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화 한밤의 황궁 그리고 적막함
당황한 장 공주가 고개를 돌려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고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본궁에게 권하고 싶은 게 뭔가?”
“안지에게 감히 그런 게 있겠습니까.”
범한이 씁쓸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장 공주가 살짝 비웃었다.
“이 세상에서 자네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줄지 않았는가. 한데 고작 그런 말을 가지고 함부로 본궁의 의지를 약화시키려 하다니.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네.”
이운예는 황태후에게는 착하다 못해 바보 같은 딸이었다. 황제 폐하에게는 조숙한, 심지어는 변태 같은 조력자였다. 전임 재상 임약보에게는 가녀리다 못해 가식적인 가인(佳人)이었다. 황자들에게는 온화하고 아름다우면서 혼이 쏙 빼놓는 아낙이었으며, 부하들에게는 생긋 웃으면 백 가지 아름다움을 피어나게 하면서도 손을 한번 휘 내저어 모든 걸 멸(滅)해버리는 주인님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광신궁의 이운예는 훌륭한 사위 범한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가장 순수한 그녀 그 자체였다. 범한 앞에서는 그 어떤 미색이나 겁먹은 태도로도 자신을 가리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범한을 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건 적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가식을 내보일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범한 역시 살짝 부끄러워하는 부드러운 웃음 따위는 짓지 않고 대놓고 말했다.
“빛과 그림자는 백대의 과객이오, 하늘과 땅은 만물이 머무는 곳이라 했습니다. 안지가 감히 무언가를 권할 수는 없겠지요. 하오나 인생이란 씁쓸하고도 짧지만, 그래도 찾아서 즐길만한 큰 즐거움은 항상 있다고 말을 해드리려······.”
범한이 아직 말을 마치지 않았는데 장 공주가 중간에 끼어들어 싸늘하게 말했다.
“시선(詩仙)이란 게 대체 뭐지? 칼이 날아오면 막아낼 수 있는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자네 앞에 있는 게 누구인지 똑똑히 보게. 케케묵은 구절들을 우쭐해 하면서 그럴싸하게 읊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란 생각은 말게.”
평범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오만함과 범한을 무시하는 태도가 들어 있어 유난히 날카로웠다.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는 자리였다. 그러니 장 공주마마는 자신의 가장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인이라고 해서 감성으로 압도해 버릴 수 있다고 여기지 말게.”
장 공주가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자네가 쓴 것 중에 이런 말이 있었지. 남자란 온통 진흙탕이라고 말일세. 그렇다면 내 앞에서 자신을 옥석 취급을 해서는 안 되겠지.”
범한은 말문이 턱 막혀 씁쓸하게 웃으며 듣기만 할 뿐이었다.
장 공주가 광신궁 문 옆으로 걸어가 면으로 된 가림막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돌계단 위에 서서 적막으로 둘러싸인 황궁의 밤 풍경을 둘러보았다.
이쯤 되자 범한도 계속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장모님이 하는 말을 계속 듣고 싶었다. 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서 섰다.
“자네 앞에 서 있는 게 누군지 똑똑히 보게.”
장 공주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살짝 가녀린 체구의 그녀에게 범한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일었다. 그녀의 몸속에 끝 모를 미친 생각이 들어 있는 것만 같아 보여서였다.
“본궁은 해당타타처럼 바보는 아닐세.”
장 공주가 말을 이어 갔다.
“북쪽에서 드디어 괜찮은 여자가 나타났다 싶었어. 한데 예상과 달리 속물이라니.”
범한은 할 말이 없었다. 이에 씁쓸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당신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이 감히 누가 있겠습니까? 이 남존여비의 세계에서 장 공주마마 정도나 남들이 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고 남자와도 선후를 다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모든 방면에서 말이다.
범한은 은연중에 살짝 이해가 되었다. 장 공주는 그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음······’
그랬다. 그래서 하늘도 곧 울 것만 같았다.
범한이 난처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여자와 마주하고 있다 보니 뜻밖에도 속수무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였다.
