로 큰 공주마마께 잘 보이실 생각이시라면, 나중에 돈을 많이 쓰셔야 할 겁니다.”
그러자 1 황자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설마 우리 집 정원에서 쓰고 있는 유리 양이 적다는 뜻인가?”
화친왕비는 옆에서 입을 가리고 웃기만 할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범한이 비웃어주었다.
“큰 공주마마께서는 어려서부터 북제 황궁에서 지내셨으니······ 북제 황궁에 안 가 보셨잖습니까. 그곳 대전은 꼭대기가 전부 유리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빛이 그대로 안으로 들어와 청석판이며, 옥으로 만든 대(臺)하며, 맑은 물속에 있는 새하얀 물고기들까지 모두 비춰주고 있답니다.”
그러자 1 황자가 크게 놀라며 탄식을 했다.
“예전에 들은 적 있네. 한데 과장이라고만 생각했었지. 왕비가 내게 한 말이······ 설마 그게 사실이었단 말인가?”
1 황자가 혀끝을 차며 탄식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북제 황실이 그 정도로 사치스럽다면, 국력이 날로 쇠약해져 일격도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텐데,’라고 말이다. 한데 자기 아내 앞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이라 하는 수 없이 속으로 삼켜버렸다.
범한은 자신이 꺼낸 북제 이야기와 함께 어느새 북제에서의 추억에 빠져들어 있었다. 극에 치달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물건들, 그리고 그곳의 장관들을 즐겼던 터라 상경성은 범한에게 매우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고······. 물론 그곳에서 만난 낭자도 좋았던 터라 범한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괴이한 웃음을 띠고 말았다.
화친왕비는 고국의 풍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임완아는 범한의 입가에 드리워진 웃음을 보고는 입을 오므린 채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렇게 네 사람은 각기 다른 마음으로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남자 둘과 여자 하나, 그렇게 세 사람이 이들을 맞으러 나왔다. 바로 2 황자와 이홍성 남매였다.
유가 군주가 다정하게 ‘완아 언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임완아가 다정하게 ‘둘째 오라버니’를 불렀고, 이어 이홍성이 다정하게 ‘안지’라고 말했다. 이들은 호수 풍경을 바라보며 남쪽에서 공물로 올라온 과일을 먹으며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참으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대화였다. 마치 요 몇 년 동안 경도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범한과 2 황자는 이보다 더 친할 수 없는 형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런 게 바로 황가 자제들의 타고난 능력이 아닐까?
범한은 속으로 탄식을 하면서 사람들의 말을 경청했다. 범한은 1 황자가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한 진짜 의도며, 이홍성이 다시 2 황자의 배에 올라탈 것을 1 황자가 염려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데 범한이 아무리 진실한 척 대화하는 데 능수능란하다고는 해도 어려서부터 황실에서 자란 저들처럼 이런 상황에서 적응해 마음 편히 있지는 못했다.
이에 범한은 실례하지만 소피가 급하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 * *
응접실로부터 멀지 않은 정원의 한쪽 구석.
종에게 이끌려 이곳까지 온 범한은 깜짝 놀란 얼굴로 안쪽에서 나온 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인은 보석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범한이 손을 휘 내저어 종을 물렸다. 그리고 경악한 얼굴로 아직 치마의 허리춤에 손을 대고 있는 섭령아를 바라보며 웃긴다는 듯 성을 내며 말했다.
“여인의 몸으로 품행에 주의하지 않다니! 안에서 정리를 다 마치고 나와야 하는 것도 모른단 말입니까? 하인들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런 겁니까!”
그러자 섭령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제가 원래 이렇습니다. 스승님······.”
섭령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동시에 멍하니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제야 1년 안 본 사이 섭령아가 이미 시집을 가 왕비가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섭령아는 더 이상 예전에 범한과 싸우던 야만적인 어린 낭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범한은······ 계속해서 그녀의 스승이라 칭해도 되는 걸까?
“함께 걸으시지요.”
범한이 오른쪽 팔을 뻗어 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섭령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범한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이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정원 한쪽 구석에 있는 건물을 잠시 바라보고는 웃으며 장난처럼 말했다.
“이제 그 급한 볼일은 안 봐도 되는 건가요?”
그러자 범한이 큰 소리로 하하하 웃었다.
“그냥 소피가 마렵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을 뿐입니다.”
섭령아가 몇 발자국 앞으로 나와 범한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크고 촉촉한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스승님, 응접실에서의 대화가 그렇게나 불편했습니까?”
스승님이란 말에 범한은 마음이 절로 따스해졌다. 이에 잠시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있다가 얼굴에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아시다시피, 저런 자리에는 익숙하지 않군요.”
“강남에서는 어찌 지냈습니까?”
섭령아가 어깨를 움츠리고 범한 옆에서 걸으며 말을 이어 갔다.
“경도로 돌아오는 길에 스승님에게 일이 생겼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 보려 했지만, 한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멈춘 건 아니었다. 그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입을 닫은 것이었다. 온 경국 사람들이 산골짜기에서 일어난 급습이 어떤 일이며, 범한을 죽이려했던 진짜 원흉이 누구인지 알아맞히려 했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2 황자에게 보내고 있었다.
섭령아는 범한이 암살자의 공격을 받은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라고 걱정했었다. 심지어 개인적으로 자신의 부군에게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그때 2 황자는 ‘산골짜기 급습 사건과 자신은 무관하다.’라며 확인을 해주기는 했다. 하지만 당시 국면과 왕비라는 신분 때문에라도 섭령아는 범씨 가문 저택으로 찾아가 범한의 상태를 살펴볼 수는 없었다.
