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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90화 (590/1,108)

590화 나는 죽었구나!

방금 전 범한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사촌지간인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경국 법률에 따르면, 범한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와는 상관없이,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에는 안 되는 거였다.

유가 군주는 열두 살에 처음 범한을 본 후 온통 범한 생각뿐이었다. 왕부에서든, 포도 넝쿨 아래서든, 범씨 가문 저택에서의 가을 정원에서든, 창산의 별장에서든, 그녀는 범한만 바라봤다.

그리고 범한이 혼인을 한 이후에도 어린 소녀의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감히 부왕께 요청하지는 못했지만, 훗날 범한에게는 본처 둘을 둘 수 있는 특례가 생길 거란 생각을 그녀는 늘 품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생각지도 못했던 어마어마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바로 한 오라버니가 자신의 사촌 오라버니였단 사실이었다.

그날 유가 군주는 자신의 바람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2년 동안 품었던 마음을 하룻밤 사이에 없앨 수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한 오라버니를 오늘 다시 만나게 되자 그녀는 순간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방금 전 범한의 말이 자신에게 정신 차리라고 해준 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가 군주는 고작 14살의 어린 낭자였다. 그래서 범한이 완곡하면서도 엄준하게 일깨워줬는데도 경도의 평범한 귀족 여인들처럼 고개를 홱 돌려 원망하는 눈빛을 날린다거나 싸늘하게 ‘흥!’, 하며 콧방귀를 뀌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더 깊이 숙이고는 아까보다 훨씬 더 조용히 있기만 했다.

구슬처럼 영롱한 눈물방울이 그녀의 긴 아래 속눈썹을 타고 내려와 그녀 발 옆 바닥에 떨어졌다.

소녀가 느닷없이 울기 시작하자 당황한 범한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결국 입을 벌린 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유가 군주가 눈물을 흘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에 범한은 그녀의 뒤를 바짝 뒤쫓았다.

유가 군주는 고개를 숙인 채 울기만 했다.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안쓰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범한이 현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유가 군주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범한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범한은 잠시 웃어주고는 손을 뻗어 어린 아가씨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방울을 닦아 주었다.

유가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유순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가 범한을 똑바로 바라본 채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한 오라버니, 부탁 좀 드릴게요.”

“무슨 일이니?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들어주마.”

범한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도 다 알아요······ 한 오라버니께서 약약 언니의 혼사를 깨고 싶어 하셨다는 걸요.”

유가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치맛자락을 비틀며 말했다. 그녀의 분홍색 치마 한쪽 자락에 무수히 많은 번뇌의 주름이 생겨났다.

한편 범한은 이 꼬마 아가씨가 그 일을 알고 있어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말이니?”

유가가 살짝 절을 하고는 숨을 가느다랗게 쉬며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훗날 황궁에서 이 유가의 혼처를 정해주실 텐데······ 제가 싫어한다면, 부디 한 오라버니께서는 그때도 신경을 많이 써주셨으면 합니다.”

경도 권문세족과 귀족 간의 혼인에는 상당 부분 정치적인 거래가 담겨 있었다. 범한의 혼사, 이루어지지 않은 범약약의 혼사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리고 유가 군주의 신분 정도면 당연히 황궁 내 높은 분들, 심지어는 황태후마마가 직접 나서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범한은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 후 그가 잔뜩 낙담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번에도 강요에 못 이겨 엄청나게 무서운 짐을 지게 되어서였다. 그에게는 세상살이가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주변인들은 중매자가 노릇을 할 때 자신은 파혼이나 시키는 사람이 되어 있던 것이었다.

말을 마친 유가가 범한을 다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부풀어 올랐던 용기를 다 써버린 탓인지 그녀는 다시 난감해하기 시작했다. 범한을 그윽하게 바라본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치맛자락을 들고 빠르게 앞채로 걸어가며 다시는 범한을 쳐다보지 않았다.

