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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02화 (602/1,108)

602화 불청객

암흑계 사람들은 이런 일의 전문가였다. 이에 세상의 실력을 갖춘 패거리란 패거리는 경도에 자그마한 분점을 두려 했다. 이들 강호 인사들은 감히 조정과 맞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조정의 하수구 역할을 하며 기꺼이 그곳에서 떨어지는 은전 부스러기들을 벌어들이려 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정말 이상하기는 한데, 이들 강호 인사들은 이상하리만큼 제 분수를 잘 지키는 바람에 그들 중 지금까지 경도에서 신용을 쌓은 이는 없었다. 하락방(河洛幇)도 황궁 장물을 취급하는 별 볼 일 없는 패거리 중 하나였다.

범한은 항주에 있을 때 하서비와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들 어둠의 세력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하락방은 그때 알게 된 곳 중 하나였고, 그들이 황궁에 고정 통로까지 뚫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경건한 자세를 취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때의 일이 아니었다면 범한이 오늘 연꽃 연못 거리까지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반신불수의 사람은 하락방이 경도에서 장물을 처분할 때 제일 첫 단계의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들은 한 집안을 몰락시키고 참형 당하도록 할 만큼 위험한 일을 하고 있던 터라 일 처리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매 단계가 단절되어 있었고, 물건을 받으러 오는 사람도 자주 바뀌었다. 그런데 이런 특성 때문에 범한은 이곳까지 파고들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조금 전 내밀었던 증표의 경우는 당연히 감찰원이 여러 해 전에 준비해 둔 것이었다.

범한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보이자 반신불수의 사람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내 들은 얘기로는 선제께서 황태후마마 집안에 내린 것이라 하네. 나중에 일이 생겨서 그렇지.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제는 다시 동궁으로 돌아가는군. 그것 때문에 얼마나 기력 소모를 했는지 몰라.”

범한은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웃으며 대꾸했다.

“그 귀한 분들께서 무엇하러 이런 사소한 물건에 신경을 쓰시겠는가. 대충 창고 방에 던져두시겠지. 그러다가 잊어버리셔서 몇십 년 동안 쓸 생각도 못 하신 걸 거야.”

그러자 그가 감탄을 내뱉었다.

“맞아! 이 옥결 정도면 일단 강남에 가져가서 팔고, 다시 강북으로 가서 땅을 사면 천 무[畝] 정도는 거뜬히 사게 해줄 텐데 말이야.”

범한은 그와 함께 감탄이나 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첫 거래인데 규율도 모르다니.”

범한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데도 반신불수의 사람은 의심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불에서 장부 한 권을 꺼내 최상품 술 이름이 적혀 있는 빈칸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네.”

범한이 웃으며 받아쳤다.

“이불 안에 많이도 숨겨뒀군.”

그러자 구시렁거리며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말을 했다.

그는 패거리 두목과 함께 이곳저곳을 누비며 살인을 했었다. 그러다 망치에 얻어맞아 반신불수가 되었고, 불쌍하게 여긴 두목이 그를 경도로 보내 이 일을 주관하도록 한 것이었다.

범한은 하락방과 관련한 일을 많이 알지 못하는 터라 그가 말하는 와중에 감히 끼어들 수 없었다. 이에 위쪽에 가짜 필체로 서명을 한 후 품에서 은표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맨 처음에는 3할이지? 너무 많이 받지 말아 주게.”

그는 천 냥짜리 은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맞는군. 그것보다 훨씬 비싼 옥이지만 금기된 물건이니 깎아서 팔 수밖에 없겠지.”

모든 일처리를 마친 범한은 옥을 조심스레 챙기고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떠났다.

* * *

연꽃 연못 거리 주변의 진흙을 밟으며 걷는 동안 하늘은 음침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동안 그 일로 오랫동안 침울했던 범한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분명해진 것이었다. 비록 계획 자체는 반복적으로 시행해야 해서 귀찮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범한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홍죽의 안전을 보장하려면, 자신이 계속해서 막후에 숨어 있으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진상에 접근하고, 진상을 파헤쳐야 했다.

