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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97화 (597/1,108)

597화 아! 눈물 나!

범한은 온돌 위 발아래 쪽에 앉았다. 이 각도로 앉아야 방안의 등불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밖으로 나가지 않아서였다.

홍죽이 조심스레 사방을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르신께서 오늘 황성 앞쪽에서 머무르신다기에 찾아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온데······ 이곳은 안전하지 않으니 서둘러 돌아가시지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양 눈을 보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확인했느냐?”

그러자 홍죽은 낯빛이 바로 변하더니 한동안 입술만 달싹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주변부터 살피고는 한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은 그 누구도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범한은 홍죽이 그 정도로 우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한마디 일러두고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을 이어 갔다.

“제대로 못 막는다면 쓸데없는 말이나 하지 말아야지······ 잠을 잘 때에도 곁에 사람을 두지 말고······ 그 수아란 아이도 안 된다.”

홍죽은 전율이 일었다.

‘제기랄! 그건 너무하잖아요! 잠꼬대하는 걸 어떻게 통제하란 말입니까!’

사실 범한은 지금 약간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이 뜨거운 감자를 가지고 사람을 칠 수 있는 돌덩이로 만들려면 중간에 너무 많은 걸 고려해야 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오늘 밤에 홍죽을 방문한 건 무엇보다도 직접 만나 그 일을 확인하고 후속 계획을 짜기 위해서였다. 서둘러 제멋대로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되어서였다.

범한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나지막하게 입을 뗐다.

“다음에 어떤 일이 있을지를 떠나 네가 기억해야 할 게 있다. 우선 그 누구도 네가 그 일과 관련이 있음을 눈치채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게 첫 번째 조건이다.”

범한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너와 연루되었다는 아주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그 즉시 아무것도 하지 말거라.”

홍죽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도 이 정보를 작은 범 대인께 넘기면 대인은 분명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작은 범 대인이 펼칠 중요 행동의 일환이 될 것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당초 홍죽은 자신의 별 볼 일 없는 목숨을 범한에게 넘긴 터였다. 수십 명에 이르는 가문 사람들을 향한 애정을 목숨으로 바꾼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홍죽에게는 별 거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범한이 자신의 안전을 생각해 주자 홍죽은 더 큰 감동을 받았다.

방안의 촛불이 흔들리자 촛불로 생긴 그림자가 살짝 흐려졌다.

범한이 홍죽을 옆으로 불러 귓속말로 몇 마디 건넸다. 범한이 말할수록 홍죽의 눈은 더 빛났다. 하지만 그 빛나는 눈빛에는 여전히 두려움과 놀라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데 이렇게 두려워하고 놀라워하는 것으로는 장래에 닥칠 일과 맞설 수 없었다.

조정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황궁 내 태감들도 몰래 모시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특히 홍죽처럼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큰 태감일수록 더욱 그랬다.

1년 전부터 범한은 몰래 행동에 나섰고, 홍죽은 이미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태에서 범한을, 그리고 수방궁을 모실 수밖에 없었다.

“우리 둘 다 연락하기가 불편하구나. 항상 방법을 찾아야 할 정도니까.”

범한이 어떤 일들에 대해 분부를 내려놓고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고 해서 중간에 누군가를 거칠 수도 없지. 그러니 세부적인 건 내 돌아가서 더 생각을 좀 해볼 것이다. 강남으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한 번 더 만나야 하느니라. 정월 중에 언제 출궁이 가능하냐?”

“22일입니다.”

홍죽이 침을 꿀떡 삼키고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어 갔다.

“마마께서 작년에 강남에서 공물로 바친 옷감 색을 맘에 안 든다 하셨지요. 하여 동이성에 한 무더기 주문해 달라고 황제 폐하께 주청을 올렸습니다. 한데 이득이 되는 거래였던지라 마마께서 제게 상으로 그날 외출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범한은 다음번 접선 날짜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순간 황후가 홍죽을 정말로 총애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범한은 홍죽의 이마에 난 여드름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바짓가랑이 쪽을 슬쩍 쳐다보고는 이내 소리 없이 자조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이 음침한 황궁에 추악한 일들이 차고 넘치다 보니 자신도 어느새 뭐든지 그렇고 그런 일로 연관 지어 생각해 버려서였다.

한데 불가능한 일 아니던가. 입궁하기 전에 엄격히 신체검사를 받았으니, 경국 영토 안에서 김용 소설 녹정기의 주인공인 위소보 같은 인물이 나타날 리는 없었다.

범한은 홍죽의 저택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이에 마지막으로 조심스레 몇 마디 더 건네고는 곧장 자리를 떴다.

범한이 떠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홍죽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온돌 한쪽 구석과 방 안의 등불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무언가 혼미했다. 방문을 열리지도 않았는데, 작은 범 대인은 어떻게 밖으로 나가신 건지.

“하, 정말 신기하다.”

홍죽이 허벅다리를 툭 치며 속으로 감탄했다. 요 며칠 그의 마음은 커다란 돌덩이에 짓눌려 있었다. 한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범한이 다녀간 후로는 마음이 많이 홀가분해졌다. 어쩌면 엄청난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 부담감이 절반으로 줄었기 때문일 수도. 또 어쩌면 작은 범 대인처럼 신선 같은 인물은 분명 그 일을 잘 처리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일 수도 있었다.

그는 범한을 믿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드디어 발을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에 홍죽은 한껏 홀가분한 표정으로 등불을 끄고 옷을 벗고 두툼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불 속에 수아라는 청춘기의 아름다운 육체는 없지만 그래도 작은 홍 태감은 여전히 편안하고 행복했다.

