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화 볏짚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 거지? (1)
범한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대세는 이미 정해졌으므로 2 황자의 야심을 무너뜨릴 시도는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장 공주를 천하라는 큰 무대에서 물러나도록 설득할 수 있으리란 헛된 희망은 갖지 않았다.
그러니 이건 상대방이 죽지 않으면 내가 망하는 투쟁이었다.
그렇기에 둘 사이에 끼어버린 임완아는 자연스레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범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바꿀 수는 없기에 품 안의 아내를 꼭 안아주기만 할 뿐이었다.
범한은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1년 전, 임완아는 어머니께서 태자와 다시 연합할 수 있다고 일러준 적 있었다.
그때의 일이 생각난 범한은 아내의 예민한 직감력에 감탄했다. 그리고 아내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경국 이면에서 들끓고 있는 암류를 알고 있었음에도 중간에 낀 입장이라 침묵할 수밖에 없던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줄곧 침묵하다 보니,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범한은 아내를 향한 미안함과 양심의 가책만 커져 갔다. 아내에게 무언가 말을 해줄 수 없을뿐더러 심지어는 무언가 약속조차 해줄 수 없어서였다.
품 안의 아내는 숨죽여 울먹이기만 했다.
범한은 그녀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손을 들어 닦아 주었다.
그런 후 고개를 들어 창밖의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두 번째 삶이 주어졌다고 해도 많은 건 바꿀 수 없는 거라고. 그리고 아무리 많은 소망이 있어도 그걸 다 이룰 수는 없는 거라고.
섭경미도 그랬을 것이니 자신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 * *
이번 건은 범한이 경도로 온 지 3년 만에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처리하는 일이었다. 어른들의 도움과 언빙운의 계획도 없이 말이다. 한데 감찰원의 방대한 정보 체계와 여러 해 동안 누적된 사건 자료들을 이용할 수는 있어 범한은 황궁 밖에서부터 안쪽으로 음모의 촉수를 뻗어 나갔다.
압박감이 컸지만 범한은 어떻게든 이겨내야만 했다. 이번 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진평평에게 사실대로 말을 해보는 걸 고려해보기도 했었다. 한데 그에게 두 어르신의 생각은 너무 예측하기 어려웠다. 일단 황제 폐하를 향한 두 분의 충성도가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 음모는 분명 황족에게 크나큰 혼란을 야기할 게 뻔했다. 그러니 범한 입장에서는 두 어르신이 어떤 이유든 내세워 자신을 강제로 압박해 올 경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범한은 밤에 단독으로 행동하는 편을 택했다.
감찰원의 정보 자원은 계속해서 그의 서재로 도착했다. 이에 누군가가 훔쳐보는 걸 방지하기 위해 범한은 매우 교묘한 명분을 내세웠고, 조심스레 접촉해야 하는 외부 소식은 몇 사람을 거친 후 성 안에 위치한 외지고 조용한 작은 저택으로 보냈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서재에만 박혀 있어서는 안 되기에 일부러 외부 흔적을 남겼다. 이에 예전처럼 아버지께 효도하고 저택 정원에서 자유롭게 노닐었으며, 중간에 임소안의 집에 한 차례 찾아가기도 했다. 한데 올해 들어 신기물이 예년처럼 범한을 집으로 초대하지는 않아 범한은 그의 집에는 가지 않았다.
신기물은 태자의 측근이었다. 이에 범한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선 태자는 점차 침묵을 벗어 던지고 멋진 연기력으로 황궁 내 모든 사람을 속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기물도 동궁의 뜻에 따라 더 이상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데 이 모든 게 범한에게는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변화로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신기물은 꽤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귀중한 선물을 들고 직접 찾아오기는 했다.
수일이 지난 후, 드디어 범한에게 일의 시작과 끝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섰다. 이에 범한은 머릿속으로 계획을 한 차례 점검한 후, 사후 검토 시점으로 가서 머릿속의 실마리들을 신중하고 자세하게 살려보았다. 황족을 위에서 아래까지 조사해도 홍죽이 연루되기는 힘들고, 자신이 연루될 가능성은 더욱 낮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범한은 그제야 살짝 마음이 놓였다.