“모후께서 왜 자네를 입궁토록 하시고, 오늘 밤에 연회까지 열어주셨는지 분명히 잘 알고 있을 거야.”
장 공주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자네는 내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으니 내가 이러쿵저러쿵 얘기해 줄 필요는 없겠지. 다만 조금 더 감추게. 본궁은 모후께서 크게 상심하시는 걸 보고 싶지 않거든.”
그러자 범한이 몸을 깊숙이 숙이고 성심껏 말했다.
“명령을 삼가 받들겠나이다.”
“삼가 받들겠다고?”
장 공주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은연중에 보이는 붉고 윤기 나는 곡선은 유난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자네 능력은 본궁이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뛰어났어. 한데 자네가······ 그녀의 아들이란 사실에 더 놀랐지. 어쩐지 요 2년 동안 죽이려 했는데도 못 죽이고, 움직이게 만드는 것도 안 되고,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는 자네를 총애하시고, 늙은 놈도 자네를 아낀다 했어. 한데 유감스럽게도······ 자네는 더러운 남자에 불과해.”
범한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호르몬 분비 문제 때문입니다.”
“호르 뭐?”
살짝 당황한 장 공주가 매혹적인 눈가에 처음으로 단호함 이외의 감정, 그러니까 불확신에 의한 궁금증이 실렸다. 하지만 이내 범한이 짜 놓은 수에서 벗어나 싸늘하게 말했다.
“자네는 자네 어미처럼 새로운 단어를 많이 쓰는군.”
범한은 마음이 살짝 떨렸지만 차분하게 물었다.
“제 어머니를 만나 뵌 적이 있으십니까?”
장 공주가 잠시 침묵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한 거야? 그녀는 경도로 온 후부터 성왕부에서 지냈네. 그러니 내 어찌 안 만나 봤겠는가? 만나고 싶지 않아도 불가능한 일이었어.”
장 공주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부드러워 보이게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본궁은 그녀가 매우 마음에 들었지. 질투했다고도 할 수 있고. 한데 결론을 말해주자면, 나는······ 그녀가 우습다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웃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장모님께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우 대담한 말이었다. 하지만 장 공주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쳤다.
“많은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비쳤을 거야. 본궁이 어려서부터 황형을 보좌하고, 경국을 위해 그리 많은 일들을 했어도······ 자네 어미와 비교를 하면 내가 제일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그래도······.”
장 공주가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여전히 그녀가 우습다네.”
말을 마친 장 공주는 범한에게 대꾸할 기회도 주지 않고 살짝 신경질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결국에는······ 죽었거든.”
범한은 드디어 오늘 역사의 최종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려왔다. 한데 장 공주가 이어서 한 말 때문에 범한의 기대감은 김이 새버리고 말았다.
“한데 본궁은 살아 있어.”
장 공주가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장래를 예견하는 사람이라면 본궁이 그녀보다 더 잘했다고 여기지 않을까?”
장 공주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달무리가 낀 듯한 부드러운 눈동자로 범한을 노려보며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천하를 통일하지 못했어. 한데 자네가 봤을 때 본궁은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어 보이는가?”
장 공주가 자신을 주시하자 범한은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침묵한 후 천천히 입을 뗐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강토의 크기와 역사상의 기록만 가지고 기준으로 삼는 건 아닙니다.”
범한은 문득 그 비 오는 날 읽은 서한 생각이나 신경이 살짝 딴 데로 팔린 상태에서 말을 이어 갔다.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은 경국의 천하 통일을 돕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그렇게 할 능력이 없어 그런 건지, 아니면 그쪽으로 무관심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장 공주는 살짝 당황했다. 이에 심리적인 방어가 조금 느슨해져 살짝 분에 찬 상태에서 말했다.
“하지 못하는 걸 가지고 무관심이라고 말하는 건가? 자네가 아까 말했듯이 사람은 언제가 지게 되어있네. 겨우 수십 년밖에 살지 못해. 그러니 오래오래 사람들 마음속에 남으려면 역사에 남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나?”