* * *

하지만 홍죽을 향한 범한의 믿음은 그다지 충분한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범한이 홍죽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세 가지 수단이 있어서였다. 첫째는 홍죽 가족의 복수를 해준 것이었다. 둘째는 교주에 있는 홍죽의 형에게 많은 이득을 챙겨준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홍죽을 제대로 잡아둘 수 있었던 건 바로 그에게 ‘정(情)’을 주어서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필요한 건 모두 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돈으로 매수하는 것이고, 어떤 이는 미녀를 가지고 저항력을 잃어버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범한은 홍죽이라는 이 특별한 어린 태감이 인정 넘치고 의협심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그 점을 이용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홍죽은 은혜를 갚기 위해 범한의 첩자가 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또한 우연히 늙은 홍 태감에게 잘 보일 수도 없었을 것이며······.

하지만, 사람의 성격과 품성은 항상 처한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홍죽은 이제 더 이상 산속에서 살기 위해 도망치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황궁에서 아무에게나 무시당하던 작은 내관도 아니었다. 그는 현재 동궁의 어엿한 수령 태감이자, 황후의 총애와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아울러 황제 폐하의 총애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에 황궁 내관들과 궁녀들도 그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한데 사람이란 환경에 따라 기질이 변하기 마련이고, 허영으로 뼈가 녹고 이익에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누구도 나중에 홍죽이 이익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아무도 모르게 다른 쪽으로 붙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는 없었다.

홍죽이 범한의 사람이란 걸 아는 사람이 없으니, 다른 파벌에서는 홍죽을 쉽게 받아들일 것이었다. 만약 홍죽으로 첩보전을 펼치는 중이라면, 범한은 당연히 그와 같은 상황을 즐길 것이다. 하나 만약 홍죽이 정말로 어떻게 하기라도 한다면 범한으로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러한 비밀이 있는 건 다행이었고, 범한은 그 사실에 감사했다. 향후 자신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지를 떠나, 적어도 그러한 공동의 비밀 때문에라도 홍죽은 자신을 곁을 떠날 수 없어서였다. 적어도 장 공주와 태자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황성 앞쪽에 자리 잡은 거처에는 온통 어둠뿐이었다. 범한은 밖에 나가기 전에 설치해 놓은 것들이 누군가에게 훼손되지는 않았는지부터 조심스레 확인했다. 살펴보니 이 짧은 시간 동안에는 자신을 귀찮게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이에 범한은 붙여 두었던 머리카락을 제거했다. 그리고 안쪽에서 달게 자고 있는 내관들의 코끝에 무언가를 발랐다.

그런 후 잠자리로 돌아와 오는 길에 손이 가는 대로 집어 온 어주(御酒)를 품에서 꺼내 침대 주변에 조금 뿌린 후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내 고개를 파묻고 잠들어 버렸다.

* * *

마차에 앉아 있던 범한이 고개를 돌려 황궁의 붉은 담벼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황궁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입궁을 너무 자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번 입궁할 때마다 처음에 여러 마마님들께 인사를 드렸을 때처럼 그 싸늘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이건 날씨와 상관없이 그냥 추운 거였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냉랭함 때문이니까.

범한은 황궁의 그런 느낌이 싫었다. 그래서 황궁에서 지내는 게 싫었고, 황궁에서 갇혀 지내는 황제 아버지를 동정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자신은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건 투정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전생의 모 인터넷 포럼 댓글에서 황제란 직업은 비인간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란 말을 본 적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자신의 직업 선택 자유의 권리를 보장받고 싶었다. 범한과 진평평이 가장 크게 충돌하는 부분도 대개가 이 문제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재화를 갖게 되고, 말을 달려 강남으로 내려가고, 등에 천자의 검을 지닌 채 세상의 권력을 휘두르니, 이것만으로도 꽤 멋진 삶을 사는 것이었다.

사대종사 중에는 섭류운이 가장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군산회의 자금과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보살핌이 필요했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그런 게 필요 없었다.

아름다운 상상을 하다가 범한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고는 아내를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손실로 그녀의 머리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몇 년 지나면 천하가 태평해질 거예요.”

“몇 년이요?”

임완아가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강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와의 대화는 어땠어요?”

마차 밖으로 펼쳐진 경도 거리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임완아가 갑자기 던진 질문이었다.

범한은 갑자기 치고 들어온 질문에 살짝 얼떨떨했지만 그래도 온화하게 받아주었다.

“잠시 한담을 좀 나누었어요. 실질적인 이야기가 오간 건 아니었고요. 완아는 어제 너무 피곤했나 봐요. 당신이 일찍 잠드는 바람에 나도 광신궁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어요.”

“자는 척 한 거예요.”

임완아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잠들지 않으면 둘이서 대화를 나누기 불편할 것 같아 그랬어요.”

범한은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내가 자신에게 장모님과 담판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어서였다. 그런데 이게 타협할 기회가 될지에 대해서는······ 양측은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힌 후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그 피를 깨끗하게 씻어내고 두 번째 악수를 나누기는 힘들었다.

옆에 있는 부군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임완아는 순간 지치고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상공은 어떻게 할 거예요?”

범한은 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를 몰라 그냥 조용히 아내를 다정하게 자기 품 안으로 끌어왔다.

임완아는 저항 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갸웃한 상태에서 범한의 가슴에 기댔다. 한데 미간에 희미하게 절망이 스치고 지나가더니 금세 눈에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에서 떨어진 진주는 끊임없이 흘러내려 범한의 옷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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