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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580화 (580/1,108)

580화 대조회

오늘 대조회는 참석하는 관리들의 숫자가 평소보다 많았지만 범한의 관리 품계로는 조회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다. 다만 오늘은 강남로 흠차의 신분으로 온 것이었고, 또 업무를 보고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참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궁도 품계에 따라 이뤄졌기 때문에 범한은 가장 뒤에서 기다려야 했다. 황궁 문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그에게서 차가운 한기라도 품어져 나오는 건지 주변에 있는 관리들을 두려움에 진저리를 쳤다.

범한이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이 먼저 황궁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앞을 지나는 관리들은 머릿속에 복잡했다. 서무 대학사처럼 관직이 높지 않은 이들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상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범한을 그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이에 그의 앞을 지날 때마다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가벼운 인사를 했다.

1년 동안 보지 못했다고 해서 작은 범 대인을 얕볼 수 있는 대신은 없었다.

“작은 범 대인 별일 없으시지요?”

“작은 범 대인 안녕하십니까.”

범한은 인사를 받을 때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함께 인사했다. 비록 오늘 조회에서 이들의 공격에 체면을 잃을 처지였지만 황궁 문 앞에서 대인들에게 인사를 받으니 체면을 세웠다는 생각에 우쭐해졌다.

* * *

이제 그의 앞에 남은 건 태극전에서 대신들의 공격을 받는 일이었다.

대열 맨 마지막에 선 범한이 곁눈질로 용상에 앉은 황제를 슬쩍 바라봤다. 피곤이 몰려와서 힘들어하고 있던 그는 황제의 평온한 얼굴을 보자 순간 화가 치솟았다.

‘얼굴이 좋은 걸 보니 단잠을 잤나 보군. 나는 일을 처리하느라 피곤해 죽을 지경인데 말이다. 어젯밤에 그렇게 일했다고 오늘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과연 모두의 예상대로 대조회가 시작되자마자 규정된 절차가 진행될 새도 없이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 그리고 아래 3로 총독들이 재빨리 상소를 올렸다. 바로 범한과 감찰원이 어젯밤에 저지른 일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범한은 상소에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서무의 말을 통해 짐작해 볼 수는 있었다. 감찰원은 관리들을 감찰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어젯밤 삼십여 명의 관리들의 체포한 건 지금껏 발생한 적이 없던 천하가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가 놀랍지 않다는 눈빛으로 3로 총독 대인들 중 맨 선두에 서 있는 설청을 바라봤다. 경국은 영토가 상당히 커서 4로 외진 곳에 있는 총독들은 2년에 1번씩 경도로 돌아왔다. 설청은 어젯밤 황제의 명을 받아 포월루 연회에 참석해 싸움을 지켜본 만큼 밤중에 황궁에 입궁해 황제에게 보고를 올렸을 것이었다. 그래서 범한이 이 일로 황제가 자신의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피곤해서 듣기 싫은 것도 아닌데 조회에서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태극전을 가득 메운 문무백관들의 공격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그의 귓가를 울렸고, 죄명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조정을 기만했다느니 덕을 중시하지 않는다느니 나라의 인재를 개인의 사욕을 위해 마음대로 사용했다느니 패거리를 만들어 이러쿵저러쿵했다느니······.

감찰원과 문관들은 원래 철천지원수와 같은 사이였다. 감찰원과 부딪칠 때면 문관들은 어떤 파벌에 있든 상관없이 하나로 똘똘 뭉쳤다. 임약보가 재상으로 있을 때도 그랬고, 지금 대학사들이 수장으로 있을 때도 문관들은 황제의 간첩 기관인 감찰원이 도를 넘은 행동을 저지를 때마다 단결해 반격을 퍼부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범한이 어젯밤에 저지른 일을 도를 넘는 일이었고, 그래서 오늘 대조회는 그를 공격하기 위한 전장이었다.

더욱이 이전과는 다른 것이 줄곧 감찰원과 관계가 친밀했던 군대 쪽도 오늘만큼은 침묵하지 않았다. 추밀원 부사 두 명이 앞으로 나와 감찰원의 행동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문무백관들이 하나로 뭉쳐 가하는 압력은 설사 황제라 할지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데, 하물며 지금 그 공격을 받은 대상은 대열 맨 끝에 외로이 서 있는 범한이었다.

태극전의 분위기는 답답하기보다는 오히려 겨울날 특유의 건조함으로 가득했다. 서무를 수장으로 관리들이 연이어 상소를 올려 황제에게 감찰원의 권한을 제한하고, 동시에 이 일을 진행할 황제의 결제를 요구했다.

범한의 마음을 찌르고 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중상모략이 곳곳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평범한 대신이 지금 범한과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분노에 이성을 잃어 대신들에게 달려들어 입씨름을 벌이거나 용기를 내어 도찰원 어사들의 수염을 뽑아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여전히 침착한 모습으로 조금의 변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꼬리를 올리고 자조 섞인 미소를 지은 채 대조회의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범한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는 누군가의 마음을 불쾌하게 했다. 누군가는 그의 미소를 바라보며 자신의 아들이 너무 오만하고 경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용상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렸다.

“범한! 자네는 할 말이 없는 것인가?”

졸음과 한참 사투를 벌이던 범한이 황제의 호통을 듣고는 화들짝 놀라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관복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와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폐하, 어젯밤 감찰원 1처에서 32명의 관리를 체포한 것은 경국의 법률에 따라 한 것으로 잘못된 부분은 없습니다. 이에 소신은 문무백관들이 격분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냉소를 지었다.