범한에게는 이제 계획이 다 서 있었다. 이후 어떤 문제가 생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잘 차려진 만찬을 놓고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몰랐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모든 과정을 명확히 생각해 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홍죽의 일처리였다. 한데 이번 일은 황제 폐하가 범한의 예상처럼 민감하고 의심이 많으며, 동시에 상상력과 지혜로 가득 찬 사람이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장 공주와 범한이 생각해온 것처럼 경국 황제는 정말로 민감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치의 맨 꼭대기에 서 있던 터라 음모에 대해서는 최악의 경우만을 가정해 놓고 지혜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생각할수록 마음이 편했고, 이번에는 자신이 황제 아버지를 제대로 가지고 노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을 음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음모에 당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범한은 살짝 의기양양해졌다. 그는 9등급의 고수이고 큰 권력을 손에 쥔 권력자이기는 했어도 그 동안 우쭐하지 않고 차분한 마음을 유지해 왔다. 그런 그였는데, 오늘만큼은 득의양양해지는 기분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건 아마도······ 감찰원에 들어와서 보니 음모를 꾸미는 데에는 소질이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전에는 언빙운이 도와줘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 것뿐이었다. 그런데 교주에서의 일 이후 진평평으로부터 온 서한을 보면, 진평평은 그를 호되게 꾸짖는 것은 물론 그가 꾸민 음모까지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었다. 그러니 오늘 범한은 정말로 득의양양해질 수밖에 없었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런 기분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한창 기분이 좋은 범한에게 어떤 사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연꽃 연못 거리 입구에 놓인 패방(牌坊: 문 모양으로 된 건조물이다) 아래에 있는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다.

패방 아래에 있는 사람은 탁자 위에 푸른색 천을 깔아 놓고 눈을 맞으며 크게 소리치며 영업을 하고 있었다. 범한은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져 발걸음을 멈추고 행인들 사이에 숨어 잠시 조용히 그를 살폈다.

그 사람은 소송 대리인이고, 푸른 천을 깐 탁자를 앞에 놓고 자기에게 일을 맡길 사람을 찾기 위해 목이 쉬게 소리치고 있었다. 한데 낯빛이 창백한 걸 보니 분명 몸에 문제가 있어 보였고, 목소리에서는 갈수록 힘이 빠지고 있었다.

범한은 고개를 살짝 숙여 비 모자가 얼굴의 절반을 가리도록 한 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 사람을 살폈다. 범한의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일고 있었다.

소송 대리인은 영업이 순조롭지 못했다. 소송과 관련한 문의는 말할 것도 없고 대신 소장을 써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더군다나 대충이라도 속사정을 아는 것처럼 보이는 백성들은 무슨 불운이라도 옮겨 붙을까 봐 파란 천이 깔린 책상을 멀찌감치 피해서 걸었다.

범한은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연꽃 연못 거리에서 떠났다.

* * *

대략 반 시진 후, 어느 평범한 술집의 귀빈실에서 범한이 활짝 웃는 얼굴로 자기 옆에 있던 음식을 앞에 있는 사람에게 밀어주며 말을 붙였다.

“일단 천천히 먹고,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 봄세.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는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는 연꽃 연못 거리에 있던 소송 대리인이었다. 그는 예전에 범한과 첫 번째로 소송을 한 사람이었으며, 범한에게 강남으로 불려와 그 대신 명씨 가문과의 소송을 치르며 큰 역할을 한 중요 인물, 송세인이었다.

송세인은 ‘부유한 주둥이’란 안 좋은 별명도 붙어 있었지만 천하제일 소송 대리인이라고도 불려 관아 문턱을 줄기차게 드나들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쩌다 길바닥에 노점을 차려야 할 정도로 추락하게 된 거지?’

길에서 그가 눈에 들어온 순간 너무 놀란 범한은 부하를 시켜 그를 이곳까지 데려오도록 했다. 하지만 감히 포월루로 데려가지는 못했다.

잔뜩 풀이 죽어 있는 소송 대리인을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단 상대방에게 그의 근황부터 묻기 시작했다.

송세인은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조르륵 소리를 내며 백주나 들이켰다. 그런 후 범한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후 씁쓸하게 세 번 소리 내어 웃고는 결국에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해보게. 나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

범한이 물었다.

