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7화 군신 사이에는 애매함이 없어야 하는 법
섭령아가 살짝 얼굴이 벌게져서는 말했다.
“한 가지 가능성을 잊으셨습니다. 만약 3 황자가 제위를 물려받는다면 범한과 사제의 정이 있으니 돌이킬 수 없는 매우 급한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을 겁니다.”
2 황자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범한의 처지에서 말한 겁니다. 그리고 셋째가 나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자라는 모습을 보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물며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고려해야 할 일이 있지요. 저와 당신도 가끔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게다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황태자 저하가 진정한 계승자라는 겁니다. 그가 너무 조용히 있다 보니 많은 사람이 은연중에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지만 범한이라면 분명 잊지 않고 있을 겁니다.”
2 황자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누가 용상을 물려받든 부황이 승하하시기 전까지는 범한이 늙은 여우들의 도움을 받아 세력을 키우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겁니다. 이거야말로 용상을 물려받을 사람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나라가 부황의 나라인 이상 나라가 시끄러워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부황이 세상에 없는 뒤에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지요.”
황자가 황제의 생사에 대해 말하는 건 아들로서나 신하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섭령아가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화제를 돌려 물었다.
“하지만 이건 범한이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조정에 있는 원로들이 계획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범한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2 황자가 잠시 고민하다가 중얼거렸다.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지금 상황이 많이 불리해졌다는 것 말고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천하의 싸움에서 나아가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그가 직접 두 개의 길을 포기했으니 이제는 철저하게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는 없겠지요. 만약 제가 그의 상황에 있다면 지금 당장 입궁해서 감찰원과 황실 금고를 포함한 모든 자리에서 물러날 겁니다. 그런 뒤에······ 이전과는 달리 고분고분 행동하면서 암암리에 우리 쪽에 기대려 하겠지요.”
2 황자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그도 분명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를 받아 줄 마음이 있습니다. 고모께서도 그의 장모이시고 신아와 관계도 있으니 아마 지난 일을 털어내실 수 있을 겁니다.”
섭령아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자신의 혼사 때문에 자신의 가족과 멀리 정주에 주둔해 있는 군대가 황위 쟁탈 싸움이 휘말리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여기에 범한까지 더해진다면······ 그 뒤의 일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진 그녀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2 황자가 일어나 창밖 옅은 하늘빛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범한이 만약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가 만일 용기를 내어 태도를 바꾼다면 지금 당장은 큰 손해를 보겠지만 훗날에는 그와 범씨 집안 모두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이건 모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달렸지요.”
그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의 일들에서 알 수 있듯이 범한은 상식대로 움직이지 않는 광인입니다. 그래서 저도 제 생각대로 될 거란 기대를 하지는 않습니다.”
* * *
경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범한이 부드러운 외모와 다르게 갈수록 매정하고 잔혹한 기질을 드러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경도 사람들을 놀라 진저리치게 만든 것은 경도 밤중에 벌어진 살인과 체포가 아니라 그가 범씨 집안 사당에 들어갔다는 소식이었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범씨 집안 제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점심시간 무렵 이 소식은 이미 각 집안에 전해졌고, 일순간 사람들은 상황이 어떻게 변화할지와 이후 조정에서 범한의 영향력이 늘어날지 줄어들지를 가늠했다.
다만 2 황자와 마찬가지로 범한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의 사생아였기에 황실의 일원이 될 희망은 없었지만, 사생아라도 황자는 황자이므로 이 신분을 이용해 훗날 아주 큰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오래전에 진평평이 생각했던 대로 황태후가 죽은 뒤 범한이 다시 황자의 대열이 들어설 가능성도 아애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범한은 오늘 자신의 이름에 범씨 가문의 낙인을 찍음으로써 이씨가 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이건 사람들이 보기에는 멍청하고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깊은 황궁 안에서 이 소식을 귀인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운 글씨체로 범한이 보낸 천일각 선본을 베끼고 있던 숙 귀비는 궁녀에게 소식을 보고 받고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무를 빙빙 돌려 검술을 연마하고 있던 영 재인은 이 소식을 듣고는 얼굴이 밝아지면서 범한의 기백을 칭찬했다.