범한이 잠시 웃고는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내가 이렇게나 튼튼한데, 그리 쉽게 일이 날 것 같습니까?”
섭령아에게 뻗었던 범한의 손이 갑자기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범한이 자신의 손을 거두어들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상대방은 현재 왕비였다. 그러니 범한은 말이며 행동거지를 모두 조심해야 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못 본 사이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왕부의 겨울 숲길을 따라 호수 쪽으로 걸어갔다. 범한이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완아도 마마를 한동안 못 뵈어서 그런지, 요전부터 계속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임완아와 섭령아는 혼례란 여인들 중에서는 제일 친한 규방 친구 사이였다. 다만 경국에서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사람에게 각각 시집을 가는 바람에 매우 곤란한 건 있었다.
섭령아가 괴로워하며 대답했다.
“나도 완아가 보고 싶었어요.”
“평소에 별일 없으면 집으로 놀러 오세요.”
범한이 따스하게 말을 이어 갔다.
“왕부에서 나오는 게 불편하시면, 제가 완아를 데리고 왕부로 뵈러 가겠습니다.”
섭령아가 한숨을 내쉬고 잎이 다 떨어진 겨울나무 옆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범한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스승님, 나는 남자들이 정말로 이해가 안 가요. 그분도 그러시더군요. 어째 말하는 게 그리 비슷한 건지······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하시더라고요.”
그녀의 말 속에 등장한 ‘그분’은 당연히 2 황자였다.
범한이 잠시 웃고는 그녀의 말에 대꾸를 했다.
“남자끼리 죽일듯 싸우는 게 아낙들의 우정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관계가 없다고요?”
섭령아는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이에 고개를 치켜들어 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와 완아 중 하나가 과부가 된 후에도 예전처럼 편하게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범한이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후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마마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섭령아는 아무런 말없이 나무 옆에 서 있다가 한참 후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뜻대로 바꿀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섭씨 가문의 딸인 그녀는 시집오기 전에는 불타는 듯한 붉은색 치마를 입은 채 거리 위에서 말을 내달렸었다. 온 경도 백성들에게 자기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니며 사람들이 무어라 말할지, 아버지께서 얼마나 화를 내실지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지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섭령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섭령아도 전체 경국을 놓고 봤을 때 별 것 아닌 사람이었다.
“강남에서 마마의 작은할아버지를 뵈었습니다.”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리고는 신신당부를 했다.
“하오나 그 일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외부에는 방금 들으신 말을 하지 마시지요.”
“알겠어요.”
섭령아가 살짝 놀라 있었다.
“그 영감님께서 대체 왜 강남까지 가신 거죠?”
그러자 이번에는 범한이 놀랄 차례였다.
“마마의 작은할아버지는 어찌 말해도 대종사이십니다. 그런데 그리 부르시다니요?”
섭령아가 입을 합죽이처럼 만들며 말했다.
“매년 동에 번적 서에 번쩍 밖으로 다니시면서 집에 돌아오셨을 때는 아무것도 안 가지고 오세요······ 그리고 내가 영감님이라고 부르겠다는데, 그분이 무슨 수로 뭐라 하실 수 있겠어요?”
범한이 잠시 웃었다. 하지만 섭령아의 말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은 확인한 상태였다.
첫째, 섭류운과 섭씨 가문의 친밀한 정도.
둘째, 섭류운은 명의상 천하를 주유하고 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횟수가 적지 않다는 점.
그렇지 않다면, 어린 섭령아가 그를 저리 다정하게 부를 리 없으니 말이다.
* * *
“혼인을 하신 후에는 무공 연마는 관두신 겁니까?”
범한이 자그마한 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섭령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로서는 스승님이 자신을 시험해 볼 생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범한이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 자신과 거리를 유지할 리는 없었다. 이에 기분이 조금 좋아진 섭령아의 눈에 얼른 확인 해봐야겠다는 기색이 돌았다.
범한은 그녀의 그런 눈빛을 못 본 척했다. 그리고 쓸쓸한 겨울나무 곁에서 혼자 떨어져 나와 앞쪽에 있는 호수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이미 크게 빙 돌아 호수의 다른 한쪽에 와 있었다. 이곳에서는 겨울나무에 가려져 있기는 해도 응접실 한쪽 모퉁이가 얼핏 보였다.
등 뒤에서 훅 소리와 함께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매우 빠르고 음산하게 범한의 귀 뒤쪽을 찌르려 했다.
범한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오른쪽 어깨를 들었다. 그러자 갈수록 확장 중인 경맥을 따라 패도의 정기가 오른팔로 들어가 그의 오른팔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했다.
그러자 손바닥을 뒤쪽으로 뒤집어 내젓는데 가느다란 손가락 다섯 개가 어느새 수없이 많은 잔상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매우 빠른 속도로, 명확하게, 순서에 따라 머리 뒤쪽의 그 차가운 바람을 짚었다.
팍팍팍, 하며 여러 차례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찬바람 속에 있던 것이 범한의 손가락에 맞아 속절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한데 반응이 빨랐던 섭령아는 이내 범한의 뒤통수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러자 방심할 수 없던 범한도 발끝을 이용해 뒤로 완전히 돌아서서는 양손으로 얼굴 부위를 막았다. 손바닥이 마치 두 개의 대문을 세운 것처럼 범한의 얼굴을 가려버렸다. 이에 섭령아의 주먹에서 나오는 바람은 문밖에서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다.
그런 후 범한은 발을 잠시 멈추고 무릎을 살짝 굽힌 채 쥐도 새도 모르게 한쪽 발을 걸어 감았다.
이후 탁탁탁, 하는 소리가 여러 차례 울렸고, 이로써 전투는 마무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