그러자 송세인은 한숨만 내쉬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인께서도 짐작을 하셨으니, 부끄럽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강남에서 돌아온 후였습니다. 동인가 거리에 있는 대인들이 제가 강남에서 한 일을 가지고 높이 평가해주시더군요. 그리고 제가 대인을 위해 일했다는 걸 알고는 모두 저에게 고개와 허리까지 숙여주었지요······ 한데 나중에 그 소문이 이상하게 변했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후로는 제게 송사를 맡기는 사람이 없고, 평소 잘 지내던 친구들도 속속 저를 피했습니다.”

“이유를 모른다 했는가?”

범한이 탄식을 내뱉고는 말을 이어 갔다.

“자네나 나나 이유는 알고 있다네.”

그러자 송세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안다 한들 어찌 감히 이곳저곳에 억울하다고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범한은 일단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송세인의 슬프고 처량한 처지에 대해 듣고 나서야 그 후 몇 개월 동안 천하제일 소송 대리인이 겪은 처참한 일들에 대해 알게 되어서였다.

이건 단순히 돈을 못 벌게 된 문제만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경국의 온 관료와 기관이 송세인을 겨냥해 일을 벌인 짓이었다. 경도부, 형부, 심지어는 예부와 태상사에서도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각양각색의 핑계까지 들었다. 그러니 송세인의 가산은 비바람에 휩쓸리듯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송세인이 제아무리 언변이 뛰어나다고 해도, 조정의 일리에 맞지 않는 행동에 맞설 수 있다고는 해도, 예전부터 그와 잘 알던 권력자들은 지금에 와서는 그를 위해 단 한마디도 거들어주지 않고 있었다. 마치 송세인을 찍어내려는 막후 인사를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송세인은 가족들을 데리고 연꽃 연못 거리로 이사 와 이곳에서 세를 살기 시작했고, 그 삶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범한이 송세인과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두 사람 다 근본적인 원인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송세인은 범한을 대신해 강남에서 명씨 가문과 소송을 진행했지만, 그가 범한을 얼마나 도왔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관건은 송세인의 입이었다. 범한의 계획에 따라 적장자의 타고난 계승권이 침해 되지 않는다는······ 경국 법률에서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신성불가침의 규칙을 깡그리 무시해서였다.

이는 황궁의 큰 금기를 어긴 행동이었다. 이에 황태후의 몇 마디에 수많은 사람이 어떻게든 송세인의 입을 닫아버릴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참으로 처절한 교훈이 아닐 수 없었다.

* * *

“그래도 사람까지 다친 건 아니니까요.”

송세인이 소름이 돋은 사람처럼 목을 만지며 말을 이어 갔다.

“하늘이 저를 불쌍히 여겨주셨기 때문에 살아 있기라도 한 겁니다.”

송세인이 살해당하지 않은 건 황궁의 귀인들께서 범한 자신의 체면을 조금은 생각해주어서란 걸 범한은 알고 있었다. 이에 그가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를 감히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왜 나를 찾아오지 않은 건가? 이번 일은 어찌되었든 나 때문에 피해를 입은 거 아닌가. 내게 도와달라고 했으면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주었을 것이네.”

그러자 송세인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대인을 대신해 송사에 참여했다가 하마터면 집안도 망하고 사람도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또 대인을 번거롭게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범한은 이자가 생각과 다른 말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기에게 도와달라고 찾아왔다가 오히려 더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웠겠지. 이에 범한이 송세인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무 걱정 말게.”

범한이 품에서 은표를 꺼내 건넸다. 송세인은 눈을 들어 종위 위의 놀라운 액수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놀라 펄쩍 뛰었다. 세상 물정을 잘 아는 그로서도 이렇게나 많은 액수는 선뜻 넙죽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범한이 말했다.

“온 가족이 경도를 떠날 수 있도록 내 바로 준비해 주겠네. 안전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이 돈은 일단 가져가서 쓰게. 내가 주는 보상이라고 여기면 돼.”

송세인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범한이 그를 두어 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염려 말게. 본관이 자네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강남에서 진즉에 머리를 잘랐을 거야. 내가 사람 몇 죽이는 것쯤은 거리낌 없이 한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은가······ 자네도 내 성격을 알아둘 필요가 있어. 나는 나를 도와준 사람은 어떻게든 보호해주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준다네. 황궁에서의 원망은 한 이틀 지나면 옅어질 거야.”

범한이 다 생각이 있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그때 가서 내가 자네를 감싸면, 아무도 감히 자네를 건들지 못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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