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화 보석처럼 맑게 빛나는 얼음 조각들
정월 초열흘은 경국 민간에서는 말십 일라고 불렀고, 절기 중 비교적 중요한 날이었다. 비록 초이레처럼 모든 사람들이 나가 논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로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든 결정을 마친 범한이 유난히 홀가분한 모습으로 아내를 데리고 마치에 올랐다. 그리고 경도를 반나절 동안 돌아다녔다.
그러다 아내와 등자경의 계속되는 재촉에 못 이겨 노선을 바꾸어 황성 밖으로 나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화친왕부로 향했다.
화친왕부의 대문은 오늘 활짝 열려 있었다. 초대된 손님이 많지 않아 1 황자는 돌계단에 서서 범씨 가문의 마차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가 화친왕부 문 앞에 서자 1 황자가 범한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이리 늦게 오다니. 이따가 먼저 빠져나가지나 말게.”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경도에서 내리는 눈은 북제 상경성의 속 시원한 함박눈도, 담주에서 볼 수 있는 비가 섞인 진눈깨비도 아니었다. 강남의 봄비처럼 꾸준히 내려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편이었다. 신경질이 난 사람처럼 머리에 떨어지는 눈을 손으로 떨어내며 범한이 왕부 문 앞에 서 있는 1 황자를 향해 말했다.
“식사나 하는 건데, 뭘 그리 긴장하시는 겁니까?”
사실 1 황자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초대장에 북제 큰 공주의 낙관이 찍혀 있지 않았다면, 범한에게는 먼저 빠져나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올지 안 올지도 불분명한 일이었다.
한데 범한은 괴로웠다.
‘당신네 황족 형제들 모임에 범씨 가문의 자제인 저를 무엇하러 부르신 겁니까?’
범한은 정말로 오고 싶지 않았다.
불분명한 국면에서 2 황자를 포함한 황자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고, 자신은 지금 음험한 일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노리고 있는 태자가 자기에게 부드럽게 대화를 걸어온다면 대체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 그로서는 알지 못했다.
범한에게는 말할 자격이 없자 그의 아내가 일찌감치 눈가에 환한 미소를 띠고 1 황자 앞으로 나아가 밝게 웃으며 몇 마디 말을 건넸다. 그런 후 두 사람은 나란히 화친왕부로 걸어 들어갔다.
남매의 지나치게 다정한 모습에 범한은 질투심이 일어 ‘저 오라비는 단순한 사촌 오라비가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왕부에 안 들어가는 방법은 없겠지?’라고 생각했다.
화친왕부는 범한으로서는 몇 번 와보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시중이 붙었다. 시중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은 범한은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그런데 옆에 아무도 없어 이내 마음이 편해졌다.
임완아는 다른 쪽에 있는 자리에서 오랜만에 만난 1 황자와 무언가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범한은 혼자 대청에 앉아 있는 게 무료했지만 두 사람의 대화에는 끼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정신이나 가다듬었다.
한데 옆쪽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해서 범한의 귀에 파고들었다. 임완아는 1 황자의 혼례 후 모습을 가지고 놀렸다. 한편 1 황자는 임완아에게 강남에서는 지낼 만한지, 범한이 무시하지는 않는지, 강남의 풍경은 어떠한지, 항주회는 대체 어떤 성격의 관아인지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임완아는 항주회는 관아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아내의 이 설명을 끝으로 범한은 무료함을 참지 못해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저들 남매는 황족 내에서도 중요 인물들이고, 그중 한 사람은 군을 이끄는 대장군이잖아. 그런데 어째 하는 얘기마다 등대가 아내가 다른 아낙들과 수다 떠는 것처럼 들리는 거지?’
범한이 마뜩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이때 문득 뒤쪽에서 미풍이 불어 왔다. 깜짝 놀란 범한이 몸을 돌려 바람이 부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쪽에서 화려한 복장의 젊고 아름다운 아낙이 가림막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살짝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여인의 머리에 꽂힌 장식을 보고 있던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왕비님께 인사드립니다.”