범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멀어져가는 유가 군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난처해진 범한은 저 어린 낭자가 정말이지 다른 누구보다 더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 * *

황궁 태극전 뒤쪽에 위치한 긴 복도.

긴 복도는 뒤에 위치한 궁궐 담벼락과 담벼락 아래에 있는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특히 이곳은 내궁과 가까운 곳이라 시끄럽게 떠드는 걸 엄금했고, 그 누구도 이곳에서는 방자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한데 복도를 오가는 궁녀와 내관들은 이 긴 복도에서 허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펴고, 다리를 쭉 펴고 눌러주는 동작을 하는 사람을 보고도 감히 누구 하나 큰 소리로 꾸짖거나, 말리거나, 주의를 주지 못했다.

내궁은 젊은 관원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단 한 사람, 오직 그 사람만이 황궁을 마음껏 거닐 수 있어서였다.

긴 복도에 있던 젊은 관원이 대들보에서 다리를 내리고는 고개를 돌려 잔뜩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웃고 싶어도 감히 웃지 못하고 있는 중년 내관을 꾸짖었다.

“웃기는 뭘 웃는 것인가! 넓디넓은 황궁을 걷다 보면 다리가 시큰거려 그러네. 자네들은 어찌 그리 다리가 튼튼한 것인가!”

젊은 관원은 당연히 범한이었다. 그가 황제의 사생아란 건 천하에 알려져 있었고, 최근 몇 년 동안은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황궁 내 각 귀인들, 태감들과도 관계가 꽤나 좋은 편이었다. 예전에 황궁에서 한 달 동안 상처 치료를 받기도 해 황궁 내 궁녀와 내관들은 모두 황궁에서 마주치는 그의 존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황궁 안에서 자신이 몸을 풀기 위해서 준비 운동을 했다고 떠벌릴만한 담력이 있는 건 범한뿐이었다.

오늘 범한은 아내 완아의 친정 나들이에 함께 온 것이었다. 이에 황태후는 임완아가 황궁에 들어오자 곁에 붙잡아 두고 보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유인즉슨 가장 사랑하는 외손녀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이에 범한은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선물을 잔뜩 가지고 이 궁 저 궁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범한은 경도로 돌아온 후 황궁 내 귀인분들을 찾아뵈러 한 차례 돈 적 있었다. 그러니 이번은 두 번째였다. 그래서 너무나도 지루하고 따분해 틈을 봐서 태극전 뒤에 위치한 긴 복도에서 잠시 발을 쉬어주었다.

선물 상자를 가득 들고 범한을 쫓아오고 있는 이는 대 태감이었다. 그는 범한의 꾸짖는 소리에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워하며 웃었다.

“작은 범 대인께서는 9등급 고수이신데, 저희 같은 아랫것들이 어찌 비교가 되겠나이까?”

대 태감은 과거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던 내관이었다. 한때 숙 귀비 궁에 속해 있으면서 각 부로 성지를 전달하는 일을 맡았었지만, 나중에 조카 문제 때문에, 그리고 범한과 2 황자 사이의 싸움에 연루되어 한직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러다 나중에 또 현공 사당의 자객 사건 때문에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만약 그 상태로 2년이 더 지났다면 아마 그는 죽더라도 멍석조차 덮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범한은 그를 대신해서 계속 힘을 써주었다. 황제 폐하께 대 태감이 과거에는 좋은 시종이었다는 걸 계속 말해드리고 기억해내시도록 함으로써 그의 목숨을 살렸고, 이에 그는 내궁으로 돌아와 한직에라도 있게 되었다.

그러니 대 태감에게 범한은 생명의 은인이었고 심지어는 반은 주인이었으며, 숙 귀비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는 범한의 시중을 감히 허투루 들 수 없었다.

범한은 장화 밑창 쪽에서 열이 나는 기분이었다. 이에 장화를 거의 벗다시피 하여 꺾어 신고 질질 끌면서 복도를 걸었다.

