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3화 모호한 역할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는 언빙운의 낯빛을 바라보며 범한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손가락 끝을 언빙운 어깨에 얹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언빙운은 속으로 살짝 놀란 상태였지만 겉으로는 얼음처럼 싸늘한 얼굴을 유지한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몸이 어째 이 모양이 된 겁니까?”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듣자 하니, 요 며칠 귀가하지 않았다면서요?”
언빙운이 책상 위에 있는 문서들을 대충 정리하며 대꾸했다.
“감찰원 감옥에 십십 여 명의 경도 관원들이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매일 대리사로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지요. 또 서둘러 말끔히 처리해야 하는 일들도 있고요. 양쪽에서 압박을 받고 있는데, 어디 감찰원에서 나갈 새가 있겠습니까.”
그 사이 범한에게 단정하고 깨끗하게 정리된 밀실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나무 책상 위에 문서가 깔끔하게 부문별로 나뉘어 있어 범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원장 대인이 계실 때보다 방이 훨씬 쾌적해졌군요. 이 일이 적성에 딱 맞아 보입니다.”
피곤했던 언빙운은 손가락 두 개로 미간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하얀 피부가 붉게 변할 때까지 문지르자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귀가해요.”
언빙운이 미간을 주무르는 내내 범한은 고개를 가로로 내젓고 있었다.
언빙운은 범한의 말은 아랑곳 않고 다시 문서 하나를 펼쳐 들고는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대인은 2 황자를 칠 생각이지요. 그리 많은 사람을 공격했으니, 누군가는 처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데 대인과 원장 대인께서는 게으름만 피우고 계시니, 감찰원을 게으름뱅이들에게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범한은 말 속에 담긴 원망을 느꼈음에도 오히려 웃기 시작했다.
자신이 공무 처리하는 걸 범한이 쳐다보고 있는 게 불편했는지 언빙운이 한참 후 문서를 덮고 고개를 들었다.
“조정에 있는 2 황자의 세력을 대인께서 완전히 제거한다고 해도, 이거 하나만은 일러드려야겠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대인은 2 황자 옆에 있는 곁가지들만 제거했을 뿐입니다.”
언빙운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대인이 가지고 있는 도끼로는 2 황자를 지탱해주고 있는 제일 굵은 나무를 찍지도 못했습니다.”
언빙운이 언급한 게 저 멀리 정주에서 말을 키우고 있는 섭씨 가문임을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섭씨 가문은 닷새면 경도까지 올 수 있고, 집안에 대종사까지 모시고 있었다. 그러니 섭령아와 혼인을 한 후 그는 장 공주 말고도 섭씨 가문이라는 하늘 높이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를 뒷배로 두게 되었다.
이번 경도의 야간 습격 계획은 2 황자를 따르는 조정에 있는 중견 관원과 그를 따르는 무인 세력을 깨끗하게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섭씨 가문에는 아무런 손실을 입히지 못했다. 그러니 섭씨 가문이 정주에 굳건히 버티고 있는 한 2 황자는 제대로 된 타격을 입을 리 없었다.
범한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산골짜기 급습 사건 때 확보한 수성용 강노 세 대가 섭씨 가문을 궁지로 몰아넣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저 만 리에 밖에 있는 북제의 젊은 황제가 인사도 할 겸 보낸 국서에서 경국 조정에게 조사를 멈출 것을 압박한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섭씨 가문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 없게 되었다.
“섭씨 가문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언빙운이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2 황자 마마의 기반은 섭씨 가문입니다. 하오나 그렇기 때문에 장 공주에 대한 의존도가 약해지게 된 것이고······.”
범한이 제일 믿고 있는 두뇌가 수많은 의미가 담긴 말을 했다. 이는 곧장 범한의 마음속으로 깊이 파고들었고 그를 크게 흔들어 놓았다. 이로써 범한은 오늘 알게 된 최상급의 비밀 정보에서 무언가 다른 냄새를 맡아 버렸다. 과거에 장 공주가 공개적으로 태자를 도왔든 아니면 몰래 2 황자를 지원하고 있는 중이든, 이 미친 여자가 정말로 대단한 수를 쓴 것이었다. 바로 조카 중 누가 등극하든 그녀의 통제 하에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장 공주 이운예는 시야가 넓은 대단한 사람이었으니, 자그마한 걸 원할 리 없었다. 그런데 현재 2 황자는 섭씨 가문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겼으니, 장 공주에 대한 의존도는 약해질 터. 이는 곧 2 황자가 등극하면 그녀가 뒤에서 계속 조정하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설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가슴이 떨렸다. 하지만 이내 싸늘한 웃음을 날렸다.
“태자에게는······ 가망성이 없어요. 그리고 둘째는, 계속해서 무너뜨려야 합니다.”
언빙운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감찰원은 지금껏 황자들 간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한데 이 무형의 규율은 범한이 감찰원을 이어받은 후부터는 점점 깨지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이 제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어도 황태후마마께서는 태자마마를 유난히 아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태자에게 아예 기회가 없을 거라고?
범한 입장에서는 당연히 무언가 설명 같은 걸 해줄 수는 없었다. 이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문무와 하서비에게······ 그물을 거둬들일 준비를 하라고 말을 전해줘요.”
그러자 언빙운이 범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강남 일은 거의 장악을 한 상태입니다. 하오나 단칼에 베어 버리려 한다면······ 제대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경 경도에서 보고 있는 건데······. 경도에서 갑자기 큰 변동이 일지 않는 한은 힘들 겁니다.”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주도면밀한 작은 언 공자가 자신이 무심코 한 말에서 무언가를 알아채버린 것만 같아서였다. 이에 범한이 온화한 목소리로 해명하기 시작했다.