북제 큰 공주이자 경국의 화친왕비였다. 사절단이었던 범한은 경국으로 시집을 오게 된 이 이국의 귀인을 남쪽까지 모시고 온 터였다. 그리고 천 리 길을 동행하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보다 어느 정도는 서로를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하지만 1 황자와 혼인을 한 후부터는 범한과 화친왕비는 연락을 유지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이에 서로 비밀리에 약속했던 것을 기본적으로 실천으로 옮길 여지가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두 사람은 서로 데면데면했고 결국 범한은 인사를 올린 후에는 대체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임완아는 왕비가 밖으로 나오자 서둘러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왕비의 강력한 부탁으로 민간에서처럼 그녀를 올케언니라고 불렀다.
왕비의 외모는 단정하면서도 장중했고, 특히 눈썹 부분에서는 당당함이 엿보였지만 그래도 보고 있으면 붙임성 있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차분한 눈빛으로 다시 범한을 주시하더니 눈에 잠시 이채를 반짝이며 입을 뗐다.
“오랫동안 공작을 못 보았는데, 공작은 근래 잘 지냈는지 모르겠네요.”
범한은 화친왕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온화한 그녀의 눈빛에 담긴 노기를 일찌감치 감지하고 있던 터였다. 더군다나 그녀가 자신을 두 번이나 공작으로 부른 것을 통해 화가 난 상태란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데 왕비가 범한에게 원망을 품은 건 남녀 간의 일 때문이라거나 그녀를 경도로 데려와 놓고 거의 교류를 해주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어쩌면 양총 골목에서의 일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이에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1 황자의 낯빛부터 살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 인간은 마음을 강하게 다잡고 있어 범한은 난처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큰 공주마마께서는 말씀을······. 아무래도 예전처럼 저를 범한으로 불러주시지요. 그게 아니라면······ 매제라고 불러주심이 어떠실는지요?”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결코 웃자고 한 말이 아니었다. 범한은 말할 때 호칭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니 상대방을 예전에 쓰던 호칭인 큰 공주마마라고 부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일단 첫째는 상대방에게 옛정을 떠올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둘째는 왕비가 그와 같은 호칭을 듣게 되면 분명 화가 많이 누그러들 거란 걸 알고 있어서였다.
북제 큰 공주가 경국의 1 황자에게 시집을 온 것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먼 이국까지 시집을 온 것이고, 더군다나 두 나라가 전쟁을 해 경국이 승리한 상태에서 혼사가 결정된 것이었다. 이에 북제인 입장에서 이 혼사는, 특히나 큰 공주 입장에서는 그다지 명예로운 일은 못 되었다.
더욱이 1 황자는 화친(和親)왕으로 봉해져 있었다. 화친이라니, 화친 뜻이 뭔데! 1 황자의 왕호(王號)가 생각날 때마다 범한은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어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황제 아버지는 역시나 음산한 데다가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 인간이셔. 큰 공주 입장에서는 화친왕비로 불리는 게 죽도록 싫을 텐데 말이지.’
아니나 다를까, 왕비는 큰 공주마마란 호칭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경국에서 근 2년 동안 꽤 괜찮은 남자와 혼인해 제법 잘살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 입장에서는 이국 타향에 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화친왕부 안에서는 자신에게 화친이란 단어를 붙여 부르지 못하도록 엄히 금해놓기는 했어도, 그래도 오랫동안 그 누구도 자신을 공주마마로 불러주는 일은 없었다.
왕비의 눈매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살짝 웃고 있는 범한의 모습에 그를 괴롭혀주려 했던 생각이 싹 달아나 버렸다.
임완아와 1 황자는 모두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이에 앞선 말을 통해 범한과 왕비가 서로 탐색전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자동적으로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저 둘은 정말 피곤한 사람들이란 생각을 했다.
네 사람이 대화를 나눈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잠시 바라보고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저는 좀 이르다고 했는데, 완아는 계속 재촉하더군요.”
“이미 다 와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1 황자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새로 봉해진 공작 어르신의 체면이 더 대단한가 보네. 왕야 둘을 기다리게 만들다니 말일세. 그리고 태자마마께서는 오늘 오지 않으시네.”