수방궁에서 3 황자의 공부를 지도하고 있던 의 귀빈은 성아에게서 소식을 듣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 없이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잠시 뒤 그녀가 장막 뒤로 아들을 끌고 가서는 진지하고 엄한 목소리로 오늘 경도를 뒤흔든 소식을 들려주었다. 3 황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세상을 알게 된 그는 범한이 범씨 집안 호적에 입적한 이유가 자신을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의 귀빈이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평아야, 범 선생이 너를 위해 한 모든 일을 머릿속에 새겨 두어야 한다. 만약 나중에 네가 감히 그러한 일들을 하려 한다면 어미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3 황자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궁 밖으로 나가기 쉽지 않아 광신궁 안에서 은거 중인 장 공주 이윤예는 가장 먼저 이 소식을 들은 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웃었다. 궁 안과 밖에 걸려 있는 하얀 천과 종이꽃과 장식 나무들의 광채도 모두 묻어 버릴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런 그녀는 바라보던 궁녀가 조심히 물었다.
“공주께서는 뭐가 그리 기쁘십니까?”
장 공주가 미소를 천천히 거두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본궁이 갑자기 내 사위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래. 분수를 알고 나가고 물러설 때를 알잖아. 그런 면에서 보면 정말 아까워·······. 내일 완아랑 함께 입궁하면 2년 동안 못 보는 사이에 얼마나 빠르게 성장을 했는지 봐야겠어.”
궁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범 대인의 이번 행동은 충동적이고, 이익과 손해를 고려한 행동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장 공주께서는 왜 이렇게 칭찬하시는 거지?’
하지만 장 공주의 얼굴을 보면 분명 작은 범 대인의 행동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함광전 안에서 황태후가 구슬을 손에 쥐고 새고 있었고, 늙은 홍 태감은 허리를 굽히고 허리를 굽히고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한참 뒤에 황태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애가 대세를 아는 건 쉽지 않을 텐데.”
늙은 홍 태감이 살짝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작은 범 대인은 평범한 분이 아닙니다.”
황궁 뒤쪽 작은 전각 안에서 황포를 입은 경국 황제 폐하가 뒷짐을 지고 그림 속 황색 옷을 입은 여인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아들은 확실히 자네를 더 닮았어. 거만하기가 이를 데가 없거든. 그 애가 돌아오지 않기를 짐이 바란 것도 아닌데 스스로 나서서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하는군······. 뭐 범씨 성도 나쁘지는 않지 않은가. 그때 당신과 역덕이 오누이처럼 지냈으니 어미 성을 따랐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차가운 겨울바람이 살랑살랑 전각 안으로 불어와 초상화가 살짝 흔들리자 그림 속 황색 옷을 입은 여인의 얼굴이 비웃는 듯이 보였다. 마치 황제의 말을 자신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 *
음력 정월 초하루 오후에 범한은 정왕가로 향하는 마차에 앉아 있었다. 이건 범씨 집안과 정왕과 사이에 있는 오래된 규칙으로 매년 해가 지나면 하루를 정해 양쪽 집안이 함께 모여 떠들썩하게 놀았다. 담주를 떠나 3년 동안 경도에 있으면서 범한도 자신의 집안과 정왕가 사이의 오랫동안 이어져 온 친밀한 관계에 익숙해져 있었다.
범한의 눈부신 활약으로 이홍성이 1년 동안 집에 갇혀 있어야 했지만, 그게 두 집안의 우정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더구나 범한은 이것이 사실은 정왕이 자신의 집안이 황위 쟁탈 싸움에 끼어드는 걸 방지하고 조카들의 싸움으로 양쪽 집안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하려고 내린 결단의 조치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차가 살짝 흔들리자 임완아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범한을 가만히 바라봤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요.”
“오늘 경도 사람들은 하루 종일 상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 거예요.”
임완아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모두들 상공이 바보라고 말하고 있을걸요.”
범한이 더욱 크게 웃고는 아무 말 없이 아내의 눈을 바라봤다. 잠시 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천하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당신은 속일 수 없어요.”