“하룻밤에 32명을 체포하다니 정말 담이 크군······. 설마 자네는 경국 조정에 탐관오리만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범한이 정색하며 말했다.

“어찌 감히 폐하를 속일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는······.”

그가 말꼬리를 늘리며 태극전 안에 있는 관리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엄숙하게 말했다.

“나라를 좀먹는 해충들이 가득하지요. 32명은 적은 숫자일 뿐입니다. 폐하께서 감찰원에 특명을 내려 주신다면 소신이 조정에 남아 있는 탐관들을 모조리 잡아내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놀라 경악한 관리들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범한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다고 생각했다. 조정이 무엇인가? 조정은 바로 대신들이었다. 탐욕을 부린다는 이유로 천하의 관리들을 전부를 체포한다면 누가 폐하를 대신해 천하를 다스리고 만백성을 지키려 하겠는가? 그러니 황제가 그에게 그런 특명을 내려 줄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크게 화를 내며 범한을 향해 대세를 모른다느니 함부로 행동한다느니 황제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느니 하며 꾸짖었다.

그런 욕을 듣자 범한은 마음이 불쾌했다. 이 모든 게 연기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잠자코 뒤로 물러나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오늘 조회에서는 2 황자가 데리고 있던 남은 여덟 가문의 장수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 사실이나 연 대도독의 외아들이 죽은 사실이나 장 공주의 책사 황의가 독을 먹고 피를 토한 사실을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관리가 아니었고, 암암리에 벌어진 일을 밖으로 드러낼 만큼 대신들이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젯밤 일어난 일은 문무백관들에게 경계심과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으므로, 황제는 오늘 조회에서 관리들의 마음을 진정시켜줘야 했다.

하지만 용상에 앉은 황제는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범한이 경도 교외에서 자객을 만난 일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었는가?”

관리들이 모두 침묵했고, 대리 사경과 형부 상서가 겁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죄를 빌었다.

감찰원도 사건 조사를 맡은 기관인 만큼 범한도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와 죄를 청했다. 본인이 자객을 만나 죽을 뻔한 일을 본인이 제대로 조사하지 못해 죄를 청하는 황당한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황제가 범한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 증인이 어젯밤에 감옥에서 죽었다고 들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가?”

범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황제가 벌써 소식을 들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한편 무신들은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범한이 이 일을 어떻게 해명할지 기다렸다.

사실 이미 사전 준비를 마친 황제에게 해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가 독단적으로 며칠 동안 준비한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의 첫 번째 부분을 들은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폐하가 감찰원의 권력을 삭감했기 때문이었다.

감찰원은 품계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권한에 상당한 제약을 두게 되었다. 더욱이 경도를 지키는 1처는 예전처럼 체포 권한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체포한 뒤 상세한 규정에 따라 일을 진행해야 했다. 특히 대리사와 관련된 범인을 체포할 경우 48시간 안에 이루어져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1처는 이제 경도 관리들을 몰래 심문할 수 없었다.

동시에 각 주에 주둔하고 있는 4처의 권한에도 제약이 주어져야 한다고 정해졌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규정을 정할지는 범한의 감찰원에 돌아가 스스로 작성을 한 뒤에 조회에서 토론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두 가지 변화는 겉보기에는 사소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감찰원을 정해진 규정에 맞게 움직이도록 함으로써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범한이 이 명령을 듣자 파리를 씹은 것 같은 구역질이 났지만, 감사 인사를 올린 뒤 조용히 물러났다.

반면 문무백관들은 모두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들은 폐하가 범한을 질책하고 감찰원을 비난해 체포된 하급 관리들에게 살아날 길을 만들어 주려는 소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폐하가 정말 감찰원을 건든 것이다. 만약 이런 추세대로 된다면 감찰원의 권한은 점차 줄어들 것이었다.

그리하여 태극전에서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관리들은 폐하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현명한 군주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황제의 명령 중 두 번째 부분을 듣자 문무백관들은 폐하가 비록 현명한 군주이긴 하지만 여전히 제 자식을 너무 감싼다고 생각했다.

어젯밤 체포된 관리의 경우 앞서 말한 규정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이에 감찰원이 모든 심문을 담당한 뒤 대리사에서 죄를 정하고 처벌하도록 정해졌다. 동시에 황제 폐하는 대신들이 부하들을 소홀히 관리하고 나라의 은혜를 잊은 채 사사로운 이익에 눈이 멀어 패거리 짓만 일삼는다고 질책했다.

그 말에 대신들이 난처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어서 산골짜기 습격 사건 조사가 미진한 점과 경도 수비의 문제점, 경도 관리의 부정부패를 문제 삼아 추밀원 우부사 곡향동이 강등되었고, 경도 수비 진항은 면직되었다. 이로써 진항의 자리는 서정군 부장으로 교체되었고 진항은 추밀원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형부 시랑이 교체되고 대리사 부경이 교체되었으며 도찰원 집필 어사도 교체되었다.

전부 며칠 전에 입궁했던 젊은 관리들로 교체되었다.

관리들은 멍하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제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모두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기만 했다. 만약 최근 며칠 동안 경도에서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대규모의 인원조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관리들이 고개를 돌려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대열 맨 끝에 서 있는 젊은 청년을 바라봤다. 그제야 이들은 작은 범 대인이 어젯밤에 저지른 잔학무도한 일들은 모두 오늘 조회에서 내려질 명령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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