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화 담박공 (2)
범한이 이러는 이유가 뭔지 모르는 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범한을 향해 소리쳤다.
“앞으로 굴러와라!”
범한은 구르지는 않고 엉덩이를 실룩이며 뛰어서 용상 아래로 갔다. 여전히 단호함과 고집스러움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황제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물었다.
“교지를 받을 거냐 말 거냐?”
“받지 않을 겁니다.”
황제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왜 받지 않겠다는 거냐?”
황제의 물음에 범한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소신, 하종위가 싫습니다.”
황제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에는 조정의 체면을 깎더니 오늘은 짐의 체면을 깎으려 하는 게냐? 썩 물러가거라!”
뒤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요 태감은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물러나는 범한을 바라보는 대신들의 눈빛이 점차 심상치 않게 빛났다. 대조회에서 폐하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엄청난 총애였다.
황제는 범한이 다시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그가 교지를 받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요 태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요 태감이 대 내관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날카롭게 잠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행 강남로 전권 흠차 범한 앞으로 나와 교지를 들어라.”
놀란 범한이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천천히 읊는 교지에는 어사가 감찰원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범한이 1년 동안 강남에서 한 이들을 대략적으로 말했는데, 특히 황실 금고 전운사의 일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면서 범한이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웠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범한이 설청 총독을 도와 강남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조사한 점도 칭찬했다.
황제가 중간에서 입을 열었다.
“범한은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관리이니 큰 상을 내리려 한다.”
관리들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들 범한이 또다시 상을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황실 금고가 1천여만 냥의 은전을 보낸 건 엄연한 사실이었고 나라를 위해 이만한 이익을 거둔 건 분명 적군을 막아낸 것과 맞먹는 공이므로 큰 상을 내리는 게 당연했다.
이때 설청이 앞으로 나가 강남에서 범한이 한 일을 보충해 설명하고는 그 공을 찬양했다. 호 대학사도 앞으로 나와 작은 범 대인에게 큰 상을 내리는 게 마땅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때 서무 대학사가 주변 분위기를 살피며 고민하다가 범한을 힐끗 쳐다보고는 결심이 선 듯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왔다.
“폐하······ 반년 전 문하중서에서 제안했던 일을 다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작은 범 대인은 명성, 학문, 능력 중 무엇 하나 빠지지 않으니 문하중서에 들어와 국사를 의논할 충분한 자질이 있습니다. 감찰원 관리는 조정에 관리로 임명될 수 없지만 작은 범 대인께서 방금 감찰원 제사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견을 보였으니······.”
황제가 마른기침을 하며 서 대학사에게 눈치를 줬다.
호 대학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무를 힐끗 노려보며 속으로 정말 집요하다고 생각했다. 폐하가 범한이 정무에 참여하거나 감찰원 제사직에서 물러나는 걸 허락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서무는 두 사람이 반년 전에 품었던 뜻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서무가 먼저 입을 열었으니 그도 같이 범한이 정무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범한은 이전에 감찰원 보고를 통해 이 일을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의외였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자신이 정무에 참여한다는 게 너무나도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주장은 무시한 채 요 태감에게 교지를 마저 읽게 했다. 교지의 내용을 모두 들은 범한은 한동안 멍하니 굳어 있다가 겨우 감사 인사를 토해냈다. 자신이 대학사가 되어 정무에 참여하는 것도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황제가 자신에게 내린 상은 더 황당했다.
담박공.
그 말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다가 이내 놀란 비명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범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떻게 공작에 봉해진 거지? 이거 아버지의 작위보다 높은 거 아닌가?’
황제의 몽둥이질은 매서웠지만, 보상으로 내리는 사탕은 또 무척이나 달콤했다. 대왕보다 조금 아래인 존귀한 작위를 받은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하종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이놈을 때리며 놀아 볼까나?’
원래 범한의 작위는 1등급 남작, 정2품으로, 공작은 중간에 후작과 백작을 건너뛴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 지금 그의 나이에 공작에 봉해진다는 건 엄청나게 영광스러운 일이었기에 일순간 아무런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반면 주변에서는 이유를 알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겉으로는 강남에서 세운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달았지만, 사실은 폐하가 자신의 사생아 아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고 싶어 작위를 내려 준 거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1 황자와 2 황자는 일찌감치 친왕에 봉해진 점을 보면 범한이 담박공에 봉해진 걸 지나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에 앞으로 나와 격렬히 반대를 하려 했던 대신들도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이건 황족의 집안일이었지 조정의 국사가 아닌 만큼 관리인 자신들이 여러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범한의 얼굴에서 잠시 기뻐하는 기색이 돌더니 이내 사라졌다. 지금 태극전에 있는 다른 관리들에게는 공작이란 단어가 금빛 찬란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범한의 경우에는 이미 그 범위를 넘어서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는 그에게 알리지도 않고 어사를 투입해 감찰원을 감시하게 함으로써 범한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전의 모습과 달리 생트집이라도 잡아서 황제가 마음의 짐을 덜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더욱이 그는 마음속으로 어렴풋하게 공작이라는 위치가 경국에서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목적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담박공은 3등공으로 두 단계는 더 올라갈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아마도······ 젊은 나이에 은퇴 생활을 하게 될 거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황당한 감정이 솟구친 그가 대전에 서서 실소를 터뜨렸다.