“그저 미리 준비하자는 것뿐입니다. 경도의 국면이 1년 동안 변하지 않는다 해도, 명씨 가문 일은 황제 폐하께서 더 이상 용인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황제 폐하의 뜻이라고 말하자 언빙운이 살짝 의혹을 거두고 물었다.
“어느 정도까지 거둬들이실 생각입니까?”
범한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살짝 딴 데 팔려 있어서였다. 1년 동안 강남에서의 복잡한 계획과 별것 아닌 것처럼 꾸며 놓은 숨겨진 위험들이 화면이 지나가듯 주마등처럼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황실 금고의 3대 작업장에 있는 사람들, 작은 섬과 산야에 가득했던 시신들, 황실 금고에서 혼절해버린 명청달, 소주부에서의 소송, 명씨 가문 큰 노마님이 목을 매고 죽은 일, 명씨 가문의 여섯째가 감옥에 들어가 피살된 일, 명씨 가문의 일곱째가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것······.
명씨 가문은 이미 범한의 통제 하에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일을 할지에 관련해서도 범한의 허락이 필요했다.
‘천하제일 부자는 황궁보다 깨끗한 구석이 없더라고요.’
범한이 속으로만 중얼거리고는 언빙운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몽땅 다 거둬들여야죠. 전장(錢莊) 사람에게 해야 할 일을 정해줘요. 그리고 그 밖에 명원에 있는 사람에게는 몇 명 정도는 죽일 수 있도록 허용해 주고요.”
범한이 ‘전장’을 언급하자 언빙운은 1년 동안 준비한 큰 패를 드디어 가동시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름만 있는 심씨 가문과 동이성의 전장은 원래 언빙운이 마련을 해둔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어떻게 해야 명씨 가문에 대적할 수 있는지를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장의 은전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에 대해서만 명확히 조사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참다못한 언빙운이 소리를 죽여 범한에게 말했다.
“강남에 동원한 그 돈이 어디에서 왔는지 저로서는 알지 못합니다. 하오나 주의를 드리자면 절대로······ 북제는 안 됩니다.”
언빙운이 단번에 맞췄지만 범한은 그 사실을 시인할 수 없어 자조적으로 받아쳤다.
“내 어머니께서 어떤 분인지 잊지 말아줘요. 황실 금고 말고도 나 쓰라고 은전 쪼가리 정도는 남겨 주셨다고요.”
그러자 언빙운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한데 그는 범한의 해명을 믿고 있었다. 섭가가 과거에 얼마나 튼튼한 기반을 닦았는지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 * *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범한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감찰원에 헛걸음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황궁의 그 일에 언빙운을 끌어들이지 못해서였다. 언빙운 같은 경국의 젊은 인재에게는 경국과 황제 폐하의 이익이, 그리고 천하 통일의 영광이야말로 최고의 준칙이었다.
그래서 언빙운은 범한을 위해서라면 몸과 마음을 다해 도왔다. 범한이 한 모든 일이 경국의 이익과 배치되는 게 없어서였다. 그렇다면 범한이 장래에 혹시라도······ 정말로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동안 절친하게 지낸 제사 대인을 언빙운은 어떻게 대하게 될까?
범한은 그게 필연이란 걸 알고 있었다. 모두들 자기가 속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자신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현 세상에 존재하는 나라라는 개념에 대해 조금 담담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합리적이지 않을뿐더러 이성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언빙운의 경우는 범한 곁에서 조금 모호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는 계년조 소속이 아니면서 범한의 측근으로 절대적으로 많은 부분에 참여했다. 특히나 작년에 강남에서 실행한 계획은 그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이에 이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범한은 자신과 북제 사이의 거래 내용, 아울러 가장 은밀한 핵심 내용은 일단 작은 언 공자에게는 노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한데 이번 감찰원 행에서 ‘어떻게 해야 홍죽과 접선할 수 있을까?’라는 지극히 중요하고 긴박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에 범한은 턱을 괸 채 시종일관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보니 뜻밖의 명이 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범한은 순간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홍죽에게 그 일을 확인하려면 오늘 저녁이 최적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번 명은 황제 폐하가 아닌 줄곧 침묵하고 있던 황태후로부터 왔다. 경국은 효(孝)에 입각해 천하를 다스렸고, 황제 폐하께서는 효를 실천하는 데 있어 만민의 표본이었다. 그러므로 황태후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늙은 노부인의 진짜 영향력까지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황태후의 명은 범한이 저택에서 나갈 때 도착했다. 입궁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그가 몰래 집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명을 들고 온 태감은 범한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유씨가 귓가에 속삭여 주는 말을 들었다. 그러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 난감해하는 요 태감에게 눈길을 돌리는 순간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황궁에 직접적이고 몰래 잠입하려면 홍 태감의 귀와 눈을 속이기 위해서라도 오죽 아저씨가 필요하던 때였다. 한데 오늘 저녁에 직접 황궁에서 머물 수 있게 되다니······ 홍죽과 접선하는 게 그만큼 쉬워져서였다.
더군다나 자신은 남자이니, 분명 여인들이 묶는 궁에서 머물지 않을 테고, 황성 앞쪽에 자리 잡은 방에서 지내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범한 입장에서는 일 처리가 비교적 수월해진 것이었다.
범한은 그저 황태후마마께서 왜 자신을 급히 입궁시키려 하시는지가 궁금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