정월 초이레, 저택에만 머물다 지쳐버린 범사철이 나가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형에게 떼를 썼다. 이에 범한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말렸다.
“네가 아직도 범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인 줄 아니? 지금 감찰원에서 너의 행방을 감춰주고 있어도······ 황궁에서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 일찌감치 알아챘을 거라고······. 지금 당장 형부에서 널 잡으러 사람이 들이닥치지 않는 건 황궁에서 아버님과 이 형의 체면을 생각해 주고 있어서야. 이런 상황에서 네가 그 빵빵한 얼굴을 자랑스럽게 외부로 드러내면, 황궁 체면이 어떻게 되겠니? 곧장 너를 잡으러 올걸!”
당황한 범사철은 오늘따라 형님의 말투가 너무 까칠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1년 동안 북제에서 일을 한 것도 있고, 상업계에서 활약한 음험한 천재적 재능이 아직 남아 있는 가운데 우쭐해 하는 태도는 벗어버린 터였다. 이에 형이 무언가 걱정거리가 있어 마음이 무겁다는 걸 바로 알아차리고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보았다.
“형님, 무슨 일 있어요? 형제끼리니 뭐든 말해봐요. 제가 도울 수도 있잖아요!”
그 순간 범한은 사철이를 따라 함께 남쪽으로 내려온 북제의 고수들이 떠올랐다. 지금 그들은 경도성 밖에 있는 장원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범한은 가슴이 떨렸지만, 이내 그 생각들을 떨쳐버렸다. 진 원장과 아버지, 그리고 귀한 동생을 놀라게 할 수는 없어서였다.
사철이에게 마음을 들켰으니 어떻게든 숨기고 봐야 했다.
범한이 살짝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말십(末十) 일에 1황자마마께서 왕부에서 손님을 초대하셨는데, 나도 가야 해서 그래.”
“말십 일이요?”
범사철이 입을 살짝 오므렸다가 히히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형님, 그날은 길일이에요. 1 황자마마께서 형을 정말로 중히 여기시나 봅니다!그렇게 좋은 날에 형을 초대하셨으니까요.”
그러자 범한이 소리 내어 싸늘하게 웃었다.
“어쩌면 왕비마마의 뜻일지도······ 내가 뭘 걱정하고 있냐고? 이홍성을 데리고 간다고 말해놨거든. 그래서 어제 왕부에서 사람을 보내서 일러주더구나. 말십 일에 우리 2 황자마마께서도 그곳에 가실 예정이라고 말이다.”
범사철이 찬 공기를 씁, 하고 들이마셨다.
“세상에나! 형님이 2 황자마마를 묵사발로 만들어 놓았잖아요. 그런데도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어야 한다니. 그 황궁마마님들이 수를 썼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꼭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어. 누가 감히 1 황자마마의 왕부에서 살인을 할 수 있겠니? 단지······ 그냥 어물쩍 넘어가기 뭐해서 그런 거지.”
범사철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형이 무슨 걱정 중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1 황자가 말십 일에 초대한 건, 더군다나 2 황자와 함께 초대한 건 두 ‘동생’이 다시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니 형은 1 황자의 체면을 생각해야 하는데······ 2 황자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는 없으니 저렇게나 힘들 수밖에.
범사철은 형님이 마음이 무거운 이유를 명확히 알았다고 생각해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입을 뗐다.
“거 그냥 가서 밥이나 드시고 와요. 뭐 아무런 대꾸도 않는다고 해서 1 황자마마께서 형을 어떻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러자 범한이 웃었다.
“그렇지.”
범한이 동생을 두어 번 쳐다보고는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나갈 생각이니? 그렇다면 절대 마차에서 내리지 말고 마차 안에서만 구경하거라.”