1 황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승건은 일찌감치 귀한 선물만 보냈고, 2 황자와 2 황자비, 그리고 이홍성과 유가군주는 일찌감치 후원에 들어가 있었다.
태자가 오지 않았다는 말에 범한은 마음이 한결 편했다. 그가 봤을 때도 이건 매우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태자는 그들과 신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최근 2년 동안 지위가 살짝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태자는 모든 황자들의 맨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황족이 가족 모임을 열면 태자를 반드시 초대했지만, 태자 입장에서는 참석하는 게 편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자 임완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둘째 오라버니 내외분도 오셨다고요? 그렇다면 계속 여기에 앉아 있으면 안 되잖아요!”
이는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그냥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1 황자가 한 말 때문에 대청 내 분위기가 흐려지는 걸 막기 위해서 건넨 말이었다. 그러자 1 황자가 그녀의 말을 웃으며 받아쳤다.
“그러면 모두 함께 가자꾸나!”
말을 마친 1 황자가 슬쩍 범한을 살폈다.
그러자 범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설마 제가 왕부에서 소란을 피우고 2 황자마마를 두들겨 팰 수도 있다는 걱정은 안 하시는 겁니까?’
범한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완아를 데리고 후원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1 황자 부부가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범한 저 녀석은 어째 자신이 손님이란 걸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따라 함께 후원으로 갔다. 한데 대청에서 나갈 때 화친왕비는 범한과 화친왕이 함께 작당모의를 한 사실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1 황자는 순간 심장이 싸한 느낌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 * *
화친왕부는 양국이 국혼을 치르면서 작년에 황명에 의해 지어진 곳이었다. 그렇기에 경국의 체면 때문에 넓은 지대에 화려하게 지어졌다. 이런 이유로 일행은 한참을 걸었고, 그제야 그들에게 저 멀리 호수 근처에 세워진 응접실이 보이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들려오기 시작했다.
호수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수면에 깔려 있던 살얼음은 어제보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어느새 조각 얼음이 되어 이었다. 얼음 조각은 호수 물과 함께 살짝 일렁이며 구름 사이로 삐져나온 옅은 햇살을 맞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호수에는 무수히 많은 보석이 깔려 있는 것 같았다.
한편 응접실은 유난히 정교하게 지어져 있었다. 호수와 마주보고 있는 삼면에는 흑목으로 만든 창문이 달려 있었고 안쪽에 문풍지를 달아 밀봉이 잘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중앙에는, 그러니까 사람 키의 절반 정도 되는 곳은 좁고 길게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뚫린 곳은 모두 황실 금고에서 나온 최상급 유리로 마감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설계 덕분에 귀인들은 창문을 통해 겨울날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고, 호수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이들 젊은 귀인들의 흥취를 깰 수 없었다.
범한이 응접실 쪽을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정말 마음에 드는 곳입니다.”
“마음에 든다면 이제부터는 자주 오게. 서로 남도 아니니 말이네.”
1 황자는 말하는 내내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사용한 ‘남’이라는 단어에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왕부는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웅장하고 멋졌다네. 한데 내 마음에는 들지 않더군. 다행히 공교롭게도 왕비도 같은 마음이라 여러 번 고쳐 지었다네. 그래서 처음 지어졌을 때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어. 한데 자네 마음에 쏙 든다면 그녀에게 고마워해야 할 걸세.”
범한이 고개를 돌려 아무 말 없이 웃는 얼굴로 왕비를 잠시 바라보았다.
1 황자가 살짝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주변에서 나보고 공처가라 해도 상관없어. 그러고 싶으면 그러라지 뭐. 왕비만 좋다면야,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야. 응접실에 유리를 두르느라 내 적지 않은 은전을 들이기는 했지만 말이지······.”
왕비는 1 황자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범한 부부 앞이라 쑥스러웠던 탓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1 황자를 살짝 노려보았다.
그러자 1 황자가 껄껄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저 유리로 말할 것 같으면, 정말 비싸더군. 자네가 황실 금고의 수장으로 있으니, 나중에 내가 유리를 갈아 낄 일이 있으면 좀 싸게 해주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