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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94화 (594/1,108)

594화 다시 만난 장 공주

임완아와 함께 손을 잡고 함광전에서 물러날 때였다. 어르신께서 자신을 입궁시킨 이유를 알게 된 범한은 그제야 참아왔던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와 함께 광신궁으로 가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라니. 강제로, 장 공주에게 말이다!

황태후는 손자들이 예에 어긋나게 구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니 범한이 경도로 돌아와 몇 차례 입궁을 했는데도 계속 장 공주를 피하자 황태후로서는 불쾌했다. 이에 그녀는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장모와 사위 사이에 있는 틈을 메우려 했다. 그 결과 임완아가 황궁에 머물게 된 걸 이용해 범한을 입궁시킨 것이었다.

날은 이미 저물어 황궁 안은 어두컴컴한 상태였다. 임완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말했다.

“광신궁으로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범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아내를 달랬다.

“장 공주님은 당신의 어머니세요. 그러니 한 번 만나 뵈어야겠지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범한의 심장 박동 수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임완아가 범한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상공도 우리 어머니를 만나 뵙고 싶지 않잖아요. 그냥 황궁에서 몰래 나갈까요?”

범한은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할마마마께서 철딱서니 없는 이 망할 것들을 때려죽이실 수도 있겠네요.”

앞쪽 멀지 않은 곳에서 광신궁이 한 자락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몇몇 궁녀가 벌써부터 고개를 숙이고 두 사람을 맞았다. 엄밀히 말해, 범한과 임완아는 광신궁의 반쪽 주인은 되는 셈이었다. 단지 이상하게도 광신궁과 이들 부부와의 관계는 일찌감치 냉담하고 괴이하게 변했을 뿐이었다.

범한이 온화하게 웃으며 자신들을 맞아준 궁녀들을 쓱 바라보았다. 범한의 안목은 극도로 날카로웠다. 그래서 광신궁에 처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궁녀들이 하나 같이 극도로 조심하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궁 한쪽으로 들어가자 얼굴 위로 약하게 바람이 불어 왔다. 한데 매우 싸늘한 기운이어서 범한은 저 안에 있는 여인에게 순간 진저리가 났다.

* * *

“우리 의신이 어디 좀 보자꾸나.”

장 공주 이운예는 궁궐 밖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억지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는 어조였지만, 범한의 귀에는 매우 미세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에 살짝 놀라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장 공주는 자기 딸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임완아는 도톰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상공의 손을 꽉 쥔 채 절대 놓으려 하지 않았다.

범한은 아내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그런 그녀를 응원해 주었다.

임완아가 정신을 가다듬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돌계단 위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향해 살짝 인사를 한 후 자그마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어머니께 인사 올립니다.”

임완아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가늘고도 낮게 깔려 있어서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부자연스러웠다.

그러자 장 공주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자기 친딸을 바라보았다. 살짝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얼굴에 갑자기 차분함이 자리를 잡더니, 그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요즘 잘 지내느냐?”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살짝 불편함이 담은 헛기침을 하고는 임완아 곁으로 다가가 웃으며 입을 뗐다.

“장모님께 인사 올립니다.”

장 공주는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천하절색의 청초한 그녀의 얼굴에서 한 줄기 괴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본궁을 만나러 올 줄도 아는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장 공주와 임완아 모녀 사이에는 냉기가 흘렀다. 그런데 또 하필이면 장 공주는 범한에게 너무 건성으로 말을 건넸다. 하지만 다행히도 범한이 끼어든 덕분에 돌계단 위아래의 분위기는 한결 부드럽게 변했다.

장 공주는 임완아의 손을 이끌어 나란히 돌 계단 위에 서게 했고, 궁녀들에게 무언가 분부를 하고는 이내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범한은 고개를 반쯤 들고 돌계단 위에 있는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재미있게도 임완아는 어머니와 하나도 닮지 않았다. 장 공주가 피부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너무 젊어 보여서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은 모녀라기보다는 자매처럼 보였다.

