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화 황궁에서의 이상한 일
집으로 돌아온 후 범한은 정원 구석에 자리 잡은 가장 은밀한 서재로 들어가 주위에 감시하는 눈과 귀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호위(虎衛), 그리고 황제 폐하가 범씨 가문에 잠입시켜 둔 나이든 여종이 서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자 범한은 그제야 긴 의자에 양다리를 벌리고 편안하게 드러누웠다.
황실 금고에서 나온 순양모 양말을 신은 발은 서재 문 쪽을 향해 있었다. 쑤시고 탱탱 부은 발의 열기를 식히자 범한은 그제야 살 것만 같았다.
벗어 놓은 장화는 긴 의자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종잇조각은 이미 범한의 손에 들려 있었다.
범한과 홍죽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심지어는 진평평과 아버지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직접 영주에서의 일을 처리한 손문무도 그것이 홍죽을 위해 범한이 벌인 복수인 줄은 전혀 예측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니 홍죽은 범한이 황궁 가장 깊숙이 심어 놓은 첩자인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흔히 있는 연락책 같은 걸 만드는 모험은 하지 않았다. 한데 이런 이유로 홍죽에게 어떤 정보가 있어도 이것이 황궁 밖까지 전달되기가 매우 어려웠다.
물론, 황궁 안의 일반적인 정보는 모두 의 귀빈 및 몇몇 사이가 좋은 큰 태감들이 알려주고 있어 범한은 눈과 귀가 막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도 홍죽이 모험을 감행해가며 범한에게 소식을 전해준 건, 그만큼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는 거였다. 더욱이 새해가 오기 전에 입궁했을 때 본 홍죽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것 때문에라도 범한은 쪽지 내용이 조금은 궁금했다.
쪽지를 읽어 내려가던 범한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너무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앉기까지 했다.
쪽지를 읽기 시작할 때 범한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홍죽이 너무 큰 위험을 감수했다는 생각 정도만 했다. 한데 끝까지 읽고, 또 홍죽이 하려던 말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알아차리고 나서는 너무 놀라 다시는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쪽지에 쓰여 있는 내용은 간단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인물은 별칭으로 언급되어 있었다. 하지만 애당초 홍죽과 함께 말을 맞춰둔 은어들로 쓰여 있어 범한은 그 뜻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등장한 내용은 태자가 잠자리를 가질 때의 이상한 습관이었다. 태자가 항상 궁녀와 시첩(侍妾: 귀인의 시중을 드는 첩)의 옷을 들어 올려 그녀들의 얼굴을 가려놓고 하반신만 드러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내용은 떨리는 필체로 쓰여 있었다. 이는 분명 홍죽이 내용을 쓸 때 겁에 질려 있었다는 의미였다.
두 번째 단락에는 범한이 경도로 떠나 있던 1년 동안 태자가 몸이 점점 좋아졌고, 성병도 거의 치료가 다 된 것 같다는 내용이 있었다. 다만 침소에서 방사를 할 때의 습관은 여전했는데, 술에 너무 많이 취해 잠자리를 갖다가 막바지 고조에 달했을 때 고모라는 두 글자를 몇 차례 내뱉었다고 했다.
‘고모라고?’
‘고모라니!’
이 두 단락의 내용만 놓고 보면, 범한이 알 수 있는 정보는 황태자가 장 공주의 아름다운 용모와 완벽한 몸매에 환상을 품고 있다는 거였다. 살짝 변태 같기는 해도 전생에 무수히 많은 불건전한 글들을 섭렵한 받은 범한에게는 정말 별거 아닌 일이었다.
그러므로 의자에 누워 있던 범한을 벌떡 일어나게 만든 놀라운 내용은 세 번째 단락에 있던 딱 한 구절 때문이었다.
마지막 단락에는 요 몇 달 동안 황태자가 동궁의 궁녀와 시첩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정신 상태도 좋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아주 간략한 내용이다. 심지어는 일반인이 봤을 때 마지막 구절은 아무 의미가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너무나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쪽지에 상세하게 적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홍죽이 언급한 이가 누구인지, 그가 본 게 무엇인지, 또는 무엇을 들었기에 감히 쪽지에 쓸 수 없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고모라고?’
범한이 서재 안을 빠른 걸음으로 몇 차례 뱅글뱅글 돌았다. 그의 입술은 살짝 말라 있었다. 드디어 의자 앞에 선 범한은 종잇조각을 비벼서 가루로 만들었다. 그는 매우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더러운 새끼! 자기가 사조협려의 양과인 줄 아는가 보군!”
범한은 머리가 멍했다. 그저 멍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전생의 김용 선생, 알렉상드르 뒤마 선생에게 배웠듯이,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두 곳이 바로 황궁과 사창가다. 전생의 역사를 통해 범한은 당나라 때 남녀 간에 그런 일이 많았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한데 황궁에서 그런 일들이 정말로 있었다는 걸 알고 나니, 경국 최대 기생집 사장도 너무 놀라 입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탁자로 다가가 차가운 차부터 쭉 들이켜고 너무 황당해서 놀란 마음부터 진정시켰다. 겨우겨우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범한은 홍죽이 무엇 때문에, 그리고 누구 때문에 두려워하는지 알게 되었다.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을 알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입막음을 위해 덜컥 살해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범한은 황태자가 최근 들어 왜 이렇게 차분해졌으며, 그 정도로 계획이 다 서 있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장 공주에게 2 황자를 버리고 도로 자신을 지지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만약 장 공주가 태자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거라면?’
갑자기 그 점을 생각해 낸 범한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자기 뺨을 톡톡 두드렸다.
‘이렇게 큰일을 가지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설마 2 황자를 대신 걱정해주고 있는 거야? 나는 이 정보를 가지고 제일 큰 이득을 이끌어 내야 해!’