범사철이 너무 기쁜 나머지 불쌍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북제에서 귀국한 후 줄곧 집에 갇혀 지내는 중이었다. 설날에 조상께 제사를 지내느라 고개를 조아릴 때도 마차 안에서 했을 정도였다. 이에 비뚤어진 행동을 하려 했던 범사철은 형님의 명이 떨어지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경도를 누비는 마차 위로 눈송이가 작은 버들개지처럼 사뿐히 날리고 있었다.
범씨 형제는 마차를 타고 번화한 경도 거리를 두 바퀴 돌았다. 중간에 담박서국에도 들려 최근 상황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주인들이 나타나자 경여당의 일곱째 섭 대행수를 대신하고 있는 관리자가 서둘러 마차에 올라 보고를 올렸다. 한데 상황을 보고 받는 건 범사철에게는 다음 일이었다. 그는 그저 과거에 자신이 일으킨 이 작은 담박서국이 보고 싶어 들른 것뿐이었다.
담박서국을 떠난 후 두 사람은 포월루로 갔다.
마차는 포월루 옆쪽으로 난 보이지 않는 후문 밖에서 멈추었다. 범사철이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3층 건물을 바라보았다. 한데 아직 어린 그의 얼굴에 무슨 나이든 사람 같은 감개무량함과 탄식이 한껏 드러났다. 앞서 담박서국을 들른 것만으로도 범사철은 매우 감회에 젖어 있던 터였다. 한데 자기 인생을 바꿔 놓은 기생집을 보는 순간 머릿속의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범한이 창문 가림막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가자!”
범사철은 기쁜 마음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범한을 따라 냉큼 마차에서 내렸다.
후문에는 벌써 누군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일행은 그 사람을 따라 조용히 후원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 조용한 건물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 줄곧 비어 있던 그 방으로 들어갔다.
흥분한 범사철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북위 양식을 모방해 만든 가구를 손으로 수시로 매만지며 얼굴 가득 아쉬움과 감동을 동시에 드러냈다.
범한이 웃으며 범사철을 잠시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동생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았다. 경도에서 자신과 함께 다니는 한 그 누구도 동생에게 강제로 무슨 짓을 할 수는 없을 거라 여겨서였다. 한데 범사철의 표정을 보는 순간 범한은 느닷없이 살짝 불쾌감이 일었다. 범사철과 3 황자는, 사실 선악의 기준을 놓고 말하자면, 능지처참을 당해야 할 녀석들이었다. 한데 자신은 줄곧 그런 녀석들 뒤에서 버티고 서 있어 준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자신도 좋은 사람은 못 된다고 생각했다.
곁채에는 다른 사람은 들이지 않았다. 대신 상문과 석청아가 직접 시중을 들었다.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신 후 범한이 상문을 향해 눈짓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뒤쪽에 숨겨져 있는 밀실로 들어갔다.
범사철은 이들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계속 석청아와 대화를 나누어서였다.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범사철은 자신이 경국에서 떠난 후 포월루가 어떻게 경영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범한이 포월루에 일으킨 혁신적인 일들과 포월루 아가씨들의 계약 상황에 관해 듣고는 입을 떡 벌어지고 말았다. 범사철이 찬 공기를 씁, 하며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까와는 다른 눈으로 밀실 쪽을 바라보았다.
범사철은 형에게 진정으로 탄복해 있었다. 범한이 일으킨 변혁은 포월루 입장에서는 손해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인심을 얻는 동시에 불필요한 숨은 지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범사철이 포동포동한 얼굴을 가로저으며 속으로 찬탄을 해댔다.
“나는 은전만 벌어들일 줄 알았는데, 형님은 인심도 얻으셨군.”
* * *
범한이 원하는 건 부하들의 충성심이었다. 현재 포월루는 귀족과 권력자들로부터 은전을 벌어들이는 것 외에도 정보 수집이라는 중요 용도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포월루에서의 정보 수집 업무를 충성스러운 상문 낭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진원에 가 본 적 있는가?”
범한이 온유하게 생긴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심코 던진 말처럼 물었다.
상문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없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문은 자신의 직속 부하였다. 그래서 늙은 절름발이가 무어라 하지 않는 이상은 감찰원에서는 규칙과 관련 업무 절차 상 상문의 행동에 간섭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