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화 어린 시절의 기억 (2)
범한이 먼지가 자욱하게 깔린 의자에 앉아 두꺼운 농예 강습 책을 펼쳐보며 속으로 정왕이 방금 한 말을 떠올렸다. 사실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정왕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설익고 괴로운, 말로 내뱉을 수 없지만 평생을 품어왔던 마음 말이다.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소년의 옆에 온화하고 아름다우면서 포용력 강한 여인이 있다면 당연히 생겨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는 다시 태어났기에 영혼은 성숙해 있었지만, 이전 세계에서도 그런 경험은 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런 경험을 모든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은 성장한 뒤에 달콤한 과실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채워가니 말이다.
하지만 정왕은 그런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겪지 못했다. 그의 성정과정은 경국의 큰 역사적 흐름 앞에서 끊어져 버렸다. 그는 섭가가 갑자기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분노하거나 화풀이할 수 없었다. 이에 나이에 맞지 않게 머리가 하얗게 세고 등이 굽은 그는 황궁이 아닌 밭에 마음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살짝 누렇게 변한 종이를 넘기던 범한의 손가락이 갑자기 멈췄다.
얇은 종이가 두꺼운 책 사이에 끼어 있는 걸 발견한 그가 재빨리 종이를 넘겨 얇은 종이를 찾아냈다.
종이 위에는 낯설지만 아주 익숙한 글씨가 보였다. 어설프게 쓴 글씨는 필획이 둔탁한 것이 꼭 장작더미를 쌓아둔 모습 같았다.
종이 위에 적힌 내용도 범한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종이에는 감찰원이나 장사 일에 대한 누군가의 의견이 적혀 있었고, 또 오늘 뭘 먹고 싶다거나 내일 모두 함께 어디로 놀러 가자는 등의 내용도 적혀 있었다······.
범한이 웃으면서 종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당신의 글을 모두 불태워 버렸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당시 소년이 몇 장을 숨겨 뒀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네요.”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글씨는 저보다 좋을 게 하나도 없네요. 붓을 사용하는 게 어색하면 거위 깃털 붓을 사용하는 게 좋은데. 참! 제가 황실 금고에서 작은 작업실을 만들어 연필을 전문적으로 제작하고 있어요. 이 일에서만큼은 제가 당신보다 나은 모양입니다······.”
말을 마친 범한이 잠시 아무 말 없이 고민하다가 종이를 품속에 넣고는 정왕도 이렇게 벗어나는 게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일어난 그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서재를 나왔다.
* * *
정왕은 서재 밖에 있지 않았다. 범한은 정왕가를 이미 여러 번 와서 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여종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그가 양손을 뒷짐 지고 큰 건물을 지나 독립된 작은 건물로 걸어갔다. 입구에는 동으로 만든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자물쇠를 본 범한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문을 있는 힘껏 두드리며 소리쳤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나는 가봐야겠네.”
“가지 말게! 가지 마!”
안에서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급히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큰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안에 있는 사람이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큰 문 틈새로 범한이 안을 들여다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안에서 누군가가 눈을 부릅뜨고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눈곱이 끼고 머리가 산발인 게 무척 초췌한 모습이었다.
“괴물이 따로 없군!”
범한이 놀라 소리쳤다.
“괴물은 자네가 괴물이지!”
방 안에 갇혀 있는 정왕 세자 이홍성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나를 좀 빨리 꺼내주게!”
처량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가두신 걸 내가 어찌 꺼내줄 수 있겠는가?”
“자네가 아버지에게 부탁해보게!”
그동안 갇혀 있으면서 미칠 지경이었던 이홍성은 마침내 부왕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자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자네는 양심도 없는 것인가? 자네가 나를 음해하고 온갖 상스러운 말로 명성을 더럽히지 않았나. 물론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이렇게 오래 갇혀 있는 내가 가엽지 않은가? 자네는 동정심도 없는 것인가? 자네가 처음 경도에 왔을 때 내가 자네를 잘 대해 주지 않았는가? 기생집에도 데려가 주고······.”
이홍성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고 있던 범한은 그의 처참한 생활을 살펴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왕야께서 자네를 가둔 건 모두 자네를 위해서이네. 만약 자네가 계속 그들 싸움에 끼어들었다면 더 나쁜 꼴을 당할 수도 있었어.”
“죽어야 한다면 죽지!”
이홍성이 냉소를 지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갇혀 사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나아.”
범한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건물의 규격을 살펴보다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세상에······ 이게 가능한 건가? 자네 이곳에서······ 1년 동안 갇혀 있었던 건가?”
이홍성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투덜댔다.
“그랬으면 이미 미쳐버렸을 거네. 평소에는 왕부 밖으로 나가는 것만 허락되지 않았네. 비록 갇혀 있는 거긴 하지만 왕부면 감옥이라도 크다고 할 수 있지.”
범한이 코를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부를 감옥으로 삼으면 마음만 자유롭지 못한 셈이군. 자네 말이 일리가 있네.”
이홍성이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자극하지 말게나······. 나도 왕부에 갇혀 있으면서도 들을 건 모두 들었네. 경도로 돌아오는 길에 자객을 만난 자네가 이후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버지께서 나를 이곳에 가둬 버리시더군. 도대체 누굴 건든 건가?”
범한이 문틈으로 이홍성의 가여운 몰골을 바라보자 동정심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도 당연히 정왕이 그를 가둔 이유가 뭔지 알고 있었다. 사실 정왕은 자신의 아들이 그 일에 끼어드는 게 싫어서 그를 가둔 게 아니었다. 경도로 돌아온 범한이 2 황자 쪽을 공격할 때 이홍성이 2 황자의 옆에 있다가 화를 당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알겠네.”
