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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88화 (588/1,108)

588화 어린 시절의 기억 (1)

호수 맞은편에 있는 정자에는 아직도 눈덩이가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마치 하얀 천 조각들을 정자에 기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경도의 눈은 음력 섣달 스물아홉째 날에 그친 뒤 내리지 않았고, 이에 정왕가 종들은 3일 동안 잔디를 덮은 눈을 깔끔하게 쓸어 치운 상태였다.

추운 날씨라 잔디에는 싱그러운 풀잎은 없었고 죽어 굳은 백초만 있었는데, 정리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범한이 뒤를 따라 정원 깊은 곳으로 걸어가며 힐끔힐끔 약간 굽은 정왕의 등을 바라보았다.

정왕가에 들어간 뒤 범건이 욕을 퍼부으려 하는 정왕을 저지했고, 이로 말미암아 정왕가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유가 군주와 세자 이홍성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상황이 진정된 뒤 정왕이 갑자기 범한과 둘이서만 갈 데가 있다고 말했고, 범한은 아버지의 허락에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라나섰다.

정원 풍경은 이전과 비교하면 아름답지 못했다. 심지어 정왕이 밤낮으로 가꾸던 채소밭도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범한은 아무 말 없이 걸어가는 정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뒤따라갔다.

정왕은 역사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갑갑한 현실을 이기지 못해 방탕하게 살아가는 왕야들과는 달랐다. 정왕은 거리낌 없이 행동하면서도 권력에 대해서는 조금의 욕망도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과거 어떤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인지 나이에 비해 초췌하고 늙어 있었다.

한 노인과 청년이 채소밭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정왕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를 처음 만난 게 이 채소밭에서였지.”

그 말을 듣자 범한은 시모임에서 자신이 만 리 쓸쓸한 가을에는 언제나 나그네가 된다는 구절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던 것과 채소밭을 거닐며 하얀 옷을 입은 여인 그리워하다 농부를 만났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왕야께서는 항상 저를 놀리려 하시는군요.”

“경도 안에서 채소를 키우는 사람이 나만 있는 건 아니네.”

정왕의 말에 범한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 말은 가볍게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경도는 인구가 많고 풍요로운 도시였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대부분 식비를 절약하기 위해 자신의 마당 한 귀퉁이에 채소를 키웠다. 물론 정왕의 말은 일반 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씨 집안 늙은이는 배추와 무만 키우긴 하지만 채소를 키우는 걸 좋아하네.”

정왕이 입꼬리를 올려 비웃으며 계속 말했다.

“군인이라서 그런지 배를 채울 생각만 하지 채소를 키우는 것도 예술이라는 걸 모른다니까.”

놀란 범한은 대답할 말은 찾지 못한 채 정왕의 말을 몇 번이고 되새겨 생각했다.

정왕은 질척질척한 진흙으로 덮여 있는 채소밭 안으로 걸어 들어가 양손을 허리에 꽃은 채 주변의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산골짜기 습격 사건이 누구 짓인지 알아냈느냐?”

범한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시간이 흐른 만큼 범한도 산골짜기 습격 사건이 진 장군이 계획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사실이 경도의 가장 큰 비밀이라 진평평과 자신을 제외하고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였다. 이에 범한은 정왕이 진 장군이 채소 키우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 뒤 산골짜기 습격 사건을 언급한 의도가 무엇일지 고민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정왕은 지금껏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조정 문무백관들과 깊이 왕래를 하지도 않는데?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산골짜기 습격 사건이 진 장군이 한 짓이라고 말하는 거지?’

정왕이 이 점을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은 이상 범한도 함부로 입을 열 수는 없었다. 더구나 솔직하게 말하려면 가장 은밀한 사간(死間)을 언급해야 했기에 그는 진씨 집안의 일을 정왕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대충 둘러댔다.

“조정에서 계속 조사를 하고 있고 감찰원에서도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증인이 죽는 바람에 군대와 관련이 있을 거라 추측하고 있을 뿐 정확한 실마리는 찾지 못했습니다.”

정왕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범한이 담담하게 모르겠다고 말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정왕이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범한을 바라보며 버럭 화를 냈다.

“멍청한 놈!”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 일은 멍청한 척을 해야 하잖아?’

“수성용 쇠뇌는 섭가의 것이야.”

정왕이 범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진씨 집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왕의 말이 너무 직설적이라서 범한도 더는 멍청한 척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자신을 위해 이런 말까지 하는 정왕의 모습이 감동적이고 예상치 못한 정보에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가 진씨 집안에 원한을 산 적이 없지 않습니까?”

정왕이 ‘흥’하고 두 번 콧방귀를 뀌고는 채소밭을 나와 정원 안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정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정왕이 진씨 집안을 범인으로 추측한 것은 과거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야. 다만 진씨 집안이 태평 별궁 살인사건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은······ 아버지도 모르는 비밀이고, 진평평 대인도 그 후 십여 년을 더 조사해서 겨우 알아낸 사실인데.’

정왕은 어떻게 그 비밀을 아는 것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올라 다른 건 고려할 수 없었다. 그가 재빨리 달려가 정왕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정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범한이 그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물었다.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째서 천하에 진씨 집안이 그 일에 참여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겁니까? 도대체 경도 피의 달 사건 때 이 사실을 밝혀내지 못한 이유가 뭡니까?”

