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1화 장화 아래에
범한은 귀찮아서 작은 내관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홍죽의 얼굴만 뚫어져라 노려보며 비웃어 주었다.
“세인이 나를 작은 범 대인이라 부르는 이유는 내 아버님께서 범 상서라 그러신 거다. 한데 한낱 노비 주제에 어느 댁 자제처럼 작은 홍 태감이라니? 홍 태감이 아는 날에는 너의 껍데기를 잘게 저며 버릴 거다!”
홍죽은 겁에 질렸지만 그래도 한껏 흉악한 표정을 내지으며 입도 뻥끗하지 않고 범한을 노려보았다.
“직접 네 따귀를 때리거라.”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홍죽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쇤네는 동궁 사람입니다. 작은 범 대인은 조정 신하이시고요. 그러니 황궁 일은 상관하실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범한은 싸늘하게 홍죽을 바라보기만 했다.
범한의 압박하는 눈빛에 홍죽이 자신의 따귀를 가볍게 한 대 쳤다.
홍죽이 자기 뺨을 때리자 범한 뒤에 숨어 있던 대 태감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그리고 저녁에 황궁 안에 제대로 소문을 내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편 홍죽 뒤에 있던 작은 내관들은 너무 놀라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황궁 내 작은 홍 공공의 지위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범 대인의 말 한마디에 작은 홍 태감이 자기 따귀를 때릴 수밖에 없다는 건 그들로서는 생전 처음 안 사실이었다.
이제 보니······ 작은 홍 태감은 작은 범 대인보다 덜 대단한 사람이었던 거다.
범한이 옆으로 몸을 돌려, 대 태감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작은 내관들이 바닥에 냉큼 무릎을 꿇는 때를 틈타 홍죽에게 얼른 눈짓을 보냈다.
홍죽은 범한의 뜻을 알아챘다. 이에 눈빛으로 앓는 소리를 하며 지금은 함께 말을 나눌 곳을 찾기 힘들다는 뜻을 전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싸늘하게 말했다.
“꺼져라!”
그러자 홍죽이 소매를 털고는 화나고 부끄러운 표정으로 작은 내관들을 데리고 긴 복도 끝으로 갔다.
이 광경을 본 대 태감이 범한을 향해 아첨하는 웃음을 지었다.
“저 개 같은 노비 놈이 다시 날뛰게 두신다면,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의 총애를 등에 업고 황궁에서 제멋대로 굴 것입니다.”
그러자 범한이 웃었다.
“황궁에서는 제멋대로 굴기 힘들 거네. 그래도 잠시 후 수방궁에 갈 터이니, 나도 행동을 조심할 필요는 있겠군.”
범한은 대 태감이 의로운 척 뭐라 대꾸할 때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쭈그리고 앉아 꺾어 신고 있던 장화 발목 부분을 위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동시에 장화 아래에 밟고 있던 종이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 * *
수방궁 안.
의 귀빈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범한은 책을 베껴 쓰고 있는 이승평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데 지금 황자가 책의 어떤 내용을 베껴 쓰고 있는지는 황궁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범한이 3 황자를 ‘주시’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즉, 범한이 이승평과 사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의 귀빈은 그리 계산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 음험하고 계략이 난무하는 황궁에서 소싯적의 명랑함과 또랑또랑함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으로, 순수하고 진실했기에 황제 폐하로부터 총애를 받아 3 황자도 낳게 된 것이었다.
경국 황제가 남녀 사이의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걸 보면, 황후가 태자를 낳은 후 그는 아이를 더 가질 준비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점만 봐도 의 귀빈은 황제 폐하의 마음에 들 만한 심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었다.
황궁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유(柳)씨 가문의 귀빈은 종일 활력이 넘치고 사랑스럽고 활발해 함께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렇기에 영(寧) 재인처럼 그녀는 황궁 안에서는 아예 다른 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색적인 면 덕분에 그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황태후는 유씨 가문이라는 외척 세력을 경계하느라 3 황자를 그다지 가까이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의 귀빈에게는 악의적인 말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는 모두 알다시피, 의 귀빈이 타인을 해코지하려는 마음도 없고, 매사에 관용적이며, 후덕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그녀가 황궁에서 지내는 10년 동안 조용히 자연스레 도출된 결론이었다.
한데 계산적이지 않고, 타인을 해코지하려는 마음이 없다고 해서 의 귀빈이 정말로 아무 계산도 않는 사람인 건 아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현공 사당에서 3 황자를 구해준 걸 핑계로 범한을 아들의 스승으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며, 범한에게 수방궁의 모든 자원을 활짝 열어둘 리도 없었다.