범한이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자네를 데리고 나가서 바람을 쐴 수 있게 해주겠네. 하지만 자네도 다른 곳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어야 하네.”
이홍성이 기뻐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자네 자물쇠를 부숴서는 안 되네.”
범한이 허리띠에서 열쇠를 꺼내며 말했다.
“내가 감찰원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게나.”
큰 자물쇠가 ‘덜컥’ 소리를 내며 열리자 작은 건물에 갇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던 정왕 세자 이홍성에 밖으로 나왔다. 그가 탁 트인 주변 환경을 바라보며 공기를 깊이 들이켜고는 범한이 어깨를 치며 말했다.
“우리의 오랜 정을 잊지 않고 있었군.”
작은 범 대인이 정왕 세자를 구하는데 감히 누가 저지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어떻게 나온 거예요?”
돌계단 왼쪽 아래에서 살구색 솜저고리를 입은 귀족 소녀가 발그레해진 작은 볼을 움직이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오라버니를 때려죽일 거예요.”
당황한 범한이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의 얼굴은 예전과 다름없이 유약하고 온순해 보였지만 눈은 지난날보다 더 청순하고 아름다워져 있었다. 그 모습에 놀란 범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1년 만에 애기 같던 여자애가 청순가련한 소녀로 변할 수가 있지?’
그때 범한을 알아본 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놀라 동그랗게 뜬 눈에 기쁨과 놀라운 기색이 보이더니 이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순간 범한은 두려워졌다. 사실 그가 경도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황궁에 있는 황제를 제외하고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자신을 흠모하고 있는 저 어린 소녀였다. 항상 어린 소녀가 자신의 옆을 맴도는 걸 부담스러워했던 그는 자신이 그녀의······ 사촌 오라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어느 정도는 편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오늘 소녀의 상심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간은 편치 않았다.
마음을 애써 가라앉힌 그녀가 범한 앞으로 걸어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범 오라버니를 뵙습니다.”
범 오라버니라는 단어에 놀란 범한이 숨을 한번 깊이 들이쉬고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가 누이, 오랜만입니다.”
범한은 어린 낭자를 보는 순간 당장 내빼고 싶은 마음에 옷소매를 주섬주섬 모아들고는 이홍성과 함께 담벼락을 넘으려 했다. 한데 씁쓸한 얼굴을 한 하인 하나가 어디선가 툭 튀어나와 예를 갖추어 말했다.
“세자 어르신, 저분을 만나 뵈러 나오신 걸 왕야께서 아십니다.”
그자의 말에 세자 이홍성이 차가운 공기를 씁, 하고 깊이 들이마셨다. 고뇌가 극에 달하고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돌아가야 했다. 그는 자리를 뜨기 전 범한의 눈을 두어 번 바라보고 소리 내어 씁쓸하게 웃는 것으로 속에 담아 둔 말 못 할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로써 범한은 자기 때문에 약약이와의 혼사가 깨진 걸 이 세자 어르신이 탓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범한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그는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러자 문밖 돌계단 아래에는 범한과 유가 군주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범한은 더 이상 도망갈 구석이 없음을 알기에 일단 그녀를 향해 따스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이홍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군주의 오라버니는 예전에는 품위 있는 귀공자였는데, 지금은 어쩌다가 저 꼬락서니가 된 건지 원.”
범한이 말을 걸어주자 유가 군주는 자그마한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살짝 더듬으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래······ 갇혀······ 계셨고······ 매일 욕만 하다 보니······ 갈수록 부왕을 닮아가 그런 게지요.”
범한은 순간 얼떨떨했다. 한데 문틈으로 세자를 바라보니, 세자를 깔봐서가 아니라, 그에게서는 권력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관용과 자포자기 같은 게 보였다. 저와 같은 품성은 당연히 정왕에게서 이어 받은 것일 테지. 이른바 투쟁이란 건 승리와 패배를 따지는 법인데 말이다.
범한이 손짓으로 유가 군주에게 앞장을 서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유가 군주가 자신의 풍성한 붉은 저고리를 살며시 들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범한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걷는 동안 점점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는 낭자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고 있는 살쩍 부위에 난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자니 범한은 가슴이 살며시 떨렸다.
“유가 누이,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최근에 새로운 일이 좀 있었니?”
“없습니다, 한 오라버니.”
“유가 누이······.”
“네, 한 오라버니······.”
두 사람은 서로 억지로 대화를 청하려 노력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범한은 갈수록 유가 누이라고 부르는 게 입에 붙었고, 어린 낭자는 말할 때마다 그에게 한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붙였다. 이렇게 두 사람은 느긋하게 앞채 쪽으로 나아갔다. 얼어붙은 정원을 지나, 싸늘한 길을 걸어, 눈이 드문드문 남아 있는 정자를 지나니 가짜 산에서 물이 고여 있는 곳이 나왔다.
유가 군주는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러다 가끔 참다못해 고개를 돌려 범한을 바라보고는 이내 깜짝 놀란 사람처럼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범한은 속으로 탄식하고는 발걸음을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옆으로 다가가 나란히 걸어주었다.
그러자 자기 옆으로 다가온 남자의 존재를 인식한 유가 군주는 깜짝 놀라 몸이 굳어 버렸다. 이에 치맛자락을 잡은 손가락 끝에 살짝 힘이 들어가 걷는 자세가 조금 전보다 뻣뻣해지고 말았다.
이에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세상의 도란 게 참으로 기묘하구나. 그때는 네가 나의 사촌 누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런데 오라버니라고 불러주는 게 이리도 잘 어울리다니 말이다.”
범한의 말에 유가 군주는 당황스럽고 심란했다. 이에 작은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르더니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