“질문이 너무 많구나.”

정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할 일 없이 사는 왕야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황족의 일원이라는 건 잊으면 안 된다······. 네 뒤를 지켜주는 두 늙은이가 모르는 걸 내가 아는 이유도 아주 간단하지. 당시 나는 아직 어려서 항상 어머니 옆을 따라다녔거든.”

정왕이 미간을 두어 번 떨다가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아이는 항상 어디든 숨어 들어가길 좋아하는 법이니까 가끔은 예상치 못한 사실을 듣기도 한단다. 심지어 어떤 내용을 몰래 들었어도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를 수 있지.”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 멈췄다. 그는 정왕이 진씨 집안일을 말해준 것은 자신을 특별히 아끼기 때문이지만, 그 일이 친모인 황태후와 연관되어 있는 이상 그가 자세히 말해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운예는 당시 너무 어렸으니 그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네.”

정왕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뜸 말했다.

“이 점을 자네에게 알려주고 싶었어. 자네는 어려서부터 범건과 감찰원 밑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많은 일이 우습게 변해 버렸지.”

두 사람이 서 있는 황량한 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담벼락이 있었고, 그 뒤로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경도의 스산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정왕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진평평과 자네 아버지는 모두 음모를 꾸미는 데는 고수들이라서 일을 너무 복잡하게 만드는 걸 좋아해.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두 사람을 모두 누구도 믿지 않고, 특히 서로를 가장 못 믿어 한다는 거지.”

정왕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계속 설명했다.

“가장 바보 같은 일이지 않은가. 진평평은 심지어 그 일이 운예와 관련 있을 거라고 의심하기까지 했어. 그때 운예가 몇 살이었는지 아는가?”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가 죽은 뒤로 계속 서로를 의심했던 아버지와 진평평은 그가 경도로 온 뒤로 겨우 서로에 대한 경계를 거둘 수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함구해 온 진씨 집안의 일을 오늘 자네에게 말해주는 것은 복수하라는 뜻이 아니네.”

정왕이 차분히 말했다.

“나는 그저 자네가 이미 군대 쪽에 미움을 충분히 받고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게야. 우리 경국은 원래 군대를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이네. 군대 쪽에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어. 나는 그게 걱정되는 거네.”

죽을까 걱정된다고 말하는 정왕의 목소리는 침울하기만 했다. 그는 누구든 죽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맞잡고 감사 인사를 한 범한이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왕야께서는 왜 저에게 잘 대해 주시는 겁니까?”

이 말을 들은 정왕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는 갈수록 커졌고 날카로워졌으며 심지어는 처량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너무 웃어서 배가 아파진 그가 밭에 쪼그리고 앉아 배를 감쌌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은 마음이 심란해져서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정왕을 바라봤다. 그저 나이와 걸맞지 않게 하얗게 센 정왕의 머리카락이 바람이 하늘하늘 흔들리는 모습과 너무 웃어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바라봤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일어난 정왕이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모르겠네.”

그리고 밭을 걸어 나갔다.

범한도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폐하와 나는 모두 같은 유모 밑에서 자랐네.”

평소의 침착하고 안정적인 모습을 회복한 정왕이 차분히 말을 시작했다.

“당시 성왕가는 주목을 받지 못했고, 경도에서 아무런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형님과 나는 어디든지 쏘다니며 놀 수 있었네. 자네 아버지가 매일 우리를 데리고 다녔고, 또 황실에서······ 진평평을 보내 줘서 우리 네 사람을 매일 함께 어울리며 놀았어. 내가 나이가 가장 어려서 괴롭힘을 많이 받았지.”

“그러던 중 어느 날 형님이 범건과 진평평을 데리고 유모의 고향인 담주로 놀러 갔다 와서는 나에게 재미있는 낭자를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무척 기뻐하더군.”

정왕이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낭자가 경도에 와서 성왕가를 찾아왔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 낭자가 바로 제 어머니군요.”

“그래, 맞아.”

정왕이 지난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당시 나이가 어렸던 거로 기억하는데, 나는 자네 어머니를 섭 누이라고 부르며 매일 같이 놀았다네······ 자네 어머니가 나를 정말 많이 예뻐해 주었지. 그래서 형님도 더는 진평평을 시켜 나를 괴롭히지 못했다네.”

노인과 청년이 함께 대화하며 걷다 보니 금세 서재 밖에 이르렀다. 범한은 정왕이 말해주는 지난 일들을 더 듣고 싶었음에도 서재에 관심이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왜냐하면, 정왕은 항상 채소를 기를 걸 좋아하고 책을 읽는 건 싫어했기 때문에 그가 서재에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정왕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앉도록 하게.”

범한이 먼지가 자욱하게 깔린 의자에 그냥 앉았다.

정왕이 책장을 훑어보다가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범한에게 건네줬다.

“읽어 보게.”

범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책을 받았다. 표지에 적힌 농예 강습이라는 글씨를 본 그가 정왕을 다시 바라봤다.

정왕이 범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 어머니에 관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아. 자네는 나에게 왜 잘 대해 주냐고 물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네. 나는 자네에게 충분히 잘해주지 못했어. 그들은 나를 근 20년 동안 속였네.”

서재를 천천히 걸어 나가던 정왕이 범한을 돌아보며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녀가 자식을 남기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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