임완아는 유부녀이기는 했어도 여전히 덜 여문 티가 있었다. 반면 장 공주는 성숙한 여인이었지만 퇴색한 기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여전히 활짝 피어 있는 한 떨기 목련꽃 같아······ 사람의 눈을 단번에 잡아끌었다.

* * *

광신궁에서는 이미 저녁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을 초대되지 않았으니, 장 공주와 범한 부부 이렇게 세 사람만을 위한 연회였다. 연회 석상에서 임완아는 어머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로써 긴장감을 살짝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애당초 모녀 사이라 그런지 장 공주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딸아이의 변화가 기뻤는지 장 공주의 말소리도 점점 온화해지고 진심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슨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장 공주가 느닷없이 한숨을 내쉬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천천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눈에는 이 어미가 많이 모자라 보이겠구나······.”

임완아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녀는 어렸을 때 황궁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자랐다. 비록 황태후의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린 소녀는 어미의 정이 그리웠을 것이다. 그러다 어머니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와 같은 말을 해주자 그동안 응어리져 있던 마음속의 복잡한 감정이 말로 나오기 보다는 눈물이 되어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아래쪽에 앉아 있는 범한은 나란히 앉아 있는 모녀를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녀 중 한 사람은 경국 제일의 미녀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마음에서 제일인 미녀였으니, 이와 같은 광경이 범한에게 어찌 흐뭇하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 한데 현 상황을 보니, 괴롭지만 인정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바로 자기 아내가 장모님보다 외모가 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오늘따라 장 공주는 예전과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붉은 입술에 맑은 눈동자, 검은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보기 힘든 진실한 마음까지 드러내 보여주었다. 이에 말로만 듣던 그녀의 여리여리한 아름다움보다는 생기 넘치는 절세의 미모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인들 간의 말소리가 갈수록 홀가분해지더니, 그녀들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범한에게는 이와 같은 광경이 전혀 의외로 다가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에 대해 믿음을 지니고 있어서였다. 장 공주가 아무리 미쳤다고는 해도 그녀도 어머니였다.

범한이 보기에 이 어미 같아 보이지 않는 어머니는 전생에 들었던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은 중학생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러니 해가 지나면서 그녀도 나름 마음에 걸리는 게 생겼을 것이고, 무언가 깨닫게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뒤쪽에 있는 궁녀가 범한의 술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술을 쭉 들이켜자 범한은 목구멍이 찌릿찌릿했다. 도수가 높은 오량액이었던 것이다. 한데······ 왜 울적하고 상실감 같은 게 드는 걸까?

범한은 장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에서는 전혀 이상한 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이 이상해지면서 ‘이 절세의 미인이 왜 이런 길을 걷게 된 걸까?’라는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광신궁 밖의 한기가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와 궁 안을 항아(嫦娥)가 사는 달처럼 바꾸려 했다. 하지만 붉은 촛대 옆에서는 따스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취기도 한껏 올라 이곳에는 봄기운만 만연해 있었다. 이에 찬바람의 계략은 망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장 공주와 완아가 서로 가볍고 온화하게 대화하는 모습에 범한의 얼굴에도 점점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때의 경계심과 어색함 따위는 사라지고 없었다.

장 공주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유혹적이었다. 범한은 홍죽이 전해준 정보 때문에 강한 충격을 받은 건 있었지만, 그래도 태자마마에 대한 불쾌감이 더 강렬하던 터였다.

한데 지금 이 순간, 경국 제일의 미녀를 보고 있는 동안은 젊은 사위도 태자에게 지나친 반감이 일지 않았다.

물론 이런 감정은 원래 매우 미묘한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살며시 술잔을 내려놓고 잠시 자기 비하하듯 웃었다. 그리고 장 공주도 참으로 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딱한 사람에게는 항상 무언가 원한이 있는 법이었다.