“제 어머니는······ 역사에 그 어떤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범한이 장 공주를 꿰뚫듯 잠시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장모님께서도 이유를 아실 겁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이 세계에 존재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황실 금고며 감찰원을 통해 그분은 세상에 무언가 말을 남기셨지요······ 역사서도 언젠가는 사람들에 의해 잊히기 마련입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는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니까요. 하오나 이 세계를 제대로 바꾼다면 그건 계속해서 남아 있겠지요.”
범한의 말에 장 공주는 일단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 자그마하게 말했다.
“맞는 말이군. 나는 이 세계에 제대로 된 변화를 가져온 적이 없었어.”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조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여러 나라의 국경이 계속해서 변하게 만들고, 경국의 국토를 계속해서 외부로 확장하도록 만든 것 말고는 말이야.”
“만리의 강산을 이룬다 한들, 죽고 나면 그저 무덤이나 될 뿐입니다.”
범한이 진지하게 말했다. 앞서 장 공주가 여러 차례 그런 말은 하지 말라며 비웃었지만, 그런데도 범한은 진부한 말로 맞받아쳐 버렸다.
장 공주가 이번에는 범한이 아닌 황궁의 고요한 정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 세상의 대다수 남자들과는 생각이 다르군. 어떤 남자들은 비겁하고 무능해서 체념 조로 그런 멋들어진 말들을 하던데. 구름이 적고 산들바람이 분다는 등등 운운하면서 말이지······. 자네처럼 일찌감치 충분한 지위에 오르고 가능성을 가진 남자 중에서는 오히려 공을 세운다거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고······ 더군다나 담력도 없더라고.”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대꾸했다.
“어쩌면 이 안지는 스스로 그런 능력이 없다는 걸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어서일 것입니다. 황제 폐하처럼 영웅적 기개를 지닌 인물은 아무 때나 나오는 게 아니니까요.”
말을 마친 범한이 조심스레 장 공주를 슬쩍 살폈다.
장 공주는 범한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황궁의 한쪽 끄트머리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모습은 범한의 말 때문에 무슨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사람처럼 보였다.
“본궁은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네.”
말을 마친 장 공주는 한동안 말을 않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내가 권력이란 걸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야. 본궁은 단지 권력으로 어떤 바람을 이루고 싶을 뿐이니까. 그 바람은 자네 같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거라네.”
범한이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장 공주가 불쑥 손을 들어 귀여운 꼬마 아가씨처럼 몇 차례 따뜻한 입김을 불고는 미소를 지었다.
“여인도 일을 잘 할 수 있어. 본궁은 줄곧 그 점을 증명하고 싶었어. 그런데 왜 이 세상에 있는 남자들은 여자를 이용하기만 하는 걸까? 왜 여자는 남자를 이용하면 안 되는 거지?”
경국 최고 미인이 범한을 향한 마지막 말을 했다.
“이건 본궁이 자네 어머니에게 배운 점이라네. 내가 자네 어머니를 무시한 건 결국에는 그녀도······ 평범한 여자들처럼 남자에게 이용만 당했기 때문이야.”
장 공주가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게나. 본궁은 피로해 쉬어야겠네. 그리고 이런 대화는 두 번 다시는 없을 걸세.”
장 공주의 말이 끝나자 범한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곁눈질로 반 돌아서 있는 장 공주의 유려한 신체 곡선을 힐끔 쳐다보고는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건 천고의 세월이 흘러도 바꾸기 힘든 남녀 간 전쟁일 것입니다. 당신이라고 해서 남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반발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 것 같습니까?’
이윽고 장 공주을 옆을 지나 길을 나섰다.
장 공주는 떠나가는 범한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오늘 한 말이 범한의 마음속에서 독의 꽃을 피우기를 바랐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들어 황궁 상공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손가락 끝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차 어떤 곡선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오늘 저녁에 황제 오라버니께서 어느 궁에서 밤을 보내실까?’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