임완아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상공의 두 눈을 바라봤다.
범한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사실 이유는 간단해요. 딱 두 가지거든요. 하나는 저는 할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지금까지 저는 제가 범한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래서 다른 성씨를 받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항상 범씨 가문에 입적하기를 소망해 왔죠. 그래서 제가 바라는 대로 움직인 거예요.”
임완아가 살며시 그의 어깨에 기대 체온을 느꼈다.
“둘째 저는 이미 강남에서 셋째를 지지하겠다고 밝혔어요. 경도로 돌아와 피바람을 일으키고 오늘 가문에 입적을 한 바로 그런 제 뜻을 밝힌 거지요.”
범한이 고개를 숙여 임완아의 윤기 나는 뺨을 바라보았다.
“담백하게 고상한 뜻을 펼칠 수 없다면, 안정적으로 멀리 갈 수 없으니 멀리 이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뜻을 밝혀야 하는 법이에요.”
“무슨 뜻을 밝힌다는 거예요? 누구에게 뜻을 보일 건데요?”
범한이 아무 말 없이 황궁 안에서 황제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제가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는 걸 밝힌 거죠.”
그가 담담히 말했다.
“폐하에게 그 뜻을 보인 거예요.”
임완아가 아무 말 없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범한은 그녀가 눈앞에 자신이 아닌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미래에 마주할 상황과 범씨 가문이 겪을지도 모를 재난을 떠올리고 있었다.
“물을 거슬러 올라갈 때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뒤로 밀려나 배가 전복되게 돼요. 저는 지금껏 이 이치대로 움직인 거예요.”
범한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모든 상황이 제게 싸우라고 등을 떠밀지만 황제께서 제게 싸우지 말라 경고를 하셨으니 저는 싸우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범한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
“물이 흘러가는 대로 따르는 게 편하기는 하죠. 천하에서 제가 무서워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당신 외삼촌은 좀 무섭거든요.”
임완아는 웃으면서도 여전히 눈빛에는 근심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요?”
“앞으로요?”
범한이 말했다.
“폐하는 최소한 20여 년은 더 살아계실 거예요. 알 수 없는 미래의 위험과 20여 년 동안의 평화를 바꿨다고 볼 수 있죠. 아니면 20여 년 동안 폐하의 신임을 얻기 위한 일이었다고 봐도 좋고요. 절대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에요.”
“게다가 저는 애매하게 행동하지 않고 결단성 있고 단호하게 제 태도와 뜻을 밝혀야 해요. 셋째 뒤에 선다는 것만으로는 많은 사람을 설득하기에는 부족하니까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피곤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녀 사이에는 애매한 관계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임금과 신하 사이에 관계가 애매하면 죽임을 당하기 쉽죠. 폐하도 분명 제 결정에 만족하고 계실 거예요.”
이 말은 아내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애매한 것은 양측의 상호 작용으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오늘 범씨 집안 사당에 들어간 것은 그가 황제에게 진심을 표현한 것이자 황제가······ 그에게 천하를 물려줄 의사가 없다는 걸 알려준 것이었다.
범한은 이 사실에 약간은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지금 당장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진평평이 그날 밤 깨달았던 것처럼 그 역시 폐하가 병에 들고 정신이 피폐해지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정왕가 대문 앞에 멈추자 일찌감치 저택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종들이 범씨 집안사람들을 맞이했다.
범한이 임완아를 데리고 아버지와 유씨 뒤를 따라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둘러보니 저택의 모습은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다만 호숫가에 흰색 발이 걸려 있지 않았는데, 지금이 겨울이라 햇볕을 가릴 필요가 없어서였다. 고개를 살짝 돌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내를 바라본 그의 머릿속에 처음 연애를 했을 때가 생각났다.
바로 그때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목소리가 달콤한 추억에 잠겨 있던 범한을 깨웠다.
“개 같은 놈이, 그래도 나를 보러 올 생각은 했구나!”
두 눈을 부릅뜨고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범한을 노려보는 정왕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슬픔과 회한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