장 공주마마는 황태후마마께서 가장 사랑하는 딸이다. 황제가 십년 동안 의지하고 있는 대단한 인물이기도 하고 말이다. 특히 범한에게는 오늘 궁궐 내 복식으로 차려입은 이 미인은 독사의 혀를 가지고 있어 피를 보지 않고도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열두 살 때 범한은 장 공주에게 처음으로 암살을 당할 뻔했었다. 그리고 경도로 온 후에는 양측은 음모와 피[血]로 얽히고설켜 어느 한쪽도 발을 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요 몇 년 동안 범한의 세력은 점차 확대되는 반면 장 공주의 세력은 갈수록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이 득세하자 다른 쪽이 세력을 잃은 것이었다. 이에 장 공주는 일찌감치 자신의 사위가 절대 허투루 봐서는 안 되는 적이란 걸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국에서 범한과 가장 직접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건 태자마마와 2 황자였다. 그런데 사실 이 두 사람은 장 공주가 내던진 졸(卒)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범한은 환생 후 이 세계에서의 진짜 적은 지금 이 앞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란 걸 똑똑히 알고 있었다.

장 공주는 범한에게는 가장 강력한 적수다. 그래서 요 몇 년 동안 감찰원도 신양과 광신궁에 대해 집중적으로 정보활동을 해왔다. 이에 범한은 장 공주를 이해했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보다 그녀를 더 잘 이해할 정도였다.

이는 일종의 심리학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장 공주의 과거 그 여인을 향한 복잡한 시선, 심지어는······ 기형적인 감정까지 범한은 민감하게 감지해낼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경국에서 섭가가 사라진 후 생겨난 괴상한 정치 국면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 원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딱한 구석이 있는 것이었다.

다만 범한이 장 공주에게는 연민을 느낄 리는 없었다.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범한은 이 세계 그 누구보다 냉정하고 무정했다. 그래서 과거에 무수히 말했던 ‘취해야 감정이 깊은 줄 알고, 죽어 봐야 목숨이 중한 줄 안다’는 말처럼 그는 살아남으려 했다. 그리고 누구든 그의 생존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보는 앞에서 죽음을 면치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 * *

“강남은 어떻지?”

장 공주가 새하얀 어깨를 살포시 펴며 술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겨울이고, 황궁 화로에는 죽탄이 가득 들어차 있었지만, 실내는 그다지 따뜻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 공주도 살짝 두툼한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한데 이와 같은 옷 때문에 그녀가 지닌 신체의 곡선과 무한한 매력은 감춰져 있었다.

임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궁녀들도 뒤쪽에서 조심스레 나와 명령 이행 사항을 보고하고는 바로 함광전 뒤쪽으로 물러나 문을 닫았다. 한데 범한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기만 할 뿐 무언가 말을 함으로써 그들의 행동을 가로막거나 하지는 않았다. 장 공주는 장모님이었으므로 범한으로서는 직접 나서서 그들을 막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강남은 참 좋은 곳입니다. 풍경도 좋고, 사람들도 좋고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장모님께서도 언제 시간 나실 때 항주에 가 보시지요.”

장모님이라는 말을 내뱉는 게 유난히 어색하기는 했지만 범한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몇 년 전에 가봤네. 그런데 지금도 풍경은 비슷할 테고 사람도 그대로일 텐데, 다시 가 볼 필요가 있을까?”

장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궁전 바깥쪽으로 향하며 조소하듯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황실 금고가 원래는 그녀 것이었는데 범한이 모두 가져갔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범한은 계속 자리에 앉아 있느라 살짝 숨이 막혀 왔다. 하지만 한참 후 공손하게 말했다.

“세상에 태어났다면, 사람이며 풍경은 봐야겠지요. 사람은 꽃처럼 매년 바뀌어 언제가 지는 존재입니다. 항상 똑같지는 않은 것이지요. 반면 풍경은 인간 세상에 들어와 있는 것이긴 해도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짧은 생을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연을 만고불변의 풍경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 안지는 사람과 풍경을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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