하지만 결국 그때 광신궁에서 보았던 광경이 생각나 범한은 저도 모르게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범한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왜냐하면 첫째, 매우 기묘하게도 장 공주 대신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경국 제일 미녀가, 그것도 아직 시든 기미조차 없는 절세가인이 어떻게 자신의 몸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인지!
세상에 장 공주마마가 수많은 미남을 첩으로 두고 있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범한의 무의식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고 있었다.
범한의 기분이 찜찜했던 두 번째 이유는 어찌 되었든 장 공주는 자신의 장모님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태자 저 더러운 놈이 장모님과 밀통하고 있는 거라면······.
‘대체 오주에 계신 장인어른은 어찌 되는 거지? 그리고 나는 젠장, 뭐가 되냐는 거냐고!’
책상 앞에 서 있던 범한은 주먹에 살며시 힘이 들어갔다. 마음속에서는 이유 없는 분노가 들끓었다. 이는 분명 크게 떠들어댈 만한 일이었고, 태자를 무너뜨릴 수 있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좀처럼 기쁘지 않았다. 자신이 태자보다 너무나도 큰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거 같아서였다.
아울러 범한은 홍죽의 담력에 화가 났다. 그때 장화 아래에 밟고 있던 종잇조각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작은 내관들이 봤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 이 일이 새어나간다면, 범한으로서는 홍죽을 지키기 힘들었다.
범한은 책상 옆에서 한동안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가 황당한 실패감과 분노에서 빠져나와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 경천동지할 소식을 제대로 이용하겠노라 결심했다.
다만······.
홍죽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면, 황궁 내부에서 손을 써도 이것이 지닌 영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이건 감찰원 8처를 통해 저잣거리에 소문을 낼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장 공주와 태자가 관계를 맺었다고?’
범한은 황제 폐하의 진노를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황태후마마는 너무 부끄러운 소문이니 성을 내실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감찰원을 조사하는 방식으로 이 소문을 흘려 황제 폐하 또는 황태후마마께서 황궁 내 추문을 직접 발견하시도록 해야 했다.
이에 범한은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는 동시에 경도를 떠나기 전에 서둘러 홍죽과 함께 계획 이행에 관한 세부 사항을 정하기로 결심했다.
한데 계획이니 음모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자, 기습 공격과 잔재주에 능한 범한도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이에 범한은 자기에게 가장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부터 떠올렸다. 바로 흰 옷을 하늘하늘 휘날리는 공자였다. 범한은 곧장 서재에서 나가 후원을 지나 마차에 올랐다. 이에 뒤에서, 그러니까 앞채 쪽에서 황궁에서 명이 도착했다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도 그는 전혀 듣지 못했다.
* * *
마차가 감찰원의 거무스름한 건물에 도착하자 범한은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그의 가죽 장화는 천하대도 양쪽으로 쌓인 남은 눈을 밟으며 ‘뽀드득’ 소리를 냈다.
범한이 감찰원 안으로 들어가자 마주치는 관원마다 놀라 예를 차리고 인사를 올리며 그에게 길을 터주었다. 제사 대인이 음침한 얼굴로 바삐 걸어가고 있자 범한과 마주친 관원들은 ‘경도에 있는 어느 거물이 또 재수 없는 일을 당하게 되었나 보군.’이라고 생각했다.
밀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전혀 예외랄 것도 없이 창가의 검은 가림막 옆에 놓인 책상 뒤쪽에 있는 새하얀 옷을 입은 젊은 관원이 눈에 들어왔다. 감찰원을 통틀어 관복 입는 걸 싫어하고 또 관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자격을 갖춘 이는 현 감찰원 4처 수뇌이자, 감찰원의 전권 대리인인 언빙운, 즉 작은 언 공자밖에 없었다.
범한이 연의를 벗어 의자에 던져 놓고는 밀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창을 가리고 있는 검은 가림막을 향해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가가 그것부터 아래쪽으로 끌어내려 버렸다.
그러자 바깥에 있는 햇살과 남아 있는 눈에 반사된 빛이 음침한 방안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방안을 환히 밝혔다.
“진 원장 대인처럼 굴지 좀 마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자신을 어둠 속에 가둬두지 말라고요.”
언빙운이 손을 아래로 내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검은색의 천 가림막은 여러 해 동안 밀실 창에 달려 있던 것으로 감찰원에서는 가장 독특한 풍경으로 자리 잡은 터였다. 그러니 누가 감히 쉬이 건들 수 있으랴. 제사 대인 정도나 되니 진 원장 대인의 뜻을 마음에 새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범한이 언빙운의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진평평은 요즘 감찰원을 거의 관리하지 않고 있었고, 범한도 게으름을 피우며 모든 걸 언빙운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이에 여러 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언빙운의 모습에 범한은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범한이 창가로 걸어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저 멀리 보이는 황성(皇城)을 바라보았다.
“원장 대인이 검은 천으로 창을 가린 건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러셨던 걸까요?”
언빙운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황궁을 바라보고 있던 범한은 문득 감찰원으로 언빙운을 찾아온 자신의 결정을 살짝 후회했다. 그 일은 황실의 존엄과 경국의 장래와 연관 되어 있었다. 한데 작은 언 공자는 줄곧 조정의 이익을 가장 상위에 두고 있는 사람 아니던가.
범한이 고개를 돌려 언빙운을 잠시 바라보고는 위험을 무릅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언빙운에게 자신의 결정을 말해주려던 생각을 접었다. 왜냐하면, 첫째로는 홍죽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로는 작은 언 공자의 냉랭한 외모 아래에 숨겨진 경국 조정을 향한 충성심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이번 위험은 함부로 무릅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