의 귀빈은 범한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열심히 범한을 구슬렸다. 황가에서는 외척을 엄히 관리했다. 하지만 범한은 외척이자 조정 대신, 그리고 황족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모두 지니고 있어 수방궁과 범한 간의 왕래를 두고 황궁에서는 크게 이런저런 말이 떠돌지는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 범한의 지위가 안정적일수록 황제 마음속에서 수방궁의 지위도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의 귀빈도 가끔은 범한의 권세와 그가 황제 폐하께 받는 총애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놀라곤 했다. 황제 폐하께서 이 사생아를 너무 총애하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범한이 대단히 총애를 받자 의 귀빈도 어떤 위험 같은 걸 생각하며 경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이 품고 있는 경계심을 절대 입 밖으로 발설하지는 않았다. 이에 그녀는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문 채 명랑하고 교태를 잘 부리는 귀빈으로 행동했다. 그러다 범한이 돌아오고,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난 후부터는 범한에게 무한히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의 귀빈은 범한과 자기 아들이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무한한 행복과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 * *
“듣자하니, 대전 뒤 복도에서 누군가를 만났더구나.”
의 귀빈의 측근 궁녀인 성아가 황궁 내 소문을 듣는 즉시 자기 주인에게 알렸고, 의 귀빈은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범한을 옆방으로 살며시 불러낸 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위와 같이 진지하게 물었다.
범한이 시큰한 손가락을 주무르며 웃었다.
“홍죽이란 놈이 어째 갈수록 방자해지더라고요. 저를 보고도 인사도 하지 않고 콧구멍으로 앞을 보며 걸어가기에, 제가 황제 폐하를 대신 해 훈육을 좀 해주었습니다.”
콧구멍으로 앞을 보며 걸어간다는 말이 재밌었는지 의 귀빈이 웃음이 터져버려 하하하, 하고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지만 이내 웃음을 거둬들이고 자그마하게 말했다.
“작은 홍 태감은 지금 황궁 내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인물이란다. 동궁의 수령 태감인데, 황제 폐하께서도 아끼시는지 다시 어서방으로 불러들일 준비를 하시는 것 같구나.”
의 귀빈이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황궁 내 모든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홍죽의 승진 이력에 대해 명확히 꿰뚫고 있었다. 이에 홍죽이 어서방에서 일하며 승진을 바라보고 있는 시점에 범한이 황제 폐하께 몰래 간언한 것 때문에 그가 동궁으로 쫓겨 가게 되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의 귀빈도 범한과 홍죽이 서로 싫어하는 사이로 알고 있었다. 홍죽은 요즘 동궁에서 다시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황제 폐하께서도 과거 내린 결정에 후회를 조금 하고 계신 듯 해 의 귀빈은 범한에게 이 사실을 일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홍죽이 큰 태감이기는 했지만 범한은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외부 부임지에 가 있는 신하인 범한 입장에서는 황궁 내 큰 태감들이 암암리에 꾸며내는 소문을 방비할 필요는 있었다.
범한이 고개를 흔들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자는 자기 형에게 백성의 땅을 강제로 취하도록 종용한 놈입니다. 그러니 어서방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들 그게 쉽게 되겠습니까?”
그러자 의 귀빈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긋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고작 노비와 힘겨루기를 하는 거니? 혹시라도 그가 정말로 어서방에 돌아가기라도 한다면, 양쪽에게 깊은 원한을 사는 거란다. 그러면 쉽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작은 홍 태감이 늙은 홍 태감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건 황궁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는 얘기란다. 그리고 네 신분은 어찌 되었든 조정 신하잖니.”
경국의 내관에게는 지위란 게 없었다. 개국 이래로 내관의 국정 간섭을 엄히 금해서였다. 만약 그걸 어기면 가볍게는 출궁에서부터 무겁게는 매질을 당해 죽게 되어 있었다. 한데 경국은 개국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한두 명에게만 예외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함광전 밖에서 수련하고 있는 늙은 홍 태감이 바로 그러한 특수한 경우였다.
이 나이 많은 태감은 자신이 황궁에서 몇 년을 보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황태후마마와 황제 폐하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신비한 강자였다. 만약 홍죽이 정말로 그런 홍 태감과 어떤 관계가 있다면, 범한도 어느 정도는 경계를 해야만 했다.
한데 범한은 긴 복도에서 그런 일이 터진 이유를 모두 알고 있던 터라 참다못해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유를 의 귀빈에게 설명해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에 범한은 웃는 얼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모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게도 다 생각이 있거든요.”