모두가 경국이 개국한 이래로 가장 젊은 소공야(小公爺)를 바라봤다. 사람들은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표독스러운 웃음과 귀를 거슬리게 만드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서 있었다.
* * *
조정에서 의논해야 하는 3로 총독들의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시끌벅적한 대조회는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황제는 복잡하게 얽힌 사안들을 재빨리 해결하기 위해 대부분의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고는 대신들을 해산시켰다.
대신들은 이미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기에 황궁 문을 나가 각자 저택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모두가 돌아갈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문하중서에서 일하는 중요 인물들과 오랜만에 경도로 돌아온 3로 총독 대인들 그리고 각 관아의 상서들은 조용히 황제 폐하를 따라 어서방으로 갔다.
범한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맨 뒤를 따랐다.
1여 년 전에 북제에서 경국으로 돌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서방 안에는 범한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지난번에는 장묵한에게 증서를 받아서였고, 이번에는 황실 금고에서 거금의 은전을 마련해 조정에 보냈기 때문이었다.
범한이 동그란 걸상에 앉아 약간은 불안한 모습으로 어서방 안에서 국사를 논의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정무에 관심이 없었고, 또 그가 잘하는 분야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자리만 채우고 있었다.
황제도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데다가 범한이 국사에 여러 견해를 드러내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새롭게 소공야가 된 범한은 자리를 지키고 앉아 황제의 평상 옆에서 학생처럼 공손하게 서 있는 황태자를 비롯한 황자들을 바라보자 꼭 자신이 스승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황제와 대신들은 남쪽 눈 피해와 북쪽 상황 등을 토론한 뒤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범한은 어젯밤에 먹었던 양고기와 새벽에 순두부가 이미 소화가 다 돼서 배가 고팠기에 밥을 먹는다는 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행복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태감이 건네주는 도시락을 받아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숨에 다 먹어버렸다.
중요한 일들은 이미 대조회에서 다뤄졌기에 어서방 회의에서는 새로운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설청이 가끔 항주회가 강남에서 이재민을 구한 일을 칭찬할 때마다 경도 안에 각 관아 관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항주회를 들어 보기는 했지만 항주회가 큰 재력과 세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적 없었고, 이재민을 구하는 걸 관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에 황제가 범한에게 일어나 설명을 하게 했다. 범한을 설명을 듣던 서무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제야 항주회의 배후에 황궁 안 귀인들이 있으며, 명의상 대표는 황태후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항주회가 이와 같은 세력을 갖추게 된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다만 모두들 황궁 귀인들은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드러낼 뿐이고 진짜 일을 진행하고 자금을 융통하는 건 범한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생하는 건 범한이 아니라 신아네.”
대신들이 ‘하하’ 웃으며 아부를 한바탕 늘어놓고 황궁 귀인들을 찬양하고 황제의 영민함을 칭송했다. 그때 범한이 약간 정신이 나간 표정을 짓는 걸 본 황제가 못마땅하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1 황자가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군주가 오늘 경도로 돌아옵니다.”
황제가 ‘음’ 소리를 내며 이전보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즉시 어서방 회의를 끝낸 뒤 누구보다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범한을 남게 했다.
어서방 안에 정신을 안정시키는 향기가 천천히 퍼졌다. 우유처럼 하얀 색깔의 연기는 향기가 무척이나 맑았다.
어서방 안에는 황제와 범한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범한이 자리가 불편한 듯 눈치를 살피며 황제가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다.
제비집 죽을 먹던 황제가 고개를 들어 범한에게 먹겠냐는 눈짓을 해 보이자 그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담백하게 고상한 뜻을 펼칠 수 없다면, 안정적으로 멀리 갈 수 없다고 했지.”
황제가 그릇을 내려놓고는 천천히 말했다.
“아무 걱정 없이 계속 담담하게 살고 싶다는 말은······ 2년 전에 네가 경도에서 서점을 열면서 했던 말이 아니냐.”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박서국의 진짜 뜻은 누이인 범약약만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바로 ‘담주에서 정박했다’는 말의 줄임말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가 갑자기 어린 누이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북쪽에서 잘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짐은 네 이 말이 마음에 든다. 그러니 네게 담박공을 내려준 의미를 너도 분명히 알고 있겠지.”
황제가 자신의 아들 중 가장 재능이 많은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뜻은 분명하게 밝히고 생각은 적게 하겠습니다.”
“그래.”
황제가 차분하게 말했다.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적게 생각하도록 해라.”
성실한 신하가 되라는 것일까? 아니면 고립된 신하가 되라는 것일까? 사실 황제의 의미는 무척이나 단순했다. 바로 황제의 신하로서 아무 걱정 없이 계속 담담하게 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은 자기 생각은 드러내지 않은 채 성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군주와 신하 사이에서 ‘알겠다’라는 말을 하는 건 언제나 황제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내뱉는 범한의 모습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황제도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요 태감도 지난 2년 동안 범한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폐하를 대한 모습을 봐왔기에 놀라지 않았다.
황제가 손을 젓자 요 태감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어서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