이에 대 태감이 범한의 발을 잠깐 바라보고는 난처해하며 말했다.

“대인, 황궁 안에서는 그래도 신발을 제대로 신으시지요.”

범한이 대 태감을 쓱 보고는 잠시 놀려주려던 찰나였다. 복도 끝에서 내관 몇몇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중 한 젊은이는 낯이 좀 익은 것 같은데, 그는 얼굴을 위로 바짝 치켜들고 온몸에서 오만함을 풍기고 있었다. 뒤에서는 몇몇 작은 내관이 허리를 굽힌 채 아랫것의 아랫것이 되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저자는 작은 홍 태감입니다.”

대 태감이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고는 뒤쪽에서 범한에게 일러주었다.

범한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린 채 아무 말 없이 바로 홍죽을 맞으러 다가갔다.

두 사람은 복도 중간에서 마주쳤다. 범한은 얼굴에 여드름이 군데군데 난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젊은 태감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고 그냥 가만히 서서 상대방을 싸늘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홍죽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먼저 인사해주기만을 범한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현재 자신은 동궁의 수령 태감 아니던가.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가끔씩 황제 폐하께 어서방으로 불려가 일도 돕고 있는 중이었다. 과거 어서방에서 책을 품에 안고 뛰던 시절과 비교하면 훨씬 더 잘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황궁 안에서 누가 감히 그를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궁 출입을 하는 자라면 그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했고, 서무 대학사를 제외하면 그 어떤 대신도 감히 홍죽이 먼저 예를 갖추어 인사해줄 때를 기다릴 수 없었다.

홍죽은 범한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가 일반 대신과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범한이 냉담하면서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붉으락푸르락하면서도 절대 고개를 숙이려 들지 않았다.

양측은 그렇게 긴 복도 중간에서 대치했다.

홍죽을 따라온 서너 명의 작은 내관들은 직급이 낮아 지금껏 범한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저 젊은 관원이 어마어마한 권력을 거머쥔 작은 범 대인인 걸 알 리 없었다. 이에 두 사람의 대치 국면을 보고 있던 작은 내관들이 급한 마음에 작은 홍 공공 대신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지기 시작했다.

“거 대인께서는 어찌하여 황궁 내 금지된 지역을 이리도 함부로 쏘다니시는 겝니까?”

대 태감은 범한 뒤에 숨어 몰래 웃고 있었다. 과거의 지위를 잃은 그는 황궁에서 홍죽 등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와중에 상대 쪽에서 먼저 멍청하게 범한에게 죄를 짓자 속으로는 말도 못 하게 즐거웠다. 이에 대 태감이 나서서 두어마디 해주려는데, 범한이 손을 휘 내저으며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범한은 미소 지은 얼굴로 홍죽 뒤에 있는 태감들을 바라보며 우습다는 듯 말했다.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았구나! 황궁에서 본관을 모르는 자가 많지 않거늘······ 본관도 아무렇게나 쏘다닌 건 아니다. 단지 성지에 따라 수방궁으로 가는 중이었다.”

과연 입궁한지 얼마 안 되는 내관들이었다. 그들은 범한이 한 말의 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대들었다.

“거 참 무례하군요. 수방궁이 어디 있다고 이러십니까? 그리고 어찌하여 이 긴 복도에 와 계신 겁니까? 작은 홍 태감께서 호위병들을 불러다가 여러분을 모조리 쫓아내실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주인을 위해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오히려 화를 자초하고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범한의 얼굴에는 갈수록 더 따스한 웃음을 피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홍죽은 이내 낯빛이 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놀라고 두려운 마음에 고개를 홱 돌려 작은 내관들을 짧게 꾸짖었다. 그런 후 범한을 향해 천천히 예를 올리며 말했다.

“소인이 작은 범 대인을 뵈옵니다.”

‘작은 범 대인’이란 말이 들리는 순간, 작은 내관들은 그제야 ‘나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고는, 서둘러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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