범한이 신경을 쓰지 않자 의 귀빈은 두어 번 더 설득을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걸 알고는 성을 내며 뒤쪽에 있는 침소로 들어가 버렸다. 저 고집불통인 녀석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고 없어서였다.
범한은 다시 3 황자가 있는 책상으로 다가와 그와 잠시 말을 나눈 후, 3 황자의 아쉬워하는 눈길을 뒤로 하고 수방궁을 떠났다.
* * *
오늘 임완아는 황태후와 함광전에서 자기로 했다. 오늘 하룻밤만 잔다는 게 며칠이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부부가 함께 입궁을 해 놓고도 범한은 홀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에 동굴처럼 생긴 길고 음침한 황궁의 신무문 안을 범한은 홀아비처럼 홀로 걸었다. 그러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뒤에 있는 모호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완아가 황실에서 지극히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속으로 욕을 날려주었다. 그 할머니는 손녀 사랑만 알 뿐, 오랜만에 만난 부부의 마음은 전혀 헤아려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범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황궁을 나섰다. 그러다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1 황자마마를 쳐다보며 저도 모르게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개국 이래로 금군 대통령 겸 시위 대신인 이가 매일 황궁 문 앞을 지킨 예는 없었는데······. 전투를 위한 행군도 아니고, 그저 태평성세에 황궁 문을 지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조롱거리라도 되시려고 이러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1 황자가 웃음을 거두고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조롱할 거리라도 있는 것인가? 신아가 함께 돌아가지 않아 체면이라도 상했다고 여기는 거야? 우리 누이는 어려서부터 황궁 안에서 자란 몸이란 걸 잊지 말게나. 아무래도 자네는 일찌감치 그 사실을 잊은 것 같으이.”
범한은 경도로 돌아온 후 1 황자와 두세 차례 만났다. 한데 그때마다 옆에 외부인이 있어 사적인 말을 나눌 수는 없었다. 진평평과 영 재인이 사이가 좋아 두 형제는 이미 묵언의 결맹을 맺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1 황자가 처한 위치는 달랐다. 그는 황자들 가운데서도 첫째였고, 이에 태자 전하와 둘째가 범한에게 조금씩 놀아나며 기가 죽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얇은 막 같은 게 존재했다.
“오늘은 마마와 긴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급히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범한이 1 황자의 표정을 바라보니, 군 내 맹장이자 정치판의 초보는 자신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계속해서 손을 흔드는 중이었다.
1 황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오늘 신아 일로 자네에게 훈계할 생각은 없었네. 한데 자네의 그 북쪽 여인은 어찌 처리할 생각인가?”
범한은 어리둥절했지만 그제야 또 집안일을 가지고 한 말씀 하시려 한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저도 모르게 씁쓸하게 웃기 시작했다.
“1황자마마, 그건 소신의 집안일이옵니다. 완아가 제게 시집을 왔다고 해서 대신 마음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1 황자와 임완아가 서로 친밀해 살짝 질투하던 차였는데, 범한은 이번 기회에 싸늘하게 대갚음해 주었다.
이에 1 황자는 화가 많이 났지만 강하게 노기를 억눌렀다.
“누가 자네에게 참견하고 싶어 이러는 줄 아는가? 단지 왕비 말로는 설이 지난 후 자네가 왕부로 찾아오지 않아 자네에게 방문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기에 그 말을 하려던 거네.”
왕비는 바로 범한이 직접 남쪽까지 호위해 데려온 북제 공주를 이르는 말이었다. 범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1황자마마 댁에는 당연히 찾아뵐 것입니다. 대략 이틀 정도 후로 잡고 있습니다.”
범한이 답변을 주자 1 황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범한에게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다.
“홍성 세자도 데려가겠습니다.”
1 황자는 살짝 의외여서 범한을 두어 번 쳐다보며 생각했다.
‘홍성이 고 녀석은 너 때문에 외출 금지 상태 아니던가?’
범한은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고 일단 이맛살을 찌푸렸다.
“양총 골목에 있는 저택은 필요하시긴 한 겁니까? 어엿한 서호의 공주인데, 그 집에 두고 썩혀 두실 건가요?”
1 황자는 숨이 턱 막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1 황자의 태도에 범한은 확신이 섰다. 서역 정벌군이 경도로 돌아오는 동안 1 황자마마는 서호 공주 마색색과 분명 수많은 밤을 함께 보내며 밤이슬을 밟는 이야기를 써나갔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상대방을 다시 자극하기가 뭐해 범한은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고는 자